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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279화 (280/497)

Chapter 279 - 279. 뉴연세병원 (3)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저 죽은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

"···후회하나? 방금 이것에게 안식을 준 것을."

여태껏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칼카타가 입을 열었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안에 무언가 들어 있는 보자기를 보고 있었다.

"후회요? 네, 합니다. 후회. 하지만 그건 이걸 죽여서가 아니예요.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서 오는 후회죠."

나는 정화통 부근을 툭툭 치며 답했다. 숨 쉬기가 한층 어려워진 까닭이었다. 방독면에 달라붙어 있던 분말은 상당히 떨어졌으나, 답답함은 여전했다.

그래, 후회하지 않을 리가 없다.

어차피 적대할 힘도 없어 보이던 괴물이었다. 죽이지 않고 주변에 놓인 물자만 들고 가져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걸 죽였다.

하지만 내가 후회하는 부분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이런 세상을 만드는데 나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오는 후회다.

보다 정확히는 이런 상황을 막아 내지 못한 것에서 오는 후회다.

보다 더 정확히, 더욱 더 정확히는···.

그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밑도 끝도 없다는 것을 안다. 후회의 끝은 누가 정해주지 않는다. 그 끝은 스스로가 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후회는 짧을수록 좋다는 것 또한 안다. 잔향처럼 남은 후회의 기억은 다음 선택지를 고르는 것에 영향을 미치니까. 끝을 내지 못한 후회는 끝없는 망설임을 만들어 낼 테니까.

그렇게 되면 결국 다음 선택지를 고르는 건 본인이 아니라 타인이 되겠지. 그때가 되어서야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겠다며 몸부림치는 건 늦어도 너무 늦은 상황이다. 남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럴 자격도 없다.

그도 그럴게, 타인에게 본인의 선택지를 맡긴다는 건 무슨 결과가 나오더라도 침묵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지 않은가.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건만.

그러니까 나는.

"칼카타, 도와주세요. 제가 연구소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도록."

후회로 멈춰 서는 것보다 앞으로 나아가는걸 택할 것이다. 후회는 이미 많이 했다. 매 순간이 후회의 연속이던 상황을 겪었던 적도 분명 있었다. 그랬던 나이기에 여기서 멈추면 죽음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걸음을 절대로 멈춰 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걱정하지 마라. 내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널 도와줄 테니. 그건 내 사명이다. 숙명이고, 운명이지. 필연이기도 하다."

-대전사인 내가 널 지키겠노라고.

칼카타는 그리 말했다. 우직한 눈이 나를 바라본다.

"······."

나는 그런 그를 보면서 고마움을 느끼는 한편, 한숨을 작게 내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주변과 우리 꼴을 보면 괴물도 한 수 접을 정도였다.

자살 특공대로 변한 아기가 흩뿌린 살점, 그런 아기들에게 실낱 같은 영양을 공급하고 있던 나무 인간이 흘린 체액. 그런 것들이 질척하게 뒤엉켜 나와 칼카타의 옷에 묻어 있었으니 말이다.

화르르륵!

나는 더 이상 푸른 입자를 아끼지 않았다. 푸른 불을 작게나마 일으켜 7층에 널린 시체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나마 안개 구역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괴물들이 움직이지 않는 시체로 돌아가서 입자의 소모가 적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르르륵-

하얗고 붉은 세상이 푸르게, 푸르게 물들어간다.

괴물을 이루고 있던 모든 것들이 불길에 잡아 먹힌다. 푸른 불은 안개의 하얀 분말보다 더 하얀 잿가루를 만들어냈다.

자연스레 변종의 체액이 사라지면서 주변을 잠식해가던 불길함 또한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안도감이 드는 내 자신이 있었다.

푸른 입자의 잔량을 확인하는 내가,

방금 이 행위로 푸른 입자를 얼마나 썼는지 속으로 가늠하는 내가.

스스로가 가진 힘이 미약할 뿐이라는 걸 다시금 자각시켜 주는 내가 있었다.

타닥- 타닥···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남들이 보기엔 위선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실제로도 위선이었다. 순전히 날 위해서 한 행동이었으니까.

그렇지 않나. 어디 괴물로 변한 이가 이 사람뿐이던가.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모르는 곳에서 죽어 나가고, 괴물로 변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나.

내가 죽인 괴물이 이것뿐인 것도 아니다.

내가 앞으로도 죽일 괴물이 여기서 끝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신의 위안을 위해 이 여성을 푸른 불로 정화했다. 방금의 행동은 내가 할 수 있는 나름의 진혼식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날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 그래, 날 위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분유가 생각보다 많네요. 부피가 좀 있지만, 어찌어찌 다 챙길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불길함과 옅은 안개가 모조리 사라진 7층. 시체가 사라지고 나서야 주변의 모습이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여러 종류의 분유들이 한데 모여 있는 모습. 본래 여기 있는 물자들이 아니었을 텐데. 역시 여기서 아기들을 홀로 돌봤던 것일까.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미개봉 상태의 분유를 주워들었다.

[앱솔루트 명작], [네이쳐스 원], [후디스 산양분유], [임페리얼 분유], [앱솔루트 유기농] ···등등.

무슨 종류가 이렇게 다양하고, 효능이 전부 다른 것인지. 그저 전지분유라고 쉽게 볼 것이 아니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복잡한 성분표를 가만히 보고 있던 칼카타가 한 말이었다. 그는 습관대로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어금니를 긁적거리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방독면에 막혀 그러지 못했다.

"저도 뭐가 뭔지 몰라요. 저흰 그저 유통 기한이 많이 남았나 확인하고, 밀봉이 제대로 된 통들인가만 확인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차차 알아가는 걸로 하고요."

그의 말마따나 우리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는 건 유통기한 표시와 통에 틈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의 여부였다. 특히 조금이나마 뚜껑이 열려 있는 건 과감하게 버려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개봉 상태의 분유는 유통 기한이 언제까지 인가 상관없이 3주의 시간제한이 걸린다는 걸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가 먹을 건데 취급을 확실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스럭-

나와 칼카타는 분유의 탑을 무너트리면서 하나씩 캐리어 안에 담았다. 방독면은 잠시 벗어던진 후였다. 렌즈가 윤곽선을 살짝 둔탁하게 만들어서 작은 글씨를 확인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흠······."

그렇게 드러난 칼카타의 표정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제일 진중한 얼굴이었다. 봐도 모르면서 괜히 미간을 좁히기도 하고, 통을 살살 흔들어 보기도 하는 칼카타.

그는 꼼꼼하게 살핀 분유통을 이내 조심스러운 손길로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세정제는 그냥 쏟아 붓더니.'

일전에 세정제를 집어넣었던 모습과 매우 대비되는 행동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중요도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말이다.

이윽고, 밀봉 상태가 좋은 것들로만 분유를 챙긴 우리는 창틀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소모한 푸른 입자가 충전되기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중간 휴식 시간을 가져야 할 타이밍이기도 했고.

휘이이이···

깨진 창문 너머로 한 줄기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방독면을 벗은 얼굴에 지나가는 바람이 선선하다.

7층 높이로 도시에 들어찬 안개가 주는 모습은 우리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이 더욱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다.

···쿵 ···쿵 ···쿵

나는 조용히 박동하는 심장을 느끼면서 바깥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지평선 끝자락에 존재하는 커다란 윤곽선이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거대한 제 존재를 드러내는 세계수. 안개는 그 근처 밑동까지 닿아 있었다.

안개가 서울 전체를 잠식했다는 말이 아니었다. 단지 내가 있는 높이에서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뿐이지.

실제로 칼카타가 안개 구역은 반원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고 했으니━

"콜록! 콜록!"

"···칼카타?"

"크흠! 왜 그러나?"

재빨리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기침을 하는 입을 막은 칼카타. 그의 얼굴에는 동요가 없었다. 대수로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아니, 갑자기 기침을 하시길래···.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난 대전사다. 대전사는 죽을 때까지 아프지 않아."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예요. 가뜩이나 아프면 제일 큰일 나는 사람이잖아요."

"나도 아직까지는 진지하게 괜찮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말아."

그는 정말로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아직까진?'

칼카타가 한 말이 내심 걸렸다. 안개 구역에 오래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었을까.

"후우. 칼카타, 출발합시다. 입자도 어느 정도 다시 찼고, 체력도 좀 돌아왔어요. 여기만 돌면 금방이예요."

내가 답을 조금 더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도, 칼카타는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이 되었든 안개 구역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건물 전체를 터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갈 수 있을 듯했다.

"알았다."

"방독면 다시 쓰시고. 아, 썼던 건 그냥 버리고 가죠. 다시 쓰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여요."

나와 칼카타는 기존에 사용했던 방독면을 재활용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정화통만 갈아 끼우면 필터 효과는 생기긴 할 터이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벗은 방독면 안쪽에 이미 하얀 분말들이 들어찼으니까. 7층을 푸른 불로 한차례 정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들어온 안개가 묻었던 것이다.

손으로 스윽 닦아보면 미세하게 하얀 가루가 묻어 나왔다.

'게다가 체액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고.'

어차피 한세아가 출발 전에 방독면 여분을 챙겨 준 참이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쓰고 버려도 괜찮으리라. 예비군 훈련장에 있던 방독면들을 쓸어 오기를 잘한 일이었다.

착!

머리띠가 제대로 고정되었는지 확인을 한 후,

저벅- 저벅-

휴식을 마친 나와 칼카타는 다리를 다시 놀려 7층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가 사라진 공간에는 안이 텅 비어 버린 보자기 하나만이 펄럭이며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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