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9 - 289. 아이 (3)
느껴진다.
먹잇감을 노리는 고양이의 시선이.
과일 젤리가 담긴 컵을 내려놓은 지 1분도 되지 않았는데, 창고 내부에는 묘한 긴장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젤리를 피해 없이 노리는 자와 젤리 덫을 놓은 사람이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면서 생긴 분위기였다.
'칼카타는 행방을 알고 있는데, 세아씨는 모른다면 여기밖에 없지. 실제로 여기 있었고.'
지금 내가 있는 창고는 가벽을 전부 허물어 크게 넓힌 장소였기 때문에 공간이 생각보다 컸다.
그 덕분에 문이 여러 개 있어서 한세아가 예린이 나오는 걸 볼 수 없었고, 따라서 창고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는 건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금속 선반에 종류별로 놓인 통조림, 자판기에서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 각종 음료수 캔들, 벽을 이루고 있는 생수통, 라면이나 초코바 같은 부식이 들어 있는 PP박스.
잘못 움직여서 가지런하게 쌓여 있는 물자들을 엎기라도 한다면 눈앞이 깜깜해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그런 움직임은 예린에게 기회를 더 줄 뿐이었으니까.
다만 그건 예린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물자가 아이나 어른을 가려서 쓰러지고 말고를 결정한다던가. 아이도 그런 점을 알고 있는 까닭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중이었다.
꼴깍-
과일 냄새가 점점 더 퍼지는 것과 동시에 군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빠, 젤리만 두고 이대로 물러나요. 그리고 우리 저녁에 다시 만나요. 어때요?"
참다 못한 예린이 제안을 건넸다. 아이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조급함이 담겨 있었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그런데 그건 안 되겠다, 예린아. 나는 꼭 지금 보고 싶어. 자, 이거 봐봐. 너 주려고 가져온 거야."
드디어 고양이가 슬슬 미끼를 물려고 하고 있다는 생각에 무심코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가 현재 지금이 아닌 저녁 시간대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때가 되면 아이를 지켜 줄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이겠지.
'기회는 지금뿐이야.'
저녁이 되어 지수나 한세아에게 한 소리 듣더라도 나는 당장 아이와 승부를 봐야 했다.
바로 그때.
휘이이잉···
옅은 바람 한줄기가 창고를 스쳐 지나갔다. 인위적인 바람이었다. 자연적인 바람은 절대 아니었다. 사방이 막혀 있는데 바람이 불 수 있는 경우는 딱 하나였으니 말이다.
"···예린아, 아무리 그래도 가루를 쓰는 건 반칙 아니야?"
나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가루를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이런 별것도 아닌 상황에서 푸른 가루를 쓰는 건 선 넘는 행동이지 않은가.
"가루 안 써도 이 정도 부탁은 들어 주거든요. 친구니까요."
"우리도 친구잖아."
그러니 고집 부리지 말고 순순히 나오라는 뜻으로 말하니,
"아뇨, 지금은 적이죠. 그러니까 젤리만 놔두고 그대로 물러나세요, 오빠. 그러다가 물벼락 맞아요."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물도 만들어 낼 수 있어···?"
"······."
답이 없는 예린. 알아서 생각하라는 것일까.
"이 과일 젤리 말이야. 복숭아 맛이다? 너 예전에 복숭아 좋아한다고 했었잖아. 이거 줄 테니까 우리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저녁에 이야기해요. 다 같이 있을 때요."
"너 정말 이럴 거야?"
"오빠야말로 정말 이럴 거예요?"
이 젤리 하나만 있으면 아이를 꾀어내는 것이 쉬울 줄 알았었는데. 아이는 생각보다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바람이 분 순간부터 예린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특정해낼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웅웅 울리듯 들리는 걸 보니 바람이 아이의 목소리를 옮겨 주고 있는 모양이다.
'···아, 그냥 돌아갈까.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이렇게 아이와 진지한 대치를 하고 있으려니 뭔가 가슴 깊은 곳에서 회의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토끼를 잡을 때 최선을 다하는 사자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맞든 아니든 나는 내 자신에게 한심함이 느껴졌다. 아이 상대로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라는 말인가.
그냥 원래 목적대로 젤리를 주고 지수나 돌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거 하나만 묻자. 예린이 너. 지수 상태 이상한 거 알고 있었지."
그리 생각한 나는 창고를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었다. 솔직히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물음이었지만, 본인에게서 직접 듣는 건 또 달랐으니까.
"···흐흫. 당연한 걸 물어보시네요. 당연히 알고 있었죠. 하루 종일 언니를 간호한 게 전데요."
"그것 때문에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 심장이 철렁했단 말이야."
"하지만 재밌었죠."
"나는 재미없었는데?"
"괜찮아요. 저는 재밌었으니까."
이어지는 예린의 깐족거림에 무의식적으로 주먹이 쥐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오늘만큼은 어른도 유치해질 수 있다는 걸 아이에게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예린아, 내가 웬만하면 그냥 가려고 했거든? 근데 안 되겠다."
"어어?! 오빠···! 내 젤리에게서 손 떼요···!"
내 손에 들린 컵 젤리를 보며 경악성을 토해내는 예린.
유치하지만. 정말로 유치하지만 그런 아이의 반응에 흡족함이 느껴졌다.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애라고 하던데. 나도 남자라 그런지 지금 상황이 재밌기만 했다.
"너 나오면. 안 나오면 내가 먹고."
"유치하게 이러지 마요. 오빠는 어른이잖아요!"
"그건 모르겠고, 순순히 나오지 않으면 젤리는 죽어."
"오빠, 고양이는 사람을 찢어요. 후회할 행동하지 마세요!"
"내 숟가락도 젤리를 찢지. 심지어 과일도 조각낼 수 있어."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어 간다. 젤리 하나로 시작된 이 작은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빠···! 저랑 이렇게 시간 보내도 되는 거예요? 오늘 할 거 많지 않아요? 많잖아요! 빨리 많다고 해요!"
"아니, 너랑 노는 건 온종일도 할 수 있어."
나는 아직 여유롭지만, 예린은 탱탱한 푸딩 형태의 젤리 위에 자리잡은 숟가락이 거리를 점점 좁혀갈수록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나를 도발하는 건 어느 정도 성공한 예린. 제법이었으나 여기까지였다.
결국.
"이익···!"
참을성을 잃고, 인내심이 바닥 난 예린이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기 위함인지 몸에 바람을 휘감고서.
토도도도도-
조용한 발돋음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작은 형체.
하지만 실전으로 단련된 내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아이가 빨라도 얼마 전에 상대한 나무 인간 변종보다는 속도가 느렸으니까.
덥석-
"잡았다!"
"꺄아···! 악! 간지러워요! 꺄하하···! 간지러워요···! 항복! 항보옥···!"
아이는 뒷덜미가 잡힌 것과 동시에 시작된 간지러움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몸을 배배 꼬면서 웃음보를 쉴 새 없이 터트렸다.
"꺄하하핳!"
어린아이 특유의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나 또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실 오늘 이렇게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낸 이유는 딱 하나였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동안 예린을 따로 신경 써 주지 못한 것이 내심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지수의 상태를 거짓말 했니 뭐니 했던 건 아이와 놀아 줄 구실에 불과했다.
"헥···, 헤엑···. 그만···. 오빠가 이겼어요···."
"허억··· 다시는··· 어른을 도발···하지 마라···."
그러니까 나는 절대로 진심이 아니었다.
"젤리··· 먹어도···헥··· 돼요?"
"그래, 먹어라. 먹어. 다 먹어."
"복숭아 젤리이이···!"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대자로 뻗어 있던 예린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꼬리와 함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이는 창고 벽에 등을 기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젤리를 크게 떴다.
"맛있다···!"
입에 한가득 넣은 젤리를 옴뇸뇸거리며 씹는 예린의 얼굴에서는 행복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식량 창고에 있었던 걸 보아하니 아침도 먹고, 다른 것도 먹고, 지금 젤리도 먹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많은 음식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서 배를 콕 찔러보았다. 말랑말랑했다.
"오빠! 젤리는 고맙지만 다른 사람 배는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거라구요!"
정론이었다.
"···미안."
"근데 오빠라면 괜찮아요. 배 더 만질래요?"
"아니, 괜찮아···. 안 건드릴 테니까 젤리 마저 먹어."
"넴. 아, 오빠. 언니 상태 거짓말 한 건 이걸로 봐줘요."
내 입에 불쑥 들어오는 젤리 한 덩이. 눈을 감았다가 뜨니 입 안에는 젤리가 들어 있었다. 적당히 달달하고, 적당히 탱탱한 식감이 느껴진다.
일단 주니까 먹긴 먹었지만, 아이는 한입 바치면 그냥 넘어갈 줄 알았나 보다. 무슨 뇌물도 아니고.
"아무쪼록 이걸로 봐주시길··· 그래도 좋았잖아요?"
가슴팍을 내밀며 후후 웃은 예린은 숟가락을 회수해 젤리를 다시 퍼먹기 시작했다.
"허."
애가 못 하는 말이 없다며 기어코 꿀밤을 한대 먹이려다가 그만두었다. 한입 먹을 때마다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에 있던 화도 없어질 지경이었으니까.
그 대신.
"예린아, 젤리 다 먹고 나면 지수 좀 챙기고, 그러고 나서 아기 보러 갈까?"
아이의 귀를 손으로 문질러 주며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좋아요!"
해맑게 웃으며 답하는 예린의 모습에 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렇게 웃음으로 마무리 짓게 된 젤리 전쟁.
나와 예린은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