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8 - 288. 아이 (2)
"갑자기 밥 먹다 말고 예린이는 왜 찾아요? 무슨 문제 있어요?"
한세아가 중간에 말을 멈춘 나를 보며 한눈 팔지 말고 밥부터 먹으라는 듯 그릇을 툭툭 건드렸다.
"아뇨···.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냥 지수 이제 괜찮다고요. 그 말 하려고 했던 겁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특히 말을 더 잘 들어야만 하는 날이니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죽을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약간 심심한 맛. 그래도 공복이 반찬이라고 하던가. 비록 최미소에게 주기 전 연습용으로 만든 것들이라고 해도 먹을만 했다. 아니, 맛있었다.
나는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가면서 일단 예린의 행방을 묻는 건 뒤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아이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 근방에 있을 테니까. 급한 일은 아니었다.
"칼카타, 미소 언니랑 아기 상태는 어때요? 제가 새벽에 계속 상태 어떤지 봐 줬어야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 가지고 케어를 못 했네요. 죄송해요."
어제 아기를 낳은 최미소의 몸 상태를 물어보는 한편, 나를 째려보는 한세아.
"크흡-."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에 순간 먹고 있던 죽을 뱉어낼 뻔했다. 잠을 자지 못해 퀭한 눈이 보내는 시선이 가슴을 콕콕 찔렀던 까닭이다.
"둘 다 괜찮다. 아내와 아기는 지금 편하게 자고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죄송할 것도 없고. 오히려 한세아. 좀 늦었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군. 아내를 도와줘서 고맙다. 나 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무사히 일이 풀리지는 않았을 거야. 이현우 너도 병원 같이 가줘서 고마웠다."
어느새 그릇을 싹 비운 칼카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뭐,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우리 이제 한배를 탄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런 그를 보며 멋쩍은 표정이 된 나와 한세아는 손사래를 치며 칼카타를 일으켰다. 확실히 최미소와 칼카타를 돕는 것이 쉽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요 이틀 사이는 위험천만한 상황과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황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일을 가지고 생색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게 엄청 특별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저 감사 인사를 받았으면 그걸로 족했다.
바람이 들어온 것도 아니건만. 우리 사이에 맴돌기 시작한 훈훈한 분위기.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제 밥도 다 먹었으니 오늘도 일해야겠어요. 설거지는 현우씨가 해요. 저는 누구 때문에 피곤하거든요."
거실에 있는 나, 한세아, 칼카타가 아침 식사를 전부 끝마치자 한세아가 그릇을 모으며 한 말 탓이었다.
"당연히 제가 해야죠. 세아씨는 그, 오늘 하루 정도는 움직이지 말고 한숨 자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황급히 그릇을 끌어온 나는 눈치가 보이는 심정으로 여부가 있겠냐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라도 더 해서 한세아를 달래야 할 것 같은데. 입에 자물쇠라도 걸린 것처럼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하아, 됐네요. 미소 언니는 아직 돌봄이 더 필요하거든요. 그럼 현우씨, 저는 이제 미소 언니 마저 간호하면서 좀 잘 테니까 뭘 하든 옷부터 갈아입고 해요. 암캐 냄새 나요."
내 표정을 본 한세아는 여전히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속에 품고 있는 수많은 말들은 그녀가 내뱉은 한숨에 녹아 없어졌는지 생각이 소리로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읍?!"
그녀는 갑작스레 나를 확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약간의 물기와 함께 좀 전에 먹었던 죽의 맛이 느껴졌다. 말랑한 감촉은 덤이었다.
"지금은 그냥 넘어가는데. 두 번은 없어요. 다음은 무조건 나니까. ···하, 이제야 냄새가 좀 덜 나네."
"······."
한세아는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밀어낸 후, 최미소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조용하게 닫히는 문소리. 살짝 열리고 닫혔던 문틈 사이로 최미소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네 앞날이 훤하구나, 이현우."
칼카타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뭘 잘했다고 혀를 차는 겁니까."
괜스레 욱하는 심정에 나도 모르게 따져 물었다. 최소한의 언질이라도 해주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지 모르는 일이 아니던가.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에는 칼카타의 장난이 일정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누가 알았겠나. 아기를 보며 우는 와중에도 장난을 칠 거라고. 심지어 그 피임 도구가 담긴 봉투는 분만실 구석에 미리 준비되어 있기까지 했다.
"아니, 나는 뭐 혀도 못 차나? 쯧쯧쯧."
"하아···."
보란 듯이 더 혀를 차는 칼카타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 다 내 잘못인데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냥 설거지나 후딱 해치우고, 침대보나 좀 갈아 끼울 뿐이지.
'아니, 잠깐만.'
한 명 있었다.
한세아의 죽은 눈에 의해 순간적으로 까맣게 잊고 말았던 사람이.
아이를 막 탓하거나 할 건 당연히 아니었다. 허나, 날 당황스럽게 만든 만큼 간지럼이라도 태워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달달한 꿀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칼카타, 아까 물어보다가 말았던 건데. 예린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그 아이라면 지금쯤 창고에 있을 거다. 입이 심심한 듯해서 식량 창고 가서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으라고 했었거든.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아직 거기 있을 가능성이 크지."
칼카타가 예린의 위치를 파악하는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알려 줘서 감사합니다. 그럼 칼카타, 설거지 부탁해요. 저는 아이한테 볼일이 있어서."
나는 쌓아둔 그릇을 칼카타가 있는 방향으로 밀었다. 어지간해서는 내가 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눈치 빠른 고양이가 위기를 감지하기 전에 먼저 찾아내야 했으니까.
그리고 내 나름대로 소심한 복수이기도 했다.
"······?"
"아, 설거지 도와줘서 미리 감사합니다!"
"아니, 어디 가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칼카타가 나를 불렀지만 나는 이미 현관문이 있는 위치까지 부리나케 도망간 상황. 결국 그는 허망하게 뻗었던 팔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털웃음을 터트린 걸 보니 다행히 기분이 나쁘진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무사히 도망친 나는,
"우리 예린이가 어디···있을까···?"
눈을 빛내며 예린을 찾기 시작했다. 창고. 그중에서도 식량 창고라 했으니 후보지는 두 군데로 좁혀진다.
바로 나, 지수, 예린, 한세아가 잤던 집에 있는 창고와 방금 내가 떠났던 칼카타와 최미소가 머무는 집에 있는 창고.
허나, 칼카타의 집에 있는 창고는 아니다.
아이가 그곳에 숨어 있었다면 우리가 몰랐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사실상 후보지는 한곳이나 마찬가지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내가 잠을 잤던 방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끼이익······
나는 고양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최대한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천천히 굴려 보니 5개의 방문 중 딱 하나의 방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부스럭······ 부스럭······
그 방에서 작은, 아주 작은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거기 있구나.'
목표물을 찾은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이틀 전, 칼카타와 같이 냉장고를 뒤적거리던 와중에 얻었던 무기였다.
[쁘띠첼- 과일젤리 복숭아]
몰래 숨겨둔 물품이었는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했던 컵 젤리 하나. 세상이 요지경으로 바뀌고 나서 절인 과일이 들어 있는 컵 젤리 식품을 구경도 못하다가 이번에 겨우 하나 구한 것이다.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고, 변색된 부분도 없어서 안심하고 먹어도 될 듯했다.
'물론, 먹는 건 내가 아니라 예린이지만.'
어차피 아이에게 주려고 가져온 젤리이기에 아깝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숨어 있는 아이를 유인하는데 쓰일 줄 몰랐을 따름이었다. 앞날은 모른다더니.
가뜩이나 간식거리를 좋아하는 예린. 그런 아이에게 이 정도로 효과적인 미끼는 없을 터다.
그리 생각한 내가 창고 안으로 발을 들이민 것과 동시에.
······부스럭!
기척이 사라졌다. 다만, 옅은 숨소리만큼은 들리고 있는 중이었다. 불청객의 등장에 긴장한 듯 살짝 가빠진 숨소리였다. 내 시야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지이익-
툭
창고를 이리저리 헤집는 대신 젤리컵 비닐을 그대로 뜯어 창고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코를 미약하게 자극하는 달달한 복숭아의 향기가 스멀스멀 창고 사방으로 퍼진다.
바보도 속지 않을 정도로 매우 노골적인 함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가 걸려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까부터 들려오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젤리 비닐이 까진 순간부터였다.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그랬어.'
고양이가 미끼에 걸려들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제부터는 인내심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