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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275화 (276/497)

Chapter 275 - 275. 상태 (6)

"준비는 얼추 아내가 해 놓았으니 우리는 가방만 좀 더 챙기면 될 것 같군."

최미소를 침대에 눕히고 돌아온 칼카타가 베란다 앞에 쌓인 물품들을 보며 말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물건 하나하나를 세어 보더니, 이내 어느 창고로 가서 커다란 캐리어 하나를 끌고 돌아왔다.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제법 큰 캐리어였다.

"그거 하나만 가져가도 어지간한 건 다 털어오겠는데요?"

"쓰든 쓰지 않든 가져올 수 있는 물건이라면 전부 가져와야 하니까. 가방이 다 차더라도 여분의 줄도 따로 가져가니 공간이 모자랄 일은 없을 거다. 여러 번 왔다 갔다 할 시간이 없으니 한 번에 끝내야 하고 말이다."

그의 말처럼 시간이 여유롭지가 않았다. 최미소도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진통이 서서히 오기 시작한 모양이고.

이런 상황에서 느긋하게 물품을 조금씩 가져올 수는 없지 않은가. 헛걸음하지 않게 한 번에 최대한 많이 긁어 와야만 했다.

"여기서 직진 거리로 1km라고 했었죠? 길이 복잡하진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나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칼카타가 들고 있는 지도를 흘깃 바라보았다.

지도에는 안개의 추정 반경, 추정 진원지, 이제 나와 칼카타가 이동해야 할 경로 따위의 정보들이 빨간 펜으로 선이 그어져 있거나 검은 펜으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래, 그러니 오늘 안에 충분히 돌아올 수 있을 거다. 마지막으로 잊은 건 없는지 점검한 후 바로 출발하자."

"네, 잠시만요."

내가 어제 쓰고 구석에 내버려 두었던 방독면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과 동시에.

"현우씨, 이거 찾으시는 거죠? 방독면! 어제 썼던 건 그냥 버렸어요. 정화통에 낀 가루가 도무지 빠지질 않아서요. 혹시 몰라서 여분의 정화통도 넣어 놨으니까 느낌 이상하면 괜히 아끼지 말고 새 걸로 갈아 끼워요."

창고로 사라졌던 한세아가 불쑥 몸을 내밀며 작은 가방을 여러 개 내밀었다. 그녀는 가방 두 개를 제외하고 나머지 가방들을 캐리어에 넣으며 신신당부하는 말을 전했다.

"아, 감사합니다. 세아씨. 혹시 그 분만실 만드는데 필요한 물건 있으면 말하십쇼. 그 근처에서 최대한 구해서 오겠습니다."

"웬만한 건 여기 창고에 다 있어요. 근데 그게 모자라요. 소독약. 세정제 같은 거요. 지금 방 안에 있는 가구를 침대 하나만 남기고 다 빼고 있는 중인데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가 생각보다 많더라구요. 그거 다 지우려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약이 모자랄 것 같아요."

한세아는 나와 칼카타가 여성 병원으로 가서 물품을 탐색하는 동안에, 인공적인 멸균실을 만들기로 했다. 안전한 분만을 위해서는 청결한 위생 관리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니까.

말만 거창하게 멸균실이지, 사실상 방 전체를 소독한 후 그 위에 비닐을 전부 덮어두기만 하는 방이었다. 허나,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의학적 지식이 있는 전문가도 아닌 우리가 가진 상식 선에서 행동할 수 있는 최선. 괜히 여기서 무언가를 더 한다고 하면 상황이 꼬일 것만 같았다.

"세정제나 세척제···. 알겠습니다. 세아씨가 수고 좀 해주십쇼. 또 있습니까?"

나는 미안함을 담아 한세아를 바라보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수가 한세아를 도와야 하는데, 지수는 몸이 좋지 않아 자는 중이다. 그나마 남은 예린이는 지수를 간호해야 하니 결국 일할 사람은 한세아 혼자 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부담을 잔뜩 지게 하는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아! 젖병도 있으면 좋아요! 분유도요!"

내 시선에 담긴 감정을 느낀 한세아는 자긴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면서 안개에 닿지 않아 푸른 입자를 쓸 수 있어서 체력도 남아돈다는 말을 덧붙였다.

"젖병이랑 분유도 가져 와야 하고···. ···응? 칼카타, 저건 뭡니까? 어제 못 봤던 건데."

한세아가 추가로 요구한 품목을 머릿속에 입력한 나는 하얀 천이 둘러진 막대기 같은 것을 발견했다. 기다란 막대기 형태의 그것은 벽면에 기대 세워져 있었다.

"······내 미련. 아직은 저걸 쓸 때가 아니야.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보여 줄 테니 지금은 이만 가지. 갈 길이 바쁘다."

잠시 그 막대기를 바라보던 칼카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저 물건이 무엇인지 답을 주고 싶지 않아 하는 태도였다.

갈 길이 바쁜 것이 사실이고, 마침 준비도 다 끝난 상황이기도 하니 여기서 더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어련히 말해주겠지 싶은 마음에 나는 알았다며 몸을 돌렸다.

이윽고.

덜컹-

방독면까지 제대로 착용한 나와 칼카타는 승강기에 올랐다. 어제보단 인원 수가 적은 덕분에 벽면에 고정된 승강기는 덜 흔들렸다.

"현우씨, 조심해서 갔다 와요. 어디 다치지 말고요. 칼카타도 마찬가지예요. 이제 곧 애 아빠가 되실 텐데 미소씨 우는 얼굴 보지 않으려면 몸조심해야죠."

"걱정 하지 마십쇼, 세아씨. 후욱- 무사히 돌아올 테니."

"대전사는 다치지 않는다."

"에휴, 그놈의 대전사는···. 어서 가요."

못 말린다는 듯 킥킥 웃는 한세아. 그녀의 배웅을 끝으로 우리는 도르래의 고정 장치를 풀었다.

끼기기긱-

천천히 손잡이를 역으로 돌리니 승강기는 지상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개가 가득한 구역으로 들어간다는 생각과 다리부터 잠식하는 안개에 몸이 긴장한 듯 벌써부터 이곳저곳에서 뻐근함이 느껴진다.

"···후욱."

방독면이 내는 숨소리가 눈에 띄게 커졌다. 긴장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안개로 위장한 분말이 필터에 달라붙은 탓이었다.

끼기긱-

우리의 몸이 안개에 완전히 잠기자 시야는 하얗게 물들었다. 가뜩이나 방독면에 붙은 작은 렌즈로 좁아진 세상이었건만. 이제는 오직 하얗게 물든 세상만이 보이게 되었다.

해가 떠 있어서 이렇게라도 보이는 것이지, 밤이었다면 보이는 건 오직 어둠뿐이었으리라.

···쿵!

꾸준히 손잡이를 돌리니 어느새 승강기는 지상에 도달해 있었다. 질량감이 담긴 바람이 주변의 하얀 가루를 밀어내면서 빈자리를 만들었지만, 그 자리는 금세 다시 채워졌다.

"가자. 이쪽이다. 큰길로 빠져나가야 한다."

칼카타가 나침반을 꺼내 방향을 확인한 후에 말했다.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 방향을 알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나침반. 이것마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더라면 앞으로 갈 길이 막막했을 터다.

대략적인 방향만 알 수 있으면 그 뒤는 일사천리나 다름없었다. 그저 직진만 하면 되니 말이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경비실을 지나 3차선 도로로 빠져나왔다.

드그그그극-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는 캐리어의 바퀴 소리가 고요한 주변에 퍼지다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지수는 괜찮겠지?'

생각보다 요란한 소리에 문득 지수가 생각났다. 그동안 시끄러운 소리만 들리면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해냈기 때문일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뭔가 허전한 기분이었다.

몸에 열이 잔뜩 오른 채 낑낑거리던 지수. 비록 칼카타가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며 말해주긴 했으나, 여전히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반응이지 않은가.

그리고 칼카타도 중간에 멈칫거리면서 뒤를 돌아보는 걸 보아하니 그 또한 집에 있는 아내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허나, 지금 중요한 것은 지수를 걱정하는 것보다, 최미소를 걱정하는 것보다 우리가 무사히 병원에 갔다가 몸 성히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녀들을 신경 쓰는 것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

지수는 내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고, 최미소도 칼카타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건 당연한 말이었다.

'괜찮을 거야.'

애써 걱정을 그리 일축한 나는 칼카타와 함께 나침반이 알려주는 방향과 지워지기 일보 직전인 도로 중앙선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보이는 건 딱히 없었다.

부식된 차량, 잔뜩 헤진 천 조각,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유리 파편, 이질적으로 도로에 박혀 있는 쇠 파이프 등등.

그저 도로에 길게 늘어진 것들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훅 밀려나는 하얀 분말은 덤이었다.

답답해진 폐부, 코앞만 보이는 시야, 매우 적막한 주변.

쿵- 쿵-

그러나 그것들과 달리 매우 크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리는 걸 느끼며 나는 계속 걸었다.

캐리어는 칼카타가 그냥 어깨에 짊어진 후였다. 주위가 너무 조용한 만큼 바퀴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던 까닭에 취한 조치. 아직 물건이 담겨 있지 않은 터라 가방이 가벼운 덕분에 힘든 건 하나도 없다는 몸짓을 했다.

저벅- 저벅-

안개로 뒤덮인 도시의 도로를 묵묵히 걷고 있는 나와 칼카타.

그런 우리를 멈춰 서게 만든 건 말라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확실하게 살아 있는 넝쿨이었다.

가느다란 넝쿨 한 줄기가 부러진 전봇대를 타고 자라 있었다.

눌어붙은 검은색과 흩날리는 흰색이 가득한 안개의 도시에서 홀로 녹색을 간직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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