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72화 (273/497)

Chapter 272 - 272. 상태 (3)

"···흠. 그래, 그 이야기도 해 줘야 하지."

칼카타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나를 어느 방으로 이끌었다. 무언가 보여 줄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도착한 방에는 커다란 침대 하나, 주위가 탁 트인 풍경을 보여주는 창문, 화장대, 옷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안방으로 쓰고 있는 듯했다.

"해가 지고 있어서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건만. 다행히 아직 보이는군."

그는 지평선에 걸쳐 있는 거대한 나무를 손으로 가리켰다. 칼카타의 말처럼 해가 저물고 있어 시야는 어둑어둑했으나, 거목의 윤곽만큼은 볼 수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고층 빌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나무가 매우 거대한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긴 왜 온 겁니까?"

일단 따라오긴 했지만 영문을 몰라서 물었다.

"말하기에 앞서, 비교 대상이 눈에 보이면 이해가 더 쉽지 않겠나."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는지 칼카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대충 알았다는 시선을 보내자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도 얼추 짐작하고 있겠지만, 네 심장 속에 있는 조각. 즉, 어머니의 씨앗은 지금 저 멀리 보이는 세계수와 동일한 것이다. 한마디로 너는 신의 조각을 품고 있다는 거다. 단지 발아를 했냐 하지 못했느냐의 차이일뿐."

거기까지는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허나, 그렇다면 지구의 환경을 바꿔 버린 그것과 내가 낼 수 있는 힘의 차이는 왜 이렇게 큰 것인가. 그게 궁금했다.

물론, 완전히 짐작이 가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럼 전 왜 이렇게 약한 건가요."

"하나의 별에서 이미 하나의 세계수가 태어났다. 그래서 나머지 조각이 씨앗에서 더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도 있고, 원래는 한낱 인간이 품을 수 없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너를 무시하거나 그런 것이 아닌 그건 명백한 사실이야.

원래 그건 인간이 다룰 수 없는 물건이다. 실제로 내가 있던 고향의 대사제도 매우 조심스럽게 동화했고. 아, 대사제에 대해서는 묻지 마라. 나는 그 치들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냥 그런 것들이 있었다는 것만 알 뿐이니 말이다.

"

"······."

"그리고 네가 약하다는 건 기본적으로 출력의 문제지. 어머니가 바다라면, 너는···."

"저는···?"

뜸을 들이며 말하는 칼카타에 괜히 조바심이 나 되물었다.

"흠, 고무 호스 정도나 간신히 될까. 그것도 후하게 쳐준 거다."

"···차이가 그렇게?"

바다와 고무 호스.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둘을 같은 선상에 올려 두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다. 그 정도로 차이가 컸다.

"당연하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원래 인간이 품도록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오히려 너는 네가 지금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해. 그래서 너에게 경고한 거야. 네가 조각의 힘을 이끌어낼수록 너는 네가 아니게 될 가능성이 커지니까. 씨앗과 동기화하면 할수록 네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었나? 콜록! 콜록!"

칼카타는 내 심장 부근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다가 갑작스레 터진 기침에 급하게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았다. 기침은 한동안 이어지다가 멎었다.

"어···, 칼카타. 어디 아픈 겁니까?"

나는 원래 할 말을 속으로 집어넣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기침하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까닭이다.

"콜록! 크흠! 아무 일 없다. 그냥 사래가 들렸을 뿐이야."

칼카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는 원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가 그렇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 나는 잠시 칼카타를 보다가 이야기를 다시 궤도에 올렸다.

"······그, 이상한 속삭임이 들리긴 했습니다. 자꾸 하나가 되자는 속삭임이요. 혹시 검은 힘을 태우는 불을 이제 더 쓰면 안 되는 건가요?"

"조각이 3개로 나뉘었다는 건 알고 있을 거다. 그 중 하나는 현재 오염된 세계수로 싹을 틔웠고, 하나는 지금 네 심장에 있지. 나머지 하나는 어디 있는지 몰라도 네가 속삭임을 들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3개로 나뉘었던 씨앗이 다시 1개로 합쳐지기를 원하는 거야. 이미 성장한 세계수가 힘의 부족함을 느끼고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서."

칼카타는 무언가를 합치는 시늉을 하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 속삭임은 저 나무가 발신하는 것일 터다. 어쩌면 네가 남산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그 영향일 수도 있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어. 그리고 힘을 쓰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네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쓰지 말라는 거지. 그냥 한마디로 무리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나 혼자 무리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지수, 예린, 한세아가 내 옆을 지켜 주고 있지 않던가. 그녀들이 걱정할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다행이었다. 이 정도면 그녀들에게 말해 줘도 괜찮을 듯했다.

내가 그런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칼카타의 말이 이어졌다.

"네 한계는 네가 잘 알고 있을 것이고, 힘을 쏟아 내는 출력은 남산에 있는 증폭기와 연결되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너는 아직 힘을 다루는 법을 잘 깨우치지 못한 상태거든. 내가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니,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도와주겠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칼카타는 뒷말을 바꿨다. 그는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감사합니다. 아, 칼카타. 도움하니까 생각난 건데 저희가 정확히 뭘 도우면 되는 겁니까."

"내 아내가 임신한 상태인 건 너도 봤으니 알겠지. 곧 출산 예정이라서 그 부분을 도와 줬으면 한다."

"예? 아니, 몇 개월 차 이신데요?"

"이제 한 4개월쯤 되었지만, 내 종족은 기본적으로 출산이 빠른 편이라 슬슬 준비해야 한다. 애초에 임신이 되지 않았다면 모르겠으나, 이미 아이가 생긴 이상 할 수 있는 준비를 최대한 해 놓아야 마음이 놓이니까."

보통 인간의 임신 기간은 대략 10개월 정도. 허나 칼카타는 그의 절반도 되지 않는 기간인 4개월째에 출산이 임박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임신이 되었다는 건 유전적으로 맞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텐데, 임신 기간이 그렇게 차이가 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쩐지 아내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니 그런 이유였다. 우리도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도와주는게 맞았다.

그동안 칼카타에게 적지 않은 정보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저희 중에는 출산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는데."

이게 문제였다. 출산 경험은커녕 어떻게 도우면 되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것도 도와주면 좋겠지만, 일단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그 부분이 아니다. 아이를 낳는데 도움이 되는 물건이 필요해. 지도를 보니 근처에 여성 병원이 있더군. 내가 예상한 건물이 맞다면 그 건물은 아직 멀쩡할 거야.

거기서 산후 조리에 필요한 물건들을 모조리 가져오고 싶다. 하지만 나 혼자 가기에는 마음이 걸려. 괴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서 아내를 혼자 오래 두는 것도 신경 쓰이고. 그러니 너와 내가 같이 다녀오면 좋겠다. 그래줄 수 있나?

"

"그 정도야 뭐, 쉽죠. 제가 일행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이것저것 가져올 게 많겠네요."

"고맙다. 아이를 낳은 다음에 이 안개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보지. 그동안 아내가 임신해서 이동할 수 없었지만, 출산 후에는 어느 정도 방도가 생길 테니. 이미 안개를 생산하는 진원지를 거의 특정해 가는 중이기도 하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역시 칼카타가 안개 구역에서 머무는 가장 큰 이유는 임신한 최미소였다. 심지어 곧 출산이 임박한 시기라고 하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솔직히 안개에만 닿지 않는다면, 여기만큼 안전한 곳도 없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현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만."

"······?"

내가 말해보라는 듯 눈썹을 들어올리자,

"네 여자들 다 감당할 수 있나? 내가 점괘를 간단하게 봤었는데, 너도 곧일 것 같아."

칼카타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왠지는 몰라도 그는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측은함은 덤이었다.

그 시선의 의미는 뭐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되물어보려던 그때.

"현우씨! 칼카타! 어디 갔지?"

방문 너머에서 우리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창고에서 돌아온 한세아가 최미소, 지수, 예린을 이끌고 돌아온 모양이다.

"어······ 급한 질문 아니면 일단 나가죠. 기다리게 하면 예린이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아요."

내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칼카타와 함께 나는 몸을 돌렸다.

달칵-

방문을 열고 나가니 거실에는 생각보다 많은 양의 식량이 준비된 것이 보인다. 시선을 가장 끄는 것은 중앙에 놓인 가스 버너. 그 옆에 놓여 있는 작은 유리병 하나였다.

"오빠! 빨리 여기 앉아요!"

앉은 채로 몸을 들썩거리는 예린의 재촉에 나는 발걸음을 좀 더 서둘렀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바로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둘이서 뭔 이야기를 했길래 그 방에서 나와? 무슨 방인데?"

나와 칼카타가 자리에 앉자 지수가 곧장 물었다. 그녀는 피곤한지 눈가에 퀭한 느낌이 돌고 있었다.

"별 이야기는 아니었어. 그냥 저번에 칼카타가 도와달라고 했던 이야기야. 그건 나중에 말해 줄게. 그나저나 이 병은 뭐야?"

나는 대강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렸다. 내가 가리킨 것은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수상쩍은 액체였다. 처음에는 소스가 든 병인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닌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 그거요? 저희도 묻고 싶었는데, 미소씨가 밥 다 먹고 나서 말해 준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일단 밥부터 먹어요. 예린이도 많이 배고픈 눈치고."

"배고파요···! 밥! 밥···!"

"알았다, 알았어."

그리 급한 질문은 아니었기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 안 식량을 나눠 받았다. 그러면서 자꾸만 재촉하는 예린의 귀를 만져 진정시켜 주었다.

그렇게 평소보다 푸짐한 식량에 속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후, 우리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 식사를 먹기 시작했다.

***

저녁 식사가 모두를 만족시켰을 때.

"그래서 이 병에 담긴 거 뭡니까?"

나는 폭식해서 배가 툭 튀어나온 예린이 바닥을 뒹굴거리는 걸 잠시 보다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아, 그거···. 그거 제 남편 피예요."

부른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던 최미소가 계속된 질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멋쩍음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그녀의 말을 인식한 것과 동시에 거실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고, 예린의 뒹굴거림도 멈췄다.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것처럼 꼬리가 섰던 까닭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