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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282화 (283/497)

Chapter 282 - 282. 기적 (1)

내가 축 늘어져 한세아의 온기를 느끼고 있을 때.

"한세아, 미소는 어떻나?"

칼카타가 최미소의 상태를 걱정스레 물었다. 옷에 묻은 가루를 털어낸 그는 캐리어 위에 쌓인 가루도 마저 털어내고 있었다. 담담한 척하고 있어도 그의 손은 살짝 떨리고 있는 중이었다. 걱정이 잔뜩 들고 있는 모양이다.

"아, 미소씨는 지금 자고 있어요. 방금 막 간신히 잠들었으니까 조용히 해야 해요."

한세아는 나를 풀어 주며 답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입덧은 하지 않으셔서 그나마 다행인데, 많이 힘드신가 봐요. 그렇다고 약을 드릴 수도 없구···. 그리고 지금 오고 있는 게 가진통인지 진통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처음부터 진통이라 생각하고 빨리 움직여야할 것 같아요."

"···그런가. 오늘 하루 아내를 챙겨줘서 고맙다. 나 혼자였다면 역부족이었을 거야."

"에이, 뭘요. 제가 한 거라고는 그냥 땀 좀 닦아주고 옆에서 수발 좀 들어 준 게 전부인 걸요."

한세아는 의사라도 있었다면 한결 나았을 거라며 작게 투덜거렸다.

"세아씨, 분만실은 준비가 얼마나 됐습니까?"

"일단 불필요한 가구는 전부 빈 창고로 옮긴 상태예요. 이제 남은 건 소독 한번 더 하고, 거기에 비닐 덧대고, 미소씨를 침대 위에 눕히는 걸로 마무리! ···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예린이랑 지수는요?"

"음, 예린이는 지금 지수씨 간호하고 있을걸요? 제가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어서 둘을 미처 신경을 못 썼어요. 무슨 일이 있었다면 아이가 왔을 테지만···, 그래도 뭔가 갑자기 미안하네요. 밥이라도 챙겨줬어야 했는데."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환자가 둘이나 있는 셈이니 예린과 한세아가 각자 한 사람씩 분담해서 돌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린이 있는 쪽은 걱정을 조금 덜어도 될 듯했다. 비록 아이가 체구는 작지만, 행동 하나는 야무지니 말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멈출까요? 칼카타랑 현우씨가 씻는 게 우선이니까. 그러고 나서 가져온 물자를 정리를 하든 멈춘 이야기를 다시 하든 하자구요. 게다가 밥도 먹어야 하잖아요."

우리가 씻는 동안 자신은 물자에 묻은 가루를 닦아내겠다는 한세아의 제안에 우리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움직이고, 거의 하루 종일 방독면을 벗지 못했던 터라 찝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복인 상태인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침을 제외하면 입으로 넣은 게 없었다. 먹을 걸 가져가지 않은 까닭은 방독면을 벗을 수가 없을 테니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물론, 중간에 방독면을 벗을 수 있는 상황이 있긴 있었지만, 그래도 의미는 없었겠지. 그도 그럴게, 그때는 도저히 무언가를 먹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으니까. 잠시 휴식을 취했던 당시는 불로 7층을 정화했을 때가 아니던가.

괜히 억지로 뭔가를 먹었더라면 속에 얹히거나 토해내고 말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만큼 나와 칼카타를 둘러싼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그때고.'

집으로 돌아온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이제서야 안도감을 느낀 몸이 공복감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뭐라도 배 속에 집어넣고 싶은 생각이 가득 들었던 것이다.

"제가 화장실에 물 담은 통들 넣어 놨어요. 그걸로 씻어요."

한세아의 말에 부리나케 움직인 나와 칼카타는 화장실로 들어가 몸을 씻기 시작했다. 비록 몸을 부드럽게 풀어 주는 따뜻한 물은 아니었지만, 몸에 끼얹을 물이 충분하다는 것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촤아악-

옷을 뚫고 들어온 하얀 분말들이 어찌나 많던지. 바가지로 퍼 담은 물이 몸을 타고 바닥에 도착할 때면 마치 밀가루를 푼 물처럼 뿌연 물이 나왔다.

우리는 임산부가 집에 있는 만큼 몸을 최대한 구석구석 닦아 가루를 모조리 씻어냈다.

그렇게 몸을 말끔하게 씻은 나와 칼카타가 새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와, 현우씨, 칼카타. 물자 제대로 가져오셨네요."

우리가 가져온 물자들을 확인하고 있던 한세아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반겼다.

"특히 분유랑 미역 가져온 건 진짜 잘했어요. 안 그래도 창고에 없어서 제일 아쉬운 것들이었는데. 분유도 여러 종류로 챙겨 오셨구···. 아무리 비싼 분유라도 아기 몸에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거든요. 미역은 뭐, 말할 것도 없죠. 미역은 거의 필수라고 할 정도로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이니까요."

매우 만족스러운 듯 내 얼굴을 마구잡이로 주물러 칭찬하는 한세아. 그녀는 이내 수북이 쌓인 통조림의 탑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와 칼카타가 먹을 저녁인 모양이다.

"많이 배고프죠? 이거 아직 따뜻할 때 먹어요. 둘이 오기 전에 데워놨던 거예요. 근데 미역은 그렇다 쳐도 분유는 어디서 이렇게 많이 주워 왔어요?"

"···아."

나는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통조림 뚜껑을 따다가 멈칫했다. 묵묵히 캔을 따던 칼카타도 마찬가지였다.

다시금 뚝 떨어진 입맛. 허나, 이번에는 억지로 음식을 입에 넣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면 에너지를 채워야 하니까.

"···변종이 있었습니다. 분유는 변종 옆에 쌓여 있었고요."

오늘 하루 있었던 일 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뇌리에 남은 기억이었기에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산부인과에서 있었던 일은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해야만 했다.

이 또한 하나의 정보였고, 개인적으로 불쾌하다며 말하지 않는 건 정보를 숨기는 거나 다름없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계속 함께 할 동료에게 정보를 숨기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다.

사소한 정보 하나라도 더 공유해야 나뿐만이 아닌 일행의 생존 확률이 올라가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뉴연세 병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 하나 꺼내 이야기해주었다.

생각보다 멀쩡했던 병원, 자살 특공대로 변한 작은 체구의 나무 인간, 보자기를 품고 있던 나무 인간, 머리통을 부숴도 바로 죽지 않고 오체가 분리되어 살아남은 나무 인간 변종의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요약한 내용으로 입 밖으로 꺼냈다.

이윽고.

"···뭐예요. 오늘 제가 한 건 힘든 축에도 못 끼잖아요. 하아···,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그냥 안개를 버티는 게 많이 힘들었나 보다 이런 생각만 겨우 했었는데···."

이야기를 전부 들은 한세아가 한숨을 푹 쉬며 나를 끌어안았다. 내 얼굴이 풍만한 가슴을 뭉갰고, 내 몸은 더 풀어졌다.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예요."

그래, 부상없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였다.

"크흠! 큼. 밥은 잘 먹었다, 한세아. 자리를 비켜 줄 테니 이현우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도록."

칼카타가 헛기침을 토해내며 이목을 끈 것은. 어느새 식사를 마친 그는 애써 걱정을 지워내고 떠올린 장난스러운 기색으로 묘한 손짓을 해 보였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됐다. 이현우 너는 나한테 말 걸지 말고, 네 앞이나 잘 봐라. 나는 들어가서 이만 자야겠다. 아, 한세아. 나는 아내가 있는 방 옆에서 자고 있을 테니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리로 와 주겠나? 아무래도 지금 방에 들어가면 아내를 깨울 것 같아서."

"네. 걱정하지 마세요, 칼카타."

한세아는 어서 들어가서 쉬라는 듯 손을 훠이훠이 휘적거렸다.

달칵-

이내 조용하게 거실을 울리는 문 닫히는 소리. 칼카타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옆방 문을 열어 들어가고, 천천히 문을 닫으면서 생긴 소리였다.

"······아니죠?"

나는 이제는 자리에 없는 칼카타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무것도 아닌 상황인데 괜스레 마른침이 삼켜졌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한세아가 시야를 가득 메운 탓일까.

"뭐가요? 왜요. 제가 현우씨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됐네요! 오늘 하루 힘들게 일한 사람 괴롭히고 싶지 않아요. 현우씨도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저는 미소씨 상태 좀 봐야 하거든요. 수건으로 얼굴도 계속 닦아줘야 해서 바쁘다구요."

"새벽 내내요? 그럴 거면 차라리-."

나와 교대로 하자며 말하려고 했으나, 순간 머리를 스친 어떤 생각에 입이 다물렸다.

"현우씨는 안 돼요. 칼카타도 안 되구요. 지금 미소씨 엄청 예민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거든요. 여자들만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도 있구요. 그러니까 현우씨는 제 걱정 그만하고 가서 자요. 어제 저희 잤던 방 알죠? 거기 이부자리 그대로 있으니 바로 자면 될 거예요."

한세아는 재빠르게 내 볼에 입을 맞춰주고는 등을 툭툭 쳤다. 할 건 다 했으니 가서 쉬라는 신호였다.

나는 어제 그 방으로 돌아가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뒤로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한세아는 킥킥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착한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린이 지수를 다른 방으로 옮긴 모양이다.

둘이 걱정되긴 하지만 찾아서 상태를 확인하기에는 시간이 늦어도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이미 자고 있겠지.'

결국, 지수와 예린의 상태는 내일 확인하는 걸로 하기로 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곤히 자고 있을 그녀들을 깨우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렇게 내일을 기약한 나는 오랜만에 혼자가 된 기분을 느끼며 잠을 청했다.

***

다음날 아침.

목숨을 위협하던 괴물들의 위협도 사라지고,

창고 속에 있는 풍족한 물자가 주는 기쁨도 고통 어린 신음 속에 묻혀 버린,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온 신경이 어느 방 안으로 집중되고 있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

홀로 거실에 남은 나는,

보글보글···

젖병을 소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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