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77화 (278/497)

Chapter 277 - 277. 뉴연세병원 (1)

뉴연세 의원 1층 로비.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안개가 조금은 희석되었고, 덕분에 가시 거리가 좀 더 늘어나게 되었다. 고작 1m의 차이였지만, 무시할 것은 되지 못했다.

외부의 1m와 내부의 1m는 와닿는 거리감 자체가 다르니까. 시야가 늘어나서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하나도 없었다.

"건물이 바로 무너질 것 같지는 않네요."

"그래, 나도 그렇게 보인다. 다행히 급하게 움직이지는 않아도 되겠어."

나와 칼카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기준으로 좌측에는 엘리베이터, 전방에는 안내 데스트와 비상구, 우측에는 산부인과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눈에 들어오는 로비의 풍경은 깨끗했다. 아니, 깨끗했을 것이다. 과거에는 말이다.

산부인과 탬플릿을 올려 두는 목재 선반, 산부인과 의사의 소개가 쓰여 있는 연혁판, 바닥에 떨어진 시계, 무너져 내린 유리문, 금이 쩍쩍 갈라진 석재 바닥.

그중 장식용 식물이 들어 있던 하얀 도자기 같은 화분은 진작에 엎어져 담고 있던 흙을 모조리 토해낸 상태였고, 간이 소파 또한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원형의 시계는 더 이상 초, 분, 시침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건전지의 문제는 아니었다. 시계가 반으로 쪼개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 단순한 사실은 로비가 완전히 난장판이라는 것뿐이었다. 괴물들이 활개를 친 것인지, 폭격의 여파인지는 몰라도.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 로비에서 시선을 떼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은 판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부스스···

그러자 하얀 분말이 밀려나면서 감추고 있던 걸 보여주기 시작했다.

10F: 뉴연세산후조리원 →별관 9F: 뉴연세산부인과 세미나실 8F: 뉴연세산부인과 종합검진실 7F: 뉴연세산부인과 신생아실, 수유실 6F: 뉴연세산부인과 입원실 5F: 뉴연세산부인과 입원실 F: 뉴연세산부인과 분만·수술실 3F: 뉴연세산부인과 분만실(준비 중)

2F: 뉴연세의원 내과·소아과 1F: 뉴연세산부인과 외래진료

-금화빌딩

'INFORMATION'이라는 영어가 큼지막하게 음각된 판에는 각 층별로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옆에는 진료시간을 알려주는 팻말도 붙어 있었지만, 이건 그다지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기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을 듯했다.

"1층은 멀쩡한 게 하나도 없어 보이니까 2층부터 둘러볼까요? 10층까지 찍고 내려오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손짓으로 비상구를 가리키며 칼카타를 불렀다. 1층에 더 볼일은 없으니 올라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한 행동이었다.

10층에 따로 표시된 별관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서 확인하면 그만인 일이고.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칼카타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끝으로, 우리는 비상구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도착한 2층은 그나마 1층보다는 나은 모습이었다. 적어도 대기실의 소파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물론, 벽면에 걸린 액자나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모빌 따위들은 예외 없이 전부 떨어진 상태였지만 말이다.

"칼카타, 혹시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막 의학적 지식이나 그런 건 모르죠? 아니면 약품의 올바른 사용법이라던가."

"모른다."

고개를 좌우로 젓는 칼카타.

나는 예상했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하얀 분말에 파묻혀 있던 세정제 하나를 주웠다.

"그럼 그냥 이런 세정제만 챙기는 게 낫겠네요. 저도 그런 건 하나도 모르거든요."

알약 형태의 약품은 상태가 나을 수도 있으나, 냉장 보관해야 하는 액체 형태의 약품은 병이 멀쩡하다고 해도 쓸 수가 없겠지. 전기가 끊겼으니 약품을 보관하는 냉장고가 가동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약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기 전에 약품의 효과는 이미 사라진 후이지 않겠는가.

효과가 남아 있는지도 모르는 것들을 챙기기보다는 용도를 알 수 있고, 알고 있는 것들만 챙기는 게 나으리라.

용도를 모르는 약품들은 우리에게 약이 아니라 독이었다.

'세정제나 챙겨야겠다.'

다행히 여성 병원이고, 몸이 약한 임산부와 아이들이 주로 오는 층이다 보니 세정제가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비록 바깥에 비치된 세정제들은 대부분 통이 박살 난 상태라 멀쩡한 것들이 별로 없었지만, 우리는 약품 보관 창고에서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세정제들을 추가로 발견할 수 있었다.

밀폐 포장된 것들이라 하얀 분말도 많이 묻지 않은 것들이었다.

"일단 다 챙기자. 공간이 모자라면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된다."

칼카타는 다다익선이라며 포장 비닐조차 벗겨지지 않은 세정제들을 모조리 캐리어 안에 담기 시작했다.

와르르···

대전사답게 정리를 생각하지 않는 행동. 그냥 쏟아 붓는 것이 편하게 넣는 방법이기는 하다. 허나, 앞으로 챙길 것이 많은데 이 방식은 선을 넘었다.

급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는 건 알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아잇, 칼카타. 처음부터 그렇게 넣으면 많이 못 넣는다고요. 그러지 말고 하나씩 건네주십쇼. 정리는 제가 할 테니까."

나는 볼멘소리를 하며 그를 막았다. 결국 차곡차곡 쌓는 건 내 몫이었다.

이윽고.

"이제 3층으로 갑시다."

대강 정리를 끝낸 나는 캐리어를 칼카타에게 내밀었다. 정리는 내가 했으니 짐을 드는 건 그의 몫이었다.

칼카타는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건네받았다.

3층. 분만실.

분만실이라 그런지 이름 모를 장비들,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장비들이 모든 방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장비들은 챙겨 갈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챙겨 가도 의미가 없었다.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데 구태여 챙길 필요가 없지 않은가. 산부인과에 온 것이 처음인 나와 칼카타는 특히 그러했다.

애초에 장비들이 안개에 잠식당해 고장이 난 상태이기도 했다. 뭔가 있어 보인다고 이런걸 챙겨 가는 건 바보나 할 짓이고, 체력만 낭비하는 셈이다.

"어···, 바로 4층으로 올라갈까요? 여긴 뭐 가져갈 수 있는 게 없네요."

"좋다. 바로 4층으로 올라가지."

서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멀뚱멀뚱 장비를 보고 있던 우리는 뜻이 통했다.

4층. 분만실·수술실.

여기도 3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완전히 얻을 것이 없지는 않았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수술용 조명등이 설치된 곳. 수술실에 딸린 작은 창고 같은 곳에서 멸균 처리된 붕대, 일회용 라텍스 장갑 따위의 여러 의료 용품들을 찾아냈던 것이다.

"······."

나는 불이 꺼진 수술대와 각종 수술 도구가 널브러진 풍경이 주는 음산함을 애써 무시하며 라텍스 장갑이 담긴 상자를 캐리어에 담았다.

문득 창문으로 향하는 내 시선.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창문에는 여전히 하얀 가루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나 내 상상력은 창문에 눌어붙은 검은 손을 만들어냈다. 금방이라도 유리를 깨트릴 것 같은 손아귀가 유리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천천히 아래로 내리고 있는 상상이었다.

'···정신 차려.'

안개 속에 꽤 있었던 탓일까. 벌써부터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악몽이었다.

단순히 내 착각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기분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현우. 괜찮나?"

조금 거칠어진 행동에 걱정스럽게 물어 오는 칼카타.

"크흠! 예, 괜찮습니다. 어서 다음 층으로 올라가죠."

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개가 닿지 않는 위로 올라가면 조금 쉬었다가 움직이지. 그게 나을 것 같군."

"푸른 입자는 아직 충분한데···. 뭐, 알겠습니다."

갈 길이 멀었으나, 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수긍하는 몸짓을 보였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5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5층을 탐색하지 않고 그 다음 층인 6층으로 바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깨진 창문에서 무언가가 들어온 듯 크게 폭발한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폭발이 5층 내부를 전부 날려 먹은 모양이다. 나와 칼카타는 물품은커녕 잔해만 겨우 볼 수 있었으니까.

5층이 입원실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로 도착한 6층.

6층도 입원실로 쓰이는 층인 만큼 기다란 복도를 기준으로 양옆으로 문이 달려있는 구조였다.

'여기는 폭탄이 터지진 않았나 보네. 벽에 금이 가있기는 해도 양호한 편이고.'

어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어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어떤 문들은 반쯤 부서져 있기도 했다. 다양한 모양새의 문들, 그런 문들에 길게 남은 무언가의 자국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하게 만들었다.

지독한 침묵이 나와 칼카타 주위에 내려앉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을 누르는 와중에 눈꺼풀만큼은 억지로 뜨게 했다.

"······."

"······."

우리가 첫 번째 호실부터 탐색하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간 그때.

-이제 곧 세상에 태어날 우리 아가. 힘찬이.

벽면에 붙은 코르크 보드판. 그곳에 정성스레 핀으로 고정된 초음파 사진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진에는 손가락을 빨고 있는 듯한 자세를 하는 아기가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여러 장의 사진은 점차 배 안에 자라고 있는 아기가 점점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자한자 꾹꾹 눌러 담은 글씨가 적힌 메모지는 덤이었다.

"······칼카타, 여기에 있던 입원한 사람들. 후우, 대피는 했을까요···?"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물음이었지만, 이렇게라도 입을 열지 않으면 속의 답답함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었는데. 이런 사진을 본 이상 그냥 넘길 수도 없게 되었다.

"···아니. 대부분 대피하지 못했을 거다. 그 누구도 여길 신경 쓰지 못했으니까. 일부는 어찌어찌 도망치긴 했을 테지만, 그들도 결국은···."

칼카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그는 멍하니 사진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사진 속 아기를 곧 태어날 자기 아이와 겹쳐 보고 있는 듯했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방독면이 얼굴을 감싸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단단했던 그의 손이 떨리고 있는 모습은 칼카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짐작케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모르겠다.

덜컹-

나는 티 나지 않게 이를 악물면서 방 한 켠에 마련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내부에는 임신한 여성들에게 좋다던 음식들이 들어 있었다.

사과즙이나 두유, 아몬드 같은 음식들. 그리고 태아에게 좋은 음식들.

'···씨발.'

이미 지나간 과거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먹이 꽉 쥐어졌다.

"칼카타! 사진은 그만 보고 이거 챙겨요. 임산부에게 사과가 좋다고 들었어요.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잘 챙겨야 할 거 아녜요. 이런 즙으로 포장된 팩들은 유통 기한이 생각보다 기니까 먹어도 될 겁니다."

칼카타는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래."

초음파 사진에서 간신히 시선을 떼어낸 칼카타는 숨길 수 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거운, 너무나도 무거운 한숨이었다.

우리는 묵묵히 캐리어 안에 임산부인 최미소를 위한 물품들을 정리하면서 집어넣었다.

나도, 칼카타도 손이 떨리는 게 보인다. 그러나 최미소를 위한다는 생각 아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입원한 사람들, 아마도 분만을 준비 중이었던 사람들이 덧없이 죽은 건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나와 칼카타는 그리 믿고 움직였다.

병실은 여러 군데 있었지만, 첫 호실에서 얻은 첫 소득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소득을 얻을 수가 없었다. 하나 같이 냉장고에 신선 제품들을 보관하고 있었던 탓에 역겨운 냄새과 함께 지독한 곰팡이가 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멀쩡한 제품도 같이 있었으나 포장 겉면에 곰팡이가 옮겨 피어서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곰팡이가 핀 것은 냉장고뿐이 아니었다. 간혹 침대 위에 눕혀져 있는 백골 근처에서도 피어 있었던 것이다. 주변 상황이 많이 무서웠던 듯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형태였다. 속에 품은 것을 보호하는 형태이기도 했다.

그 광경을 잠시 보던 우리는 다음 층으로 향했다. 캐리어가 무거워진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가 발목을 잡은 것인지.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게 된 다리를 애써 한 발자국씩 간신히 떼어놓으면서 어떻게든 움직였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위에 쌓인 하얀 분말 속을 걸었다.

"이제 7층이네요. 여기서 좀━"

본격적으로 안개가 옅어지는 시점인 7층에 도착한 그 순간.

[으아아아앙······]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전방의 신생아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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