Chapter 271 - 271. 상태 (2)
"그렇게 막 대단한 이야기는 아닌데···. 듣고 싶어요?"
부끄럽다는 듯 작게 웃으면서 말하는 최미소.
"그야 듣고 싶죠. 부담되시면 안 하셔도 되구요."
한세아는 괜찮은 척 말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흥미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수, 예린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들의 꼬리가 살랑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냥···, 그냥 제 겨울을 사준 사람이예요. 칼카타는."
최미소는 자기 앞에 앉은 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과거를 회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기억 하나하나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서울에서 전쟁이 났다는 건 다들 들었나요?"
"네, 칼카타가 말해줬습니다."
비록 단편에 불과한 이야기였지만, 우리는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폐허가 된 도시를 직접 눈으로 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여기는 사실상 서울이나 다름없는 위치라서 그 영향을 피할 수 없었어요. 피하기는커녕 이곳도 전쟁터였죠.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쉬지 않고 울리는 총 소리가 귀를 점점 먹먹하게 만드는 와중에도 똑똑히 들렸던 사람들 비명 소리가 아직도 생생해요."
"······."
"대피하라고 방송도- 아니, 방송이 나오지 않아도 도망을 가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머리로만 생각할 수 있을 뿐이었어요. 무서웠거든요. 그렇잖아요? 사방에서 괴물들 소리가 들리고, 군인들이 총 쏘는 소리가 들리고, 지진까지 나서 정신이 없었다구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저 가만히 여기에 숨어 있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계속해서 굴렸죠."
최미소의 이야기에 우리의 머릿속에는 붕괴되어 단면을 드러내는 건물들을 떠올렸다. 더불어 그 안에 숨어 있었을 사람들이 몸을 바싹 웅크리고 있는 모습까지도.
"근데 그러다가 갑자기 ···쾅!"
손을 쫙 피며 효과음을 내는 최미소. 흉내낸 소리는 나지막했으나 그 소리를 상상한 우리는 절로 몸이 움츠려졌다.
"제가 숨어 있던 건물이 폭격에 맞았어요. 아니, 사실 지금 떠올려보면 폭탄이 아니라 거대한 나무뿌리였던 것 같기도 해요. 아무튼 중요한 건 한계에 다다른 건물이 기어코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지반 자체가 기울어져 있던 터라 그동안 버티고 있던 게 사실 기적이나 다름없었거든요."
그녀는 목이 타는지 목을 축인 다음에 말을 이었다. 칼카타는 조용히 최미소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의 큼지막한 손은 아내의 작은 손을 한 번에 가렸다.
"그 순간에는 그냥 '아, 이제 죽는구나. 하긴 지금까지 산 것만 해도 오래 버틴 거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아낀 식량이나 먹어둘 걸. 배고프네.' 이런 시답잖은 생각만 들더라구요. 웃기죠? 죽기 직전인데, 건물 잔해에 깔려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주제에 배고프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그리 우스운 일은 아니었다. 인간은 자기 욕구를 가장 우선시하는 동물이니 말이다. 하물며 부상을 입어 피를 흘리고 있기까지 했으니 본능이 더 고개를 쳐들었겠지. 단지 그 당시에 가장 강한 욕구가 식욕이었을 뿐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때였어요. 전조도 없이 절 깔아뭉갠 잔해가 치워진 게요. 가물가물한 눈으로 들어오는 빛이 어찌나 밝던지. 저는 이미 죽은 게 아닐까 할 정도였다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지금은 제 남편인 칼카타가 절 구조해준 거였죠. 그건 마치···."
최미소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운명 같았어요."
"우연이었다."
불쑥 답을 내뱉은 칼카타와 말이 겹쳤다. 칼카타와 최미소는 동시에 답했으나, 그 답은 서로 달랐다. 말이 엇갈린 것이다.
"···여보?"
최미소는 온화한 미소를 순식간에 지워냈다.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던 나, 지수, 예린, 한세아도 산통 깨는 소리로 흐름을 끊은 칼카타를 바라보았다. 특히 예린의 불만이 가장 컸다.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구한 것이지, 그때는 점괘도 치지 않은 터라- ···아니, 말 끊어서 미안하군. 가만히 있겠다."
나보다 눈치가 없는 칼카타는 계속 말을 잇다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나서야 돌아가는 분위기를 느낀 모양이다.
"그래서요? 그 뒤는 어떻게 됐는데요?"
예린이 다시 흐름을 잡으려는 듯 뒷이야기를 물었다.
"그 뒤는 뭐···, 그이가 다친 절 치료해주고 항상 옆을 지켜줬어요. 부상에 다친 제가 한창 끙끙거리며 힘들어 했을 때, 도시가 안개로 뒤덮인 걸 보고 죽고 싶어졌을 때, 약 안 먹겠다며 바보같이 고집부리다가 기어코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을 때, 아픈 게 서러워서 혼자 울고 있을 때, 그의 동료가 하루가 지날수록 줄어가는 상황에 역시 나도 곧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또다시 들게 되었을 때도, 칼카타는 항상 옆에 있었어요. 그저 묵묵히."
힘들었던 자기 상황을 겨울에 빗대어 말한 최미소는 자기 손을 덮고 있던 칼카타의 손에 나머지 손을 올려 포갰다.
칼카타는 약간 험악하게 생긴 외형과 다르게, 의외로 배려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의외인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을 많이 쏟았으니 말이다.
말만 대전사, 대전사 하는 것이 아닌 실제로 호탕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칼카타. 그 덕분인지 몰라도 그런 행동이 최미소의 호감을 사는데 일정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거창한 위로의 말을 들은 것도 아니예요. 뭐든 말만 하라며 허황된 약속해서 달래준 것도 아니죠. 하지만 가장 추울 때, 단순히 누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되더라구요.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최미소는 자기 이름처럼 미소를 지었다. 과연, 시원하게 지어진 그 미소는 아름다웠다. 애정을 담아 칼카타를 바라본 것도 그렇게 보이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야기의 훈훈한 결말에 웃음을 마주 지었다. 여태까지는 듣기 힘든 암울한 이야기만 들어 왔건만.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오랜만에 들은 덕분에 주변에 훈풍이 부는 느낌이었다.
칼카타가 자기 겨울을 사줬다는 말처럼, 주위는 마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 것처럼 따뜻한 분위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어지는 최미소의 답이 들려왔던 까닭이다.
"그래서 덮쳤어요."
"······예?"
나, 지수, 한세아는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하며 몸이 바싹 굳었다. 더 흥미진진한 표정이 된 건 예린뿐이었다. 아이의 꼬리가 일자로 바싹 섰다.
"아니, 며칠이 지나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길래 이거 가만히 두면 죽도, 밥도 아무것도 안 될 것 같━"
"애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군. 자,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저녁이나 먹지. 시간이 늦었다."
그런 상황을 수습한 건 더 이상 지켜보지만 못하게 된 칼카타였다. 그는 한 손으로 최미소의 입을 막은 채, 나머지 손을 허공에 휘적여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이번에 이야기의 흐름을 끊은 건 아주 잘한 일이었다.
"아!!"
이야기의 흐름을 또다시 뺏긴 예린이 탄식을 내뱉었다. 예린은 불만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도움을 청했지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그저 서둘러 자리를 파하며 칼카타가 말한 대로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할 뿐.
"현우씨는 쉬고 있어요. 제가 저녁 준비할게요. 미소씨, 혹시 저 창고에 있는 거 좀 써도 될까요?"
나도 그녀들을 따라 일어나려고 하니, 한세아가 여자들만의 이야기가 남았다며 나를 막아세웠다.
"네, 드시고 싶으신 거 고민하지 마시고 다 가져오세요. 어차피 양은 많아서 다 같이 나눠 먹고도 남거든요. 아, 그럴게 아니라 제가 같이 가면 되겠네요! 겸사겸사 집에 있는 것들도 소개해줄 겸 해서요. 여기서 한동안 머무르실 거잖아요? 그럼 방도 나눠야 하구요."
"도와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저 따라오세요. 한층을 전부 창고나 집으로 쓰고 있어서 머물 수 있는 방은 차고 넘치거든요. 각자 원하는 방을 잡으면 될 것 같아요."
"넵! 예린아, 너도 가자. 같이 와서 언니 좀 도와줘."
한세아와 최미소는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고가 많다는 최미소의 말에 눈을 반짝인 한세아는 무거운 몸이 된 최미소를 부축해주며 같이 걸었다.
그리고.
"아······."
예린은 힘없이 몸을 축 늘어트리고 한세아에게 강제로 끌려가게 되었다. 반론은 받지 않았다.
이내 지수마저 그녀들을 따라 사라지자 이제 거실에 남은 사람은 나와 칼카타였다.
"칼카타. 어제 저한테 한 말 기억납니까? 씨앗 어쩌고 했었잖아요. 많이 쓰면 안 된다고."
마침내 둘만 남게 된 상황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칼카타에게 물었다.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는 탓에 지수, 예린, 한세아가 없는 지금이 내 상태에 묻기 최적의 타이밍이었던 까닭이다.
혹여 내가 여기서 더 힘을 쓰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녀들이 어떻게 나올지 눈에 선했던 까닭이기도 했다.
힘을 쓰지 않으면 헤쳐 나갈 수 없는 상황이 수두룩한 세상이다. 그러니 일단 내가 먼저 칼카타의 이야기를 듣고, 나머지를 판단하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그리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