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7 - 287. 아이 (1)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지금 한세아의 시선을 칼로 바꿀 수 있다면 내 가슴에는 구멍이 수백 번 났겠지. 그만큼 그녀의 눈이 날카로웠다.
"저는요. 어제 다들 정신이 하나도 없기도 했고, 현우씨도 거실에서 대기하느라 뭘 제대로 못 먹었다는 걸 알고서 바로 밥 준비해서 왔거든요? 근데요. 여기 오니까 무슨 소리가 들렸는지 알아요?"
"······."
"아주 그냥 물고 빨고 할 거 다 하시고 계시더라구요. 저한테는 처음이라 로맨틱이니 낭만적이니 로망이 있니 하면서 거부했으면서 말이예요."
한세아는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작은 주먹. 이상하게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모습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그, 세아씨. 여긴 그 예기치 못한 상황과··· 깊고 깊은 사정이···."
나는 그녀의 주먹이 내게 향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열었을 것이다. 한세아가 코웃음을 치지 않았더라면.
"하, 사정은 무슨. 현우씨가 어제 실컷 싸지른 게 사정이겠죠. 현우씨, 여기에 현우씨 기준에 맞는 로맨틱한 방이 있던가요? 낭만적인 분위기가 있었나요? 둘만━ 하아···, 둘만 있기는 했네요."
매우 억울하고, 서운해 보이는 한세아. 심지어 그녀의 옆에는 나를 생각해서 챙겨 온 식사가 차갑게 식어 있기까지 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 요소가 서로 뒤섞여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엄청나게 만들어냈다.
분명 내가 첫 경험의 로망이니 뭐니 하면서 한세아를 억지로 밀어냈던 건 사실이기에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까지 생각하면 뭐라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수와 함께 했던 방이 로맨틱하진 않았고, 낭만적인 분위기는···있었나? 이 멍청아,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잡생각이 자꾸만 드는 들었다.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서 입 꾹 다물고 있는 건 나를 그냥 죽여달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나는 최대한 한세아를 자극시키기 않기 위해 입 밖으로 꺼낼 말을 조립하고 또 조립했다.
"이런 말을 여기서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못할 건 또 뭐예요? 암캐 신음 소리도 여기서 다 들었는데."
한세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뼈 아프다. 숨이 턱 막히는 건 덤이었다.
이렇게까지 죽은 눈이 된 한세아는 처음 보았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온몸에서 피어 오르니 사람이 달라 보이기까지 했다. 허나, 지금 이렇게 된 건 다 내 탓이었다.
"진짜 진짜 거짓말하는 게 아니고, 지수에게- 아, 진짜 미치겠네. 아니 아니, 세아씨보고 한 말 아닙니다. 아무튼! 지수에게 그, 발정기가 왔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요. 칼카타가 말했던 성인식이 그거였는지 아니면 부작용인지는 몰라도 그거랑 비슷한 상태였었어요. 그래서 지금 칼카타에게 물어보러 가려고 했던 겁니다."
나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설명 아닌 변명을 이어 나갔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세아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할 때.
꼬르륵-
공복을 알리는 시계가 복도에 울렸다. 내 배에서 난 소리는 아니었다. 내 앞에서 난 소리였다. 정확히는 그보다 좀 아래였다.
"······?"
"···일단 가서 이야기해요. 배고프시잖아요. 하, 배가 더 고프실만도 하겠네! 어제 새벽 내내 몸을 섞었으니까! 진짜 너무해···. 왜 나만······."
단단히 화가 나 보이는 한세아는 바닥에 방치되고 있던 쟁반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달그락-
쟁반 위에 올려진 작은 냄비가 흔들리는 소리를 낸다. 살짝 열린 뚜껑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앞장서서 걷는 한세아를 조용히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눈치 없이 소리를 낸 건 내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만큼 눈치 없는 행동은 없었으니까.
호다닥-
서둘러 따라붙은 내가 살며시 한세아의 손을 잡자, 그녀는 잠시 움찔하긴 했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 아팠지만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다.
이윽고.
-덜컹
이웃집으로 들어온 나와 한세아는 곧장 칼카타부터 찾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굴려 댔다. 칼카타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어디 갈 필요도 없이 그는 거실 한복판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전사가 왔구나. 내가 어제 준 도구는 도움이 되었나? 크하하핫! 하핫··· 하···. 무슨 일 있나? 그렇게 바라보지 좀 말게. 좀 무섭군."
킬킬거리며 웃던 칼카타. 그는 크게 웃다가 뒤따라온 한세아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눈치를 챙겼다.
그녀가 내 뒤에 있어서 나는 그 표정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었다. 대전사의 웃음을 멈추게 할 만큼 분명 심상치 않은 표정이었을 테니까.
지독한 침묵이 순간적으로 내려앉은 상황 속에서,
"칼카타. 알고 있었어요? 지수씨에게 온 게 발정기라는 거요."
먼저 입을 연 것은 한세아였다.
"크흠, 알고 있는 편이었지."
"확실하게 말해요!"
"알고 있었다."
냉큼 답을 바꾼 칼카타가 눈짓으로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내게 물었다. 그의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대충 그런 식으로 물음을 이해한 나는 간단하게 지수의 상태에 대해서 말해주는 한편, 칼카타에게 알고 있는 걸 전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
"흐음···, 그렇게 된 거군. 일단 내가 너희에게 알려주었던 성인식이라는 단어는 틀린 말이 아니다. 당연히 그때 짧게 해줬던 설명도 틀린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가 말해주지 않은 건 일종의 발정기나 다름없는 그것이 연례행사나 다름없다는 점이다.
나이가 어느 정도 찬 수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현상이야. 물론, 이건 어떤 수인이냐에 따라서 발정기가 어떻게 찾아오고, 어느 주기로 겪게 되는지는 천차만별이지만 말이다.
"
거실 한복판에 모여 앉은 나와 한세아를 보며 칼카타가 한 말이었다. 그는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서 장난 한번 쳐 본 것뿐인데, 하마터면 피를 볼 뻔했다며 투덜거렸다.
"그럼 지수는 앞으로도 그, 발- 아무튼 그걸 계속 겪어야 한다는 겁니까?"
"뭐라고 확답을 내려줄 수가 없지만 지구의 수인과 내 고향의 수인이 다르다고는 해도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어떤지 확실해지겠지."
"······이 암캐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세아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현재 가스 불에 의해 끓고 있는 냄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달그락거리는 냄비 안에는 어제 먹지 못한 참치미역죽이 들어 있었다. 이틀 전에 나와 칼카타가 구해 온 재료들로 만든 것이었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냄비에서 풍기는 기름지고, 고소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나저나 이현우. 피임은 했나?"
칼카타는 애꿎은 실리콘 국자를 괴롭히고 있는 한세아를 애써 무시한 채로 물었다.
피임이라는 단어에 한세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실리콘 국자가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은 덤이었다.
"아, 그거. 전 그게 뭔지 아침이 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아니, 뭡니까 대체. 말이라도 해주지. 자고 일어나니까 지수가 도끼로 그걸 다 찢어 놨더라고요."
도끼질로 피임 도구를 망가트렸다는 이야기에 박장대소를 하려던 칼카타는,
"이 암캐가···!"
곧바로 이어진 한세아의 작은 외침에 슬그머니 웃음기를 거뒀다.
"그래서 그, 못했습니다. 임신이 되지 않은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발정기니 임신이니 하는 민망한 이야기가 지속되자 괜스레 헛기침이 나오려고 했다. 옆에서 한세아가 죽은 눈을 하는 것도 헛기침이 나오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솔직히 무서웠다.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한세아.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적절치 않다는 건 알다만, 이현우를 너무 몰아세우지는 말게. 그 또한 불가항력이었을 테니까. 아마 이성을 유혹하는 기운이 뿜어졌을 거야. 아, 그래. 페로몬. 이렇게 부르는 게 이해가 빠르겠어."
매서운 한세아의 시선에 바들바들 떨고만 있는 나를 변호해주는 칼카타. 그는 헛기침하며 이목을 끌었다.
"페로몬이요?"
어쩐지 느낌이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그동안 잘 참아왔던 내가 갑자기 눈이 훼까닥 돌아서 지수를 그렇게 마구잡이로 괴롭힐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회로를 핑핑 돌리고 있던 나는,
"그렇다. 원하는 상대와 맺어지기 위한 수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힘이지. 뭐, 엄청 강한 수준은 아니라 완전히 마음이 없다면 거부할 수 있는 정도지만 말이다. ···이런, 방금은 괜한 말을 했군. 아무튼 임신하지 않았다는 말. 본인이 직접 한 건가?"
이어지는 칼카타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밀어 내려면 밀어낼 수 있었다는 말이었으니까. 이럴 거면 말이나 꺼내지 말지.
괜히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한세아를 향한 미안함만 더 커졌다.
"···네,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했었습니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야 알겠지만요."
"흠, 아니. 기다릴 필요는 없을 거다.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면 정말로 임신하지 않은 것이고, 않을 테니까. 그 상태의 수인은 특히 감이 좋거든. 그건 믿어도 좋아."
칼카타는 잠시 답을 고민한 후에, 입을 열었다.
"아직 임신은 하지 않았다라···. 칼카타, 그래서 지수씨는 당장은 괜찮아졌다는 말인가요? 이제 한동안은 몸이 멀쩡하다는 소리죠? 현우씨가 보기에는 어땠어요?"
아침 식사 준비를 마친 한세아가 그릇에 죽을 퍼 담았다. 잔뜩 화가 난 와중에도 챙겨 주는 걸 보니 미안함과 함께 고마움이 들었다.
아니, 이제 보니 화가 살짝 풀린 모양이다. 잔뜩 찡그린 얼굴에서 조금 찡그린 얼굴로 바뀌었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상태가 완전히 호전된 것 같았습니다. 확실하게요. 한숨 자고 일어나면 예전의 지수로 돌아올 듯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걱정은 더 안 해도 되겠어요. 이거 받아요, 현우씨. 나머지는 밥 먹고 나서 차차 이야기해요."
한숨을 폭 내쉬는 한세아.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죽 그릇을 나와 칼카타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예린이도 지수 이제 괜찮다고 했···으니······."
나는 한세아가 건넨 그릇을 조심스럽게 받으며 말하다가 문득 머리를 스친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 예린.
나를 속인 예린.
지수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예린.
아이가 괜찮다고 했던 말은 오늘 들은 말이 아니었다. 어제 들은 말이지.
"···예린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꿀밤 맞을 시간이다. 예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