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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273화 (274/497)

Chapter 273 - 273. 상태 (4)

"···뭐라고요?"

지수가 멍한 얼굴로 조용히 되물었다. 그러면서 시선은 여전히 거실 한복판에 있는 유리병을 향했다. 석류맛 홍초를 진하게 탄 것 같은 액체가 담긴 병이 보인다.

어차피 저 안에 든 내용물을 먹거나 한 건 아니기에 속을 게워내거나 울렁거리는 건 아니었지만, 저것이 피라는 걸 인식하고 나니 괜스레 찜찜한 기분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느낌만 그럴 뿐이었다. 바깥으로 나온 피가 주는 특유의 느낌이 있지 않은 까닭이다.

우리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지수가 그러했다. 그녀는 코를 킁킁 거리면서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지금도 지수가 피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건만. 우리는 오죽하겠는가.

"병에 담긴 건 내 피다. 괴물들을 꼬이게 하는 냄새가 나지 않게 특수 처리된 피지. 너희들이 푸른 입자라고 부르는 힘은 내 종족 특성상 피에 함유되어 있거든. 조각이 없으니 조각을 대용할 물건을 만들어 낸 것뿐이다. 차가운 음식이 임산부에게 해가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으니까."

칼카타는 멋쩍게 웃으면서 어금니를 긁었다. 단순히 아내를 위해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우리로서는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불을 피우기 위해서는 푸른 입자가 필수로 변한 세상이었으니까.

단지 조금 걱정되었다.

"오해하지 마십쇼, 칼카타. 막 엄청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한 가지 걱정이 들어서 그런 겁니다. 이 피, 지속 시간이 얼마나 되는 겁니까?"

부서지지만 않는다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푸른 조각에 비해, 아무리 특수 처리했다고 해도 피는 결국 선도가 있는 액체다. 특히 그 안에 힘이 깃들어 있다면 피가 오래 될 수록 그 힘이 약해지는 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피를 계속 갈아줘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짧으면 하루. 길면 사흘. 그 뒤는 그냥 평범한 피로 돌아간다. 그래서 거의 매일 갈아줘야 하는 거나 다름없지."

"아니, 거의 매일이면···. 피가 남아나지 않겠는데요."

"괜찮다. 대전사에게는 아무 문제가 안 돼.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선 뭔들 못하겠나. 어차피 여기 안개 구역만 나가면 내 피를 더 뽑을 일도 없다."

"여보···."

칼카타의 말에 최미소는 걱정스러운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그 말을 우리가 듣는 일은 없었다.

요즘 몸이 좋지 않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던 나도 칼카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은 그의 피 대신 조각을 주로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적어도 조각 안의 푸른 입자는 그가 피를 몸에서 만들어 내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몸에 가해지는 부담이 적을 테니까.

"일단 피는 더 뽑지 마십쇼. 어차피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조각도 충분히 충전을 시켜 놓을 테니 그거 쓰십쇼."

"그래요, 저희가 어디 한 번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는 여기 남아 있을 테니까요. 부담 갖지 마세요."

여전히 유리병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지수와 예린을 제외하고, 나와 한세아가 당부하듯 말했다.

"고마워요."

순간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 최미소.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남편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칼카타의 손수건을 만들어 준 이가 바로 그녀이겠지.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그녀일 것이다.

칼카타가 최미소를 달래는 것을 끝으로, 저녁 식사 후 일어난 작은 헤프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지수와 예린은 아직도 병을 살살 흔들어 액체가 출렁이는 걸 관찰하는 중이었다.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렇게 신기했는지 매우 심취한 모습이었다. 꼬리도 좌우로 살랑거리고 있었다.

내가 가만히 그녀들이 하는 행동을 관찰하고 있을 때.

"그래서 그건 아무튼 그렇다 치고요. 아까 칼카타랑 무슨 이야기한 거예요?"

한세아가 불쑥 내게 물었다.

"아, 그거요? 어···, 여기서 말해도 되나?"

내가 애매한 얼굴로 칼카타를 보면서 말하자, 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인 최미소가 바로 앞에 있긴 했지만, 뭔가 그녀 앞에서 출산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꺼내려니 망설여 졌던 것이다.

"최미소씨가 곧 출산을··· 한다고 하네요. 저희랑은 다르게 10개월이 아니라 4에서 5개월 정도에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요. 그래서 그 출산을 조금 도와달라고 했었어요."

"······그러니까 분만을 도와달라는 말인 거죠? 근데 저희는 없잖아요···? 그, 출산 경험이요."

나랑 같은 말을 하는 한세아. 그녀의 말이 지수와 예린의 귀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유리병에 대한 흥미를 순식간에 잃어 버린 그녀들의 시선이 한세아에게 향했다.

"···뭐, 뭐예요. 왜 저를 보는 거예요."

한세아는 한껏 당황하면서 몸을 주춤주춤 뒤로 물렸다. 갑작스레 집중된 시선에 그녀의 동공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잔뜩 흔들렸다.

"아니···뭐. 그냥 본 거예요. 오해하지 마요, 세아 언니."

"저, 저도 알만 낳아봤지 애는 낳아본 적이 없거든요?"

그녀는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황하는 한세아의 시선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나를 눈에 담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었다.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그 부분도 도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일단 그것보다는 용품을 가져오는 게 우선입니다."

이러다가 눈물을 글썽이는 걸 넘어서 억울함에 그녀가 울 것 같은 느낌이 든 나는 서둘러 개입했다.

확실히 한세아가 새벽마다 알을 낳긴 하지만 그건 아이를 낳는 거랑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지 않은가. 이 이상 그녀를 놀리는 것도 실례였다.

"아, 아! 그러네요! 여기 창고들 간단하게 둘러봤는데 아기 용품 같은 건 별로 없더라구요. 아기 옷이야 대충 큰 옷으로 둘둘 감아서 입힌다고 해도 젖병 같은 물건이 필요하긴 해요. 분유도 있으면 좋구요. 초기에는 초유를 먹인다고 해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한세아는 내 말을 잽싸게 받았다. 화제를 돌릴 수 있는 기회에 안도의 한숨을 쉰 건 덤이었다. 지수와 예린은 건수를 놓쳐서 아쉽다는 표정을 짓다가 물러났다.

그리고 그녀의 말마따나 나중에라도 필요한 물건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미리 구해 놓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지금이 아닌 나중에 필요한 물건이라며 일을 미뤘다가는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르는 일이 아니던가.

"근데 이 주변에 그런 걸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어? 그것보다 거기가 멀쩡한가부터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부분은 내가 설명해주겠다. 여기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현재 우리 위치에서 앞으로 쭉 직진하면 병원이 나온다. 병원은 총 두 군데. 한 곳은 희명 병원이라는 종합병원이고, 나머지 한 곳은 뉴연세라는 이름의 여성 병원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뉴연세 병원 건물 내에 산후조리원이 있을 거야. 그곳에 가면 뭐라도 얻을 수 있겠지."

지수의 물음에 어느새 사라졌던 칼카타가 지도를 가져오며 답했다. 최미소를 데리고 방에 들어가더니 혼자 나온 그.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돌아오는 길인 모양이다.

스으윽-

지도에서 직진 거리로 1km 떨어진 지점을 가리킨 칼카타가 말을 이었다.

"아직 멀쩡한 부분이 남아 있는 병원에는 나와 이현우가 가기로 했다. 한세아, 김지수 너희는 여기에 남아 내 아내를 돌봐줬으면 하는군. 부디 그래줄 수 있겠나?"

"세아 언니는 남더라도 저는 따라가는 게 낫지 않아요? 여기 보니까 나무 인간들도 없는 것 같은데. 있다면 진작에 모습을 드러냈을 거고."

"아니. 괴물들이 아예 없지는 않다. 안개가 잠식하지 않는 높이부터는 드물지만 괴물들이 있어. 그래서 그동안 내가 멀리 가지 못했던 거다."

"그렇다면야···. 알았어요. 그래서 둘이 다녀온다고요?"

"응. 나랑 칼카타랑 가서 빨리 돌아올게. 지수 너는 여기서 몸 회복시키고 있다가 무슨 일 생기면 일행들 지켜줘."

나는 지수의 귀를 조심스럽게 쓸어 주며 말했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지수가 열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걱정이 되었던 까닭이다. 그녀의 쫑긋거리는 귀에 열이 몰린 것이 그런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격하게 움직인 것도 아닌데, 귀가 평소보다 뜨겁다는 건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과 동일한 맥락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지수는 내가 머리를 만지는 움직임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중 가장 크게 흔들리는 건 꼬리였다.

이윽고.

"그럼 이야기도 얼추 마무리 됐으니 이제 가서 자라. 밤이 늦었다. 옆에 있는 집에 들어가서 원하는 곳에서 자면 된다."

우리는 칼카타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주위는 이미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견은 없었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지니 정말로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다.

그렇다고 손전등을 키지는 않았다. 무언가 찾을 것도 아닌데 괜히 귀한 건전지만 낭비하는 셈이지 않은가.

그렇게 칼카타와 최미소가 머무는 곳 옆에 있는 이웃집으로 들어간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똑같은 형태의 가정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전자 도어락은 진작에 부서진 후였다.

"그럼 잘 자라. 내일 아침에 보지. 여기에도 식량 창고가 따로 있으니 뭔가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마음대로 꺼내 먹어도 된다. 어차피 많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쇼, 칼카타."

우리는 원래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그를 배웅하며 문을 닫았다.

"현우씨, 여기 봐요. 창문들 보면 여기저기로 연결된 와이어가 생각보다 많아요. 다 탈출 루트인가 봐요."

"승강기 와이어가 다 어디 갔나 했더니 주변에 있는 걸 전부 쓸어온 모양이네요. 더 자세한 건 내일 아침 해가 뜨면 알아보는 걸로 하고 이제 잡시다. 지수야, 많이 피곤해?"

"······조금. 근데 괜찮아. 한숨 자면 나아지겠지. 나 오늘은 아저씨 옆에서 잘래. 어차피 다 같이 한 방에서 자겠지만 그래도 더 옆이 좋아."

"그래 그럼."

방이 여러 군데 있다 하더라도 잠은 다 같이 모여서 자기 때문에 지수의 부탁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안방으로 추정되는 가장 큰 방에 들어가 그 안에 있는 커다란 침대 매트리스 위에 나란히 누운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외부의 소리는 일절 들리지 않고, 들리는 건 오직 우리의 숨소리뿐인 방 안에서,

부스럭-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하나, 둘씩 잠잠해졌다. 잠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다들 피곤했는지 자기 전에 으레 나누던 인사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그저 그렇게 우리는 곁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취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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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준비 중인 SD 단체 일러스트 러프! 여긴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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