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76화 (277/497)

Chapter 276 - 276. 상태 (7)

"···식물은 좋아하는 편인가?"

침묵 끝에 꺼내진 칼카타의 첫 말이었다. 그는 홀로 녹색을 발하는 넝쿨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근래 들어서는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과거에는 식물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플러스적인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옳았다. 그도 그럴게, 식물이 있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허나, 요즘은 식물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지긋지긋하다는 감정이 먼저 든다.

그동안 살면서 겪고, 봐 왔던 것이 있는 까닭이었다.

피부 겉면에 나무 껍질이 돋은 괴물, 금속을 부식시키는 넝쿨의 체액, 둥지로 끌고 가 먹이 주머니로 만드는 줄기, 시체를 녹여 먹는 넝쿨 봉오리.

심지어 넝쿨 변종인 봉오리는 인간을 잡아 먹으면서 생긴 것인지 약간의 지성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어딜 가나 넝쿨이 보인다. 허리까지 자란 억센 수풀은 덤이었다.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분명 성장을 억제하는 안개 속에서 자란 넝쿨이 대단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모든 것이 정적인 사물들 사이에서 홀로 생을 이어 나가는 건 생명의 끈질김을 보여주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기억들을 떠올리면 눈앞의 넝쿨이 도무지 좋게 여겨지지가 않는 게 현실이다. 그저 한없이 끔찍하기만 했다.

"그런가. 지긋지긋하다는 건 나도 동감이다. 그러나 눈에 계속 밟히는 건 어쩔 수 없지."

칼카타는 당연한 걸 물었다며 중얼거리다가 손가락으로 넝쿨을 툭툭 건드렸다. 줄기의 밑동에는 소량의 흙이 넝쿨을 감싸고 있었다.

부스스···

넝쿨의 볼품없는 잎사귀에 올라가 있던 하얀 분말이 세로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이내 바닥에 도달한 그것은 눈처럼 조금씩 쌓였다.

넝쿨이 가진 본래의 색이 좀 더 강하게 드러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포도의 과분처럼 다시금 흰색 가루로 분칠이 되었지만.

"조금의 흙이라도 있다면 식물은 존재한다. 죽지 않았다면 식물은 다시 살아난다. 참 지독하지 않나. 이런 상황에서도 자라난다는 것이. 생명이란···."

"그건-."

나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라며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절그럭-

내 발에 밟히는 것이 있었다. 잔뜩 부식되어 검은 녹이 덕지덕지 붙은 총기. 그것도 어지럽게 널브러진 작은 뼛조각 사이에 파묻혀 있었던 총기였다.

죽은 군인이 품고 죽은 총기였고, 패배한 인간이 남긴 흔적이었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만든 죽음이 낳은 산물이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나와 칼카타가 있는 주변에 셀 수도 없이 널려 있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수만 그 정도인데.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에는 얼마나 많겠는가.

현재 살아남은 인간들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모르는 상황 속에서 식물이 강인한 것처럼 인간도 강인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하얗게 분칠된 도시, 검게 탄 차량과 전차, 붕괴된 건물, 흉하게 드러난 철골, 갈라지고 융기된 아스팔트 도로.

인간이 지키지 못하고, 이겨 내지 못한 풍경 속에서 그런 말을 꺼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작은 렌즈로 보이는 망가진 세상.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억지로 그런 말을 해 보았자 스스로에게 위안조차 되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칼카타,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저번에 말했던 타워 이야기의 연장선인데, 이건 말 안했던 거 같아서요."

결국, 나는 원래 내뱉으려던 말을 속으로 삼키고, 그에게 답을 주는 대신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방독면 탓인지 속이 답답했다.

기분 같아서는 조용히 가고 싶지만,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개에 잡아 먹힐 것만 같았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편하게 말해 봐라. 이야기는 가면서 듣지."

칼카타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그러면서 나와 칼카타는 넝쿨에서 시선을 뗀 후, 다시 꾸준히 다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움직여도 여전히 변함이 없는 풍경. 그래도 목적지와 거리만큼은 가까워지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타워에 숨어 있을 때, 갑자기 거미 변종에게 위치를 들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변종의 등에는 푸른 조각이 달린 팔찌가 있는 시체가 접목되어 있었고요. 그 당시에는 냄새로 들킨 건가 싶었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요. 꼭 푸른 조각이 저희에게 이끌리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 제대로 숨었었다고 생각했었건만. 복도 끝 우리가 숨어 있는 방을 헷갈리지도 않고 곧장 찾아왔던 거미 변종이 여간 당황스러웠던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어찌어찌 거미 변종을 처리하고 무사히 건물에서도 도망칠 수 있었으나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놀랐다는 이야기였다.

"흠, 그게 맞을 거다. 굳이 조각이 아니더라도 너희들이 푸른 입자라고 부르는 힘은 서로 이끌리는 성질이 있거든. 그 덕분에 푸른 입자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이끌리는 경향도 있지.

약간 본능적인 이끌림이라고 해야 할까. 나쁜 의미는 아니다. 그 영향이 엄청 강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서로가 서로를 보는 첫인상을 살짝 긍정적으로 만들어 줄 뿐이니까. 아, 너는 어머니의 조각을 품고 있으니 조금 다를 수도 있겠군. 그래도 별 차이는 없을 거다.

"

칼카타는 세뇌 수준은 절대로 되지 못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킬킬거리는 웃음은 덤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해 본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짐작이 뭔지는 몰라도 틀렸다. 서로 이끌린다는 말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 모텔에서 지수, 예린과 조우하고 나서 편의점에 갔을 때였다.

고작 하룻밤을 같이 보냈을 뿐인데, 서로가 서로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는 무의식적인 직감이 들었었던 때이기도 했다.

첫 만남이 좋지 않았던 만큼 내가 그녀들을 좀 더 오래 경계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지수, 예린은 이미 친분을 나눈 것 같은 느낌에 애초부터 일행이었다는 듯 경계심이 빠르게 무너졌었다.

뭔가 애매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푸른 입자가 관계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나를 지속해서 경계한 지수에게 머리가 몇 번이나 깨졌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바로 그때.

휘이익!

잘 가고 있던 칼카타가 돌 조각을 주워 뜬금없이 옆으로 던졌다.

"······?"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따악···!

칼카타가 던진 돌멩이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자신과 동일한 돌멩이와 부딪치는 소리였다.

"역시 물이 다 말랐군."

"물이요?"

"그래, 지금 우리는 안양천 위를 지나가고 있다. 안개가 사라지면 이동 수단을 뭘로 할지 정하려고 확인해 본 거다. 천에 물이 가득 있다면 배를 타고 한강까지 쭉 올라가면 되니까. 그러는 편이 소음이 적게 일어나서 제일 좋은 방법이지 않은가? 물론 이제는 물이 다 말라 있으니 더 염두할 필요도 없는 방법이지만. 아쉬워도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겠어."

안개의 진원지를 제거하고 난 후를 미리 가정하는 칼카타. 그의 말마따나 위험한 도로를 걷는 것보다 고무 보트를 타고 단숨에 위로 올라가는 게 좋은 방법이기는 하다.

"여기가 안양천 위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렇기에 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물었다.

"아니. 여기는 안양천 위가 맞아. 사거리를 지나면서 도로의 형태가 변했고, 양측에 존재하던 바닥이 아래로 꺼져 있으니 말이다. 지도상으로 위치도 맞다."

"어휴, 저 밑에는 물이 있긴 있던데. ···아, 근데 거기도 보트가 뜰 정도의 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네요. 한강이 바닥을 드러낸 건 아니겠죠?"

"가보기 전까지는 모르지. 무언가가 길을 막아 둑의 역할을 하는 걸 수도 있고."

우리는 현 상황에 대해 불평불만을 토해내면서 꾸준히 앞으로 걸었다. 생각보다 나와 칼카타는 죽이 잘 맞았다. 비록 주로 칼카타가 나를 놀리고, 나는 쩔쩔매는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일행에 있는 남자가 나 혼자뿐이었던 상황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고 있는 듯했다.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 여기고 있는 것도 그렇게 느끼게 하는데 한몫 차지하고 있겠지.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의 좌우측에는 다시금 건물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서울시 금천구의 영역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여전히 적막한 주변.

여전히 생명체의 반응은 없었다.

"······."

"······."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기에 우리는 무언가를 괜히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갈수록 늘어나는 차량을 피해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시흥 사거리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광명 ↑말미사거리 독산로→ <금하로>

도로에 널브러진 표지판이 보이는 것과 목적지인 뉴연세 여성의원에 도착하는 건 거의 동시였다. 건너편에는 희명 병원이라는 종합 병원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가린 탓은 아니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기도 했으니까. 다시 말해 희명 병원은 폭삭 무너져 잔해로 변해 있었다는 말이었다.

"지도가 맞다면, 이 건물은 산후조리원도 같이 있는 건물일 거다. 희명 병원과 달리 다행히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은 모양이야. 뭐라도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

칼카타는 그나마 여성 의원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구하지 못해서 빈손으로 되돌아가면 너무 허무하지 않겠는가.

무어라 답을 하려던 그때.

휘이이잉-

착!

바람을 타고 날아온 종이가 내 몸을 때렸다.

-키우던 암컷 강아지에게 발정기가 왔을 때는 짧은 산책이나 노즈워크를 하는 것이 좋다!

<금천 24시- K 동물의료센터>

불에 그을려 절반 이상 검게 변한 안내문이었다. 그래도 적힌 내용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근처에 동물 병원이 있는 모양이다.

'뭐야?'

나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바닥에 버리며 칼카타와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안개 때문에 위쪽이 보이질 않으니 건물 상태가 어떨지 모르겠네요. 일단 들어갈까요?"

"그래. 일단 들어가는 게 좋겠다. 여기서 시간 끌릴 여유는 없어."

이윽고, 나와 칼카타는 여성 병원 내부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밀었다.

빠드득···

바닥에 깔린 유리 조각이 신발 밑창에 짓눌리는 소리가 텅 빈 로비를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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