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4 - 274. 상태 (5)
"끄응······."
뭔가 묘하게 몸이 무겁다. 정확히는 배 쪽이 무거웠다.
눈을 자극하는 약한 빛에 잠이 서서히 달아났고, 내가 숨 쉬는 것이 좀 더 명확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요즘 아침마다 몸이 무겁다는 생각을 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내 상체를 점거한 예린이 보였다. 아이는 내 배 위에 웅크려 자는 중이었다. 어쩐지 이상하게 무겁더라니.
"······."
일단 아이를 내버려 둔 채, 멍한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한세아는 이미 준비하고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저기 움푹하게 솟아 있는 이불 뭉치가 지수일 것이다.
지평선에서 해가 천천히 상승하는 상황.
"···예린아, 일어나. 아침 먹으러 가자."
나는 아이의 등을 살며시 두드려 주며 깨웠다. 조금 더 재우고 싶긴 하지만 오늘 할 일이 많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아치임···!"
누가 먹성 좋은 아이 아니랄까 봐 아침 먹자는 이야기에 곧바로 몸을 일으키는 예린. 비록 아직 비몽사몽한 상태라 몸이 이리저리 비틀거렸으나, 이내 고양이 특유의 기지개 자세를 키는 것으로 정신을 완전히 일깨웠다. 꼬리가 좌우로 살랑거렸다.
"예린아, 여기 공간도 넓은데 왜 내 배 위에서 잔 거야?"
나도 팔다리를 길게 늘려 기지개를 쭉 폈다. 찌뿌둥한 몸이 한결 나아진 느낌이다.
"세아 언니가 자꾸 욕심부리려고 해서요."
"···뭔 소리야?"
"그냥 그렇다구요. 언니는 제가 깨울게요!"
영문 모를 소리를 한 예린은 내 상체에 얼굴을 잠시 비비더니 지수를 깨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이제 일어나서······어?"
이불 뭉치를 들춰 지수를 찾아낸 예린은 언니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얼굴을 심각하게 만들었다. 남아 있는 잠 기운이 모조리 날아간 표정이었다.
"···오빠."
"응?"
"언니 열 나요."
"···뭐?"
나는 예린의 말에 황급히 몸을 일으켜 지수에게 다가갔다. 겉으로 드러난 지수의 이마에 손을 대니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단순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지수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제 가뜩이나 몸이 안 좋아 보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열이 날 줄을 몰랐다. 그녀는 뺨에 차가운 내 손이 닿자 무의식적으로 달라붙었다. 낑낑거리는 건 덤이었다.
"예린아, 우리 해열제가 남아 있던가?"
나는 지수의 자세를 바로잡아주며 물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지 그녀는 그저 내가 다루는 대로 움직여졌다.
"해열제는 이제 없어요. 대신 알약 진통제는 좀 있어요."
"그건 해열 효과가 없을 텐데···."
연질 캡슐이긴 해도 형태가 물약이 아닌 알약이라 지금 지수의 상태에서 주기도 좀 그렇다. 잘못해서 목에 걸리면 그게 더 큰 일이지 않은가. 하다못해 눈이라도 뜨면 좋으련만.
바로 그때.
벌컥-
방문이 열리면서 한세아가 들어왔다. 그녀에게서는 옅은 기름 냄새가 났다.
"응? 다들 일어나 있었네요? 어서 나와요. 아침 준비 다 됐어요. 오늘 아침이 뭔지 가서 보면 깜짝 놀랄 걸요?"
"세아 언니! 우리 언니 아파요···."
예린이 울상을 지었다. 아이의 꼬리가 축 늘어졌다.
"지수씨가? 세상에, 몸이 그냥 불덩이네···!"
잔뜩 기대하는 반응을 기다렸던 한세아는 원하던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고개를 갸웃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지수에게 손을 가져다 대었고, 이내 나와 예린처럼 화들짝 놀라는 반응을 보여 주었다.
가장 먼저 일어났던 한세아도 지수의 몸 상태가 이런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일어나 보니 이런 상태였습니다."
"음···. 현우씨, 예린이랑 여기 계세요. 제가 칼카타한테 약이 있나 물어보고 올게요. 일단 수건에 물 적셔서 얼굴 좀 닦아주고 있어요. 그냥 올려만 둬도 좋구요."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한세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 바깥으로 나갔다. 작은 천 하나만 남겨둔 채로.
***
"성인식을 거치는 것 같다."
약 대신 본인 스스로가 온 칼카타가 지수를 보며 한 말이었다. 그는 열이 가라앉지 않는 그녀의 상태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는 듯했다.
"성인식이요?"
"그래, 수인들이 성인이 되는 과정이지. 확실하진 않아도 그나마 이게 정답에 가까울 거다. 김지수의 나이가 어떻게 되지?"
지수의 나이는 분명 21살이라고 했다. 편의점에서 그렇게 말했으니 틀리진 않겠지.
"21살입니다. 맞지, 예린아?"
"맞아요! 생일이 지났으니까 언니는 이제 확실한 21살이에요!"
"흠, 조금 늦긴 했지만 성인식의 시기는 저마다의 차이가 있으니···. 그리고 내가 어제 말했던 거 기억하고 있나? 내 고향에 있던 생물들과 이 지구에 있는 생물들이 비슷해도 서로 다르다는 것 말이다."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는 별이 다르니 당연히 달라야 하는 게 정상이다. 다만, 지구가 점점 대수림화가 되어가면서 칼카타의 고향에 있던 생물들과 유사한 것들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분명 외형 정도는 비슷해도 서로 가진 특성이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칼카타가 우리가 본 괴물들에 대해 자세한 설명해주지 못한 까닭이 바로 그런 이유였고, 안개를 만들어내는 원인을 바로 특정해내지 못한 까닭이 그런 이유였다.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변종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으니까.
이미 서로 다른 생태를 구축한 것이다.
아무리 환경이 유사해졌다고는 한들, 완전히 동일하지 않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구인들이 변한 수인은 내 고향의 수인들과 비슷한 점이 많다. 허나 다른 부분은 확실히 다르지."
칼카타의 설명에 나, 예린, 한세아는 귀를 기울였다.
"첫 번째로 너희 지구의 수인들은 초콜렛이라고 부르는 것을 먹어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점. 두 번째는 달만 보면 울부짖는 본능이 없다던가 하는 그런 부분들 말이다."
그는 아침 식사로 나온 계란 프라이를 먹고 나서 후식으로 초코바 하나를 우물거리는 예린을 바라보았다.
칼카타의 시선을 따라 우리가 예린을 바라보니, 아이는 음미하고 있던 초코바를 목구멍으로 꿀꺽 넘겼다. 그러고서 헤헤 웃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지수와 예린이 초코바를 먹는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되긴 했다. 그도 그럴게, 각각 강아지와 고양이가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 동물들에게 초콜렛에 들어 있는 특정 성분이 치명적으로 유해하게 작용된다는 건 상식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들은 초코바를 양껏 먹어도 아무런 이상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과식을 했냐 하지 않았냐의 따른 차이만 있을 뿐. 그런 점은 본래의 인간과 닮은 점이었다.
"칼카타! 그러니까 우리 언니 막 아픈 건 아니라는 거 맞아요? 맞죠?"
걱정스럽게 언니를 바라보며 묻는 예린. 언니가 아픈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아이는 확답을 원했다.
"그렇···지. 성장을 마친 수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질 거다."
칼카타는 답을 주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뒷말을 빠르게 이어 어색하진 않았으나, 분명 뜸을 들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남자들끼리의 이야기가 되겠군. 따라와라."
"어어? 뭡니까?"
나는 어깨동무를 한 칼카타에게 속절없이 끌려갔다.
그는 예린과 한세아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손짓으로 그녀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현우. 너 저 여자를 사랑하나? 이것만 말해라. 다른 미사여구는 필요 없어."
칼카타가 매우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지금까지 내가 본 표정 중에서 제일 진중한 표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갑자기?"
"다른 말은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남자답게 말해 봐라. 비밀로 해 줄 테니."
"아니, 뭔···. 그, 좋아하기는 하···죠?"
"···예상은 했지만, 남자답지 못한 대답이군. 그래도 일단 그 정도 대답이면 충분하다.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야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지. 네가 아니었다면 저 여자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을 테니까. 뭐, 누굴 좋아하거나 그런 게 아니면 애초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어찌 되었든 잘된 일이다."
진중한 표정에서 킬킬거리는 표정으로 순식간에 바꾼 칼카타. 그는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다시 지수가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번에도 나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가 움직이는 대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칼카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까닭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까도 말했지만 수인인 이상 자연스럽게 겪는 일이고, 몸에 이상이 생기지도 않을 거다. 지금 몸에 열이 나는 건 단순 성장통 때문이야. 괜히 옆에서 북적북적 거릴 필요도 없어. 마찬가지로 억지로 약을 먹일 필요도 없다. 그런 건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아. 이런 건 특효약이 따로 있거든."
"우리 언니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예린은 조금 전에 확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차 물었다. 많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렇다, 예린. 네 언니는 잘 이겨 낼 거다. 그러니 걱정 말고 초코바나 하나 더 먹어라."
예린은 칼카타가 주머니에서 꺼낸 초코바를 냉큼 받았다. 오늘 오전치는 다 먹었는지 새로 얻은 초코바를 바로 먹지 않고 품에 넣어 숨기는 아이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후우, 예린아. 지수씨 옆에서 돌봐주고 있어. 그래도 한 명은 곁을 지켜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우선 지수를 혼자 편하게 쉬게 해야 한다는 칼카타의 말에 한세아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네!"
"현우씨도 이제 나와요. 오늘 할 일 많다구요. 방 하나 전체를 소독해야 하지, 현우씨랑 칼카타는 밖으로 나가서 병원도 가야 하지, 등등 아무튼 바빠요."
그렇긴 하다. 분만이 이루어지는 방을 따로 만들어서 준비하는 과정이 만만치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해야만 했다. 소독을 최대한 하는 것이 산모와 아기를 위한 길이니 말이다.
의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과정이 조금 힘들긴 할 테지만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이윽고.
"지수 잘 돌보고 있어, 예린아."
"걱정 하지마요, 오빠! 언니는 제가 잘 돌볼게요!"
나, 한세아, 칼카타는 방 안에 예린을 남겨둔 채로 최미소가 있는 집으로 향했다. 이웃집인 덕분에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저 방에서 방으로 이동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집에는 최미소가 외부 탐색을 위한 사전 준비를 한창 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지수의 상태를 확인하는 사이에 물건을 베란다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어어? 아니, 힘든데 뭐 하고 계세요! 그냥 쉬고 계시지!"
깜짝 놀란 한세아가 단숨에 달려가 최미소를 부축하며 타박했다. 말이 타박이지 순수한 걱정이었다.
"가만히 있는 것도 미안하고,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그러다가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요!"
"나도 걱정된다, 미소. 나머지는 우리가 할 테니 앉아서 쉬고 있어라. 아니면 모든 준비가 끝날 때까지 방에 들어가서 누워 있어도 좋고."
칼카타가 최미소의 뿔에 걸려 있던 수건을 치우며 말했다. 그의 눈은 하룻밤 사이에 좀 더 부푼 최미소의 배를 걱정스레 보고 있었다.
최미소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걸 보니 출산이 임박해가고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고, 무언가를 참는 듯 미간을 찌푸린 그녀는 누구라도 걱정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와중에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당신 나가는 모습만 보고 쉴게요. 그건 괜찮죠?"
자기 머리에 있는 뿔을 칼카타의 커다란 어금니에 비비적거리는 최미소. 그런 그녀의 모습에 칼카타는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저기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인데. 미소씨, 그 뿔은 무슨 뿔인가요?"
상황에 맞지 않은 물음이긴 했으나, 이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었다. 사람에게 난 동물 귀도 신기한 편이긴 하지만 솔직히 하얀 뿔이 더 신기하지 않은가.
국내에 있는 뿔 달린 동물이라고 해 봐야 흔하지도 않은 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 뿔이요? 아마 송아지 뿔일 거예요. 예전에 본가에 오랜만에 갔다가 기념으로 받아온 건데, 사태 터지고 정신 차려 보니까 저한테 달려 있더라고요. 뿔 때문에 옆으로 눕지도 못 해요. 그게 좀 불편하네요. 그래도 완전히 싫지만은 않아요. 제 남편하고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서요."
최미소는 자기 뿔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불만을 토해냈다가 칼카타에게 머리를 기댔다. 작게 솟은 그녀의 뿔이 칼카타를 찔렀다.
'···생물이 아니라 그 부산물과도 결합할 수 있는 거였나?'
지금까지는 살아 있는 생물로만 결합이 가능한 줄 알았건만.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신토불이가 아닐까요?"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제발 좀 들어가서 쉬어라."
칼카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와 동시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애써 농담을 하는 최미소를 방 안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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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부탁 (4)에 들어간 삽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