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86화 (287/497)

Chapter 286 - 286. 지수 (3)

정신이 수면 아래에서 부유한다.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정신은 멍하니 있으면서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새벽에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재생되기 시작했다. 화질이 선명하진 않았지만 영상 속 등장 인물들이 나와 지수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게, 당장 내가 지수와 함께 짐승처럼━

···짐승처럼?

"···허억!"

나는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숨을 크게 들이키며 눈을 떴다. 무의식적으로 지수를 찾기 위해 손을 옆으로 더듬었으나, 잡히는 건 오직 허전함뿐이었다.

대신 보이는 건 여럿 있었다.

침대보에 작게 남은 핏자국이라던가, 하얗게 굳은 정사의 흔적이라던가, 어지럽게 널브러진 이불이라던가,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어제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증거에 숨이 턱 막히는 것이 느껴졌다. 더불어 피임을 하지도 않고 싸질렀다는 것까지도 숨이 막히게 하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미친놈아···!'

머리를 부여잡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분명 찰나의 순간 피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말 찰나에 불과했던 탓인지 고민만 했다. 다른 방안을 떠올리지도 않고 그냥 단순히 고민만 했다는 말이었다.

'······지수는 어디 갔지?'

일단 지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한 나는 급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이내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지수는 방에 딸린 창틀에 걸터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기가 졌는지 손에는 초코바를 든 채로.

그 와중에 도끼는 왜 들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당장 해결이 급한 의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녀의 상태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이 급선무이지 않은가.

대충 옷가지를 챙겨 입은 나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이끌고 지수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잘 잤어?"

내 접근을 알아차린 지수가 귀를 쫑긋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살짝 멍했던 지수의 눈은 나를 시야에 담자 눈초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꼬리도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어어, 잘 잤지. 잘 자긴 했는데···."

막상 오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리가 생각을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지수 너는? 몸은 좀 어때? 침대에 더 누워 있지 그랬어. 아직 좀 힘들어 보이는데. 그리고 배가 고프면 아침을 먹지. 단 거 먹으면 입맛 없어지잖아."

"몸? 몸은 이제 괜찮아. 배도 이제 안 고프고···. ···꽉 찼거든."

초코바를 내려놓고 배를 쓰다듬는 지수. 왠지 그 배가 내가 생각하는 배가 아닐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 상의만 두벌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하의를 입지 않아 훤하게 드러난 맨다리에는 항상 허리에 묶고 다니던 벨트 가방이 묶여 있었다. 지수도 나처럼 정신이 없어서 바지를 입는 걸 깜빡한 모양이다.

"그, 그렇구나. 바지는 왜 안 입었어···? 내가 갖다 줄게. 춥겠다."

애써 그리 생각한 내가 바지를 가져다주기 위해 몸을 돌리자,

"아니야, 괜찮아. 어차피 지금 바지 못 입어. 바지를 입으면 배가 좀 아파서··· 으응··· 아직도 아저씨 것이 들어 있는 거 같아서···. 그래서 벨트 가방도 허리에 못 묶었어···. 그럼 막··· 막 눌려."

지수는 곧장 고개를 저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바보같이 서 있는 나를 더욱더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특히 목이 잔뜩 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니 내 얼굴이 절로 달아올랐다. 어제 들었던 그녀의 신음이 생생하게 기억났던 까닭이었다.

"그, 미안."

나는 자꾸만 떠오르려는 기억을 억누르며 말했다. 지수가 목이 쉰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범인은 나였다. 정확히는 서로 함께 한 행위 때문이었다.

방이 떠나가라 교성을 내지른 건 아니지만, 워낙 성대를 억누르는 소리였기에 목에 부담이 많이 간 모양이다.

"뭐가 미안해? 나는 좋았는데. 아저씨 덕분에 몸도 이제 조금만 더 쉬면 완전히 원 상태로 돌아올 것 같아. 이거 봐. 어제 아저씨가 나 깨문 자국도 없어졌잖아. 회복이 빠르다는 이야기지."

지수가 상의를 들추며 몸 이곳저곳을 보여주려고 하는 걸 나는 급하게 막아섰다. 당황한 눈치인 나를 보던 그녀는 킥킥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부끄러워? 어제는 나 그렇게 괴롭혀 놓고서는···. 아무튼 걱정 하지마. 이제 진짜 괜찮으니까. 몸도 빨리 낫고 있으니 목소리도 빨리 돌아오겠지."

"그럼 다행이지만··· 도끼는 왜 들고 있는 거야?"

"도끼? 아. 어제 아저씨가 가져온 봉투. 거기에 들어 있는 거 뭔지 알고 있었어?"

"······?"

"역시 몰랐나 보네. 저기 봐봐."

지수는 도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무언가가 갈기갈기 찢긴 처참한 광경이 보였다.

"···뭐야, 저게?"

"콘돔이더라."

"···예?"

지수의 말에 가까이서 가 보니 동그란 비타민C 포장지와 유사한 것들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의해 사정 없이 찍혀 있는 광경이 보였다.

언뜻언뜻 매끈한 고무 조각이 튀어나와 있는 걸 보면 기본적인 피임 도구인 콘돔이 확실했다.

그리고.

"칼카타···!"

이제서야 일의 전말을 눈치챈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지수에게 성인식이니 뭐니 했던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온 것이 성인식이 아닌 발정기라는 걸 말이다.

어쩐지 성인식 관련해서 묘하게 뜸을 들이더라니 그런 이유였다.

'아니, 그럼 지수가 도끼를 들고 있는 이유가···.'

몸이 딱딱하게 굳은 내가 삐걱거리며 지수를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맞아. 내가 그랬어. 아저씨랑 나 사이에 저런 건 필요 없잖아? 그래서 다 찢어 버렸어. 아, 찍었다고 해야 하나."

나와 눈이 마주친 지수가 히 웃으며 당당하게 V자를 그렸다. 잘했냐는 듯이 꼬리가 붕붕 돌아간다.

"아저씨, 이거 봐봐. 신발 이쁘지? 이때가 아니면 하얀 신발 언제 신어 보겠어? 지금이 제일 깨끗하게 보일 때인데. 밖에 나가면 바로 물들어 버리잖아."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지수가 선수를 쳐 현재 신고 있는 신발을 자랑했다. 그녀는 발을 까딱거리며 신발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래도 나 이제부터는 그냥 색 상관없이 옷 입으려고. 나는 이미 아저씨한테 물들었으니까. 뭐가 어떻게 변하든 그건 아저씨와 함께 하면서 생긴 흔적일 테니까. 아저씨는 이거 하나만 알고 있으면 돼. 아저씨가 내 것이 된 게 아니고, 내가 아저씨한테 물든 거라는 것. 콜록! 아···, 목이 쉬었어. 좀 더 예쁜 목소리로 말해주고 싶었는데."

지수는 목이 쉬어서 고백이 볼품없어졌다며 작게 투덜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맑은 금안으로 나를 담으며 붕붕 돌아가는 꼬리로 자기 기분을 알렸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나는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을 그대로 삼키고, 속에서 분해한 후 재조립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수야, 나만 믿어. 아이 낳기 전에 내가 먼저 세계수인지 뭔지 하는 나무 없애버릴 테니."

"도끼로 저거 베려면 진짜 한세월이겠다···."

나와 지수는 창문 밖 너머 풍경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거대한 나무를 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옅은 안개는 거목의 존재를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나게 만들었다.

잠시 고목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근데 아저씨, 나 임신 안 했는데?"

문득 고개를 갸웃한 지수가 내게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안 했어?"

"어···응. 안 했을··· 걸? 아무것도 안 느껴져. 이렇게 툭툭 치면 그냥 약간 출렁━"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도 돼!"

아랫배를 쓰다듬기도, 톡톡 건드리기도 하면서 하는 말에 나는 황급히 지수의 손을 붙잡아 입을 막았다.

그렇게 싸질렀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 같다는 말에 안도감을 느껴야 할지, 한층 더 거리낌이 없어진 지수를 보며 곤혹스러워 해야 할지.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상황 속에서 지수는 한술 더 떴다.

"오빠, 아기 가지고 싶어요? 그럼 우리··· 한 번 더··· 할래요?"

갑자기 말투와 표정을 바꾸며 들러붙는 지수. 그녀의 꼬리가 내 팔을 휘감았다.

매력적인 굴곡이 몸에 비비적거리면서 한 말에 혹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지수가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순간적으로 열기가 얼굴에 몰린 탓일까.

"···지수야. 너 코피 난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휴지로 코를 살짝 막아주었다.

"아."

단숨에 유혹적인 모습에서 코맹맹이 바보가 된 지수. 그녀의 귀가 축 늘어졌다.

"아직 휴식이 더 필요하다니까. 자, 나한테 기대. 침대까지 옮겨줄게."

"···응."

나는 최대한 지수에게 부담이 가지 않게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렸다.

지수는 맞닿아진 내 쇄골에 얼굴을 묻고 이리저리 비비적거렸다. 꼭 자기 체취를 남기는 행위인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쉬고 있어, 지수야. 슬슬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부르고."

"응, 알았어. 나는 좀··· 자고 있을게···."

문 밖으로 나서는 내게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해준 지수는 길게 하품을 했다. 이내 이불과 한 몸이 된 그녀는 꼬리만 바깥으로 내놓은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침대보 갈아야 하고, 이불도 당연히 갈아야 하고, 갈아입을 옷도 가져다줘야 하고···. 이것저것 할 게 많네.'

나는 오늘 할 일을 떠올리며 현관문을 열었고, 그 상태에서 몸을 딱딱하게 굳혀야만 했다.

"5시간 34분 25초··· 5시간 34분 26초··· 5시간 34분 27초···."

벽에 기대앉은 한세아가 두 무릎을 모은 자세를 한 채 대기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가 문을 열고 나온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무언가를 쉴 새없이 중얼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꿀꺽-

심상치 않은 기색에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인 줄 알았었는데.

앉은 자세로 보나, 귓가에 들리는 중얼거림을 들어 보나, 여기서 꽤 오래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문을 닫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숨고 싶었다. 그러나 이대로 한세아를 두고 지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를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무시하고 지나간다는 선택지는 고를 수조차 없었다. 살기 위해선 그래야만 했으니까.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런 행동을 하는 순간, 내가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세아씨?"

내가 조심스럽게 한세아를 부르는 것과 동시에.

"5시간━"

내 목소리를 들은 한세아가 말을 뚝 멈추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이내 나와 그녀의 눈이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의 눈에는 슬픔이나 분노 같은 것들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것이 담겨 있다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죽은 눈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에는 작은 쟁반이 놓여 있었다. 차갑게 식은 죽이 담긴 냄비가 올려져 있는 건 덤이었다.

"···하. 이제서야 나오시네요. 설명해요. 지금 당장."

헛웃음을 토해낸 한세아가 눈을 서슬 퍼렇게 뜨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계속해서 시간을 세던 입술은 바싹 말라 갈라져 있는 상태였다.

신중하게 입을 열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한 나는 입을 열기 전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폐부를 채운다.

여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