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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290화 (291/497)

Chapter 290 - 290. 아이 (4)

"다 먹었으면 이제 일하러 갈까?"

나는 통통한 배를 두드리고 있는 예린을 보며 말했다. 아이는 입가심을 하려는 듯 사탕 하나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안아줘요, 오빠."

젤리를 먹고 나서도 초코바 하나와 사탕 하나를 더 해치운 아이는 혼자 움직이기 벅찬지 내게 양팔을 뻗었다.

"그러게 적당히 먹으라니까. 누가 뺏어 먹는 것도 아닌데."

"먹고 싶은걸 어떡해요."

"먹긴 먹더라도 과식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야. 자, 이리 와."

나는 고리타분한 충고를 한 뒤, 예린을 앞으로 안아 들었다. 워낙 많이 먹어서 그런가 갈수록 무게감이 늘어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못 먹어서 가벼운 것보다는 잘 먹어서 무거운 것이 훨씬 나았다.

특히 아직 성장기가 끝나지 않은 예린이었으니 잘 먹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자신도 빨리 컸으면 좋겠다며 매일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히힣."

뭐가 그리 좋은지 내 품에 얼굴을 비비는 예린. 푸른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나는 아이와 함께 지수의 상태를 마저 확인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어느새 높게 뜬 해가 창문 너머에서 들여보내는 햇빛이 뜨거웠다. 큼지막한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바닥 군데군데 그림자가 지지 않은 곳을 달구고 있었다. 장판에 반사되는 빛에 눈이 부신 건 덤이었다.

이윽고.

"지수 아직 자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제 쉿 해야 한다?"

"쉿···!"

지수의 방 앞에 도착한 우리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일자로 세웠다. 아이는 마치 잠입 작전을 하는 것 같은 지금 상황에 흥미를 잔뜩 느끼고 있는 듯 신이 난 기색이었다.

'신경을 더 써 줬어야 했는데.'

그동안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예린을 챙겨 주지 못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또래 아이들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으나 일행 중에서 어린아이는 예린이 혼자 였으니 많이 외로웠겠지. 철이 빨리 든 아이라고 해도 외로움을 타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 오빠, 안 들어가요?"

"어어, 들어가야지."

나는 괜스레 아이를 한번 고쳐 안으며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끼익······

경첩이 비틀리면서 나는 소리가 퍼지는 것과 동시에 방 안 침대에 커다란 이불 뭉치가 놓여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수였다.

그것도 꼬리만 바깥으로 내놓고 있는.

킁킁-

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조심스럽게 냄새를 맡았다. 조금이라도 민망한 냄새가 나면 곧장 뒤로 돌아 나가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방에서는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았다. 창문을 열었다가 닫은 듯 환기가 된 상태였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내가 침대 가까이로 접근하자,

"응? 오빠, 이불 이거 새 건데요?"

"그러게?"

우리는 지수가 덮고 있는 이불이나 매트리스를 감싼 침대보가 전부 깨끗한 것으로 갈아 끼워져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언니가 자다 일어나서 정리했나 봐요."

예린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꼬리를 좌우로 휘익 휙 살랑거리면서.

"그런가 보다."

시선을 흘깃 옆으로 굴려 보니 내가 아침에 방을 나서기 직전 준비해 둔 생수가 비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방에 딸린 화장실에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이불과 침대보가 걸려 있었다. 단순히 갈아 끼운 것만이 아닌 세탁까지 해 놓은 것이다.

'그냥 쉬고 있지. 힘들었을 텐데.'

아이의 추측대로 지수가 중간에 일어나서 방을 정리한 모양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나와 예린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미 방이 깔끔했기 때문이었다.

조용하게 들어온 것만큼 조용하게 나가려는 그때.

"···아저씨······?"

이불 뭉치가 기다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불렀다. 이불 뭉치 내부에서 울룩불룩한 움직임이 이어지다가 이내 무언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자다 깬 상태의 지수였다. 그녀의 귀가 미약하게 쫑긋거린다.

"미안, 깼어? 더 자. 아직 피곤해 보인다."

"맞아! 언니 더 자!"

"알···았어···."

멍한 눈의 지수는 방으로 들어온 사람이 나와 예린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고개를 집어넣었다. 아직 많이 졸린 모양이다. 목이 쉰 목소리가 원래 상태로 많이 돌아온 것이 느껴진 게 그나마 다행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목이 쉬어 있기는 했기에 예린이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왜 그런 눈을 보느냐, 라는 시선을 보내자 예린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예린아, 이제 내려야겠다. 이불 챙겨야 해서 말이야. 안아주는 건 다음에 또 해 줄게."

"알았어요. 저도 이불 나르는 거 도와줄게요!"

나는 잠에 빠진 지수의 신경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움직여 화장실에 걸린 이불과 침대보를 챙겼고, 곧장 방을 나섰다.

텅 빈 생수병에 물을 채우고 돌아온 예린은 이불 끄트머리를 붙잡은 채로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뚝- 뚝-

우리가 지나가는 길마다 강 한줄기가 형성된다. 흡사 낙뢰가 치는 모습 같기도 했다. 물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으엑··· 축축해요···."

이불과 맞닿은 면적에서부터 점점 젖기 시작하는 옷에 꼬리털을 곤두세우는 예린. 아이의 귀가 축 늘어졌다.

"햇빛에 조금 서 있으면 금방 마를 거야."

나는 아이를 다독이는 한편, 이불을 걸기 위한 행거를 창고에서 가져왔다. 햇빛이 쨍쨍하니 이대로만 말리면 물기는 금방 다 마르게 되리라.

안개가 닿지 않는 높이인 7층보다 한층 더 높은 곳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철벅- 후두둑-

파이프 형태의 행거에 이불을 넓게 펴 걸자 이불이 머금고 있던 물을 토해냈다.

햇빛이 강한 자리로 행거 위치를 옮겨주는 것으로 당장 할 일은 끝.

행거가 지나간 길을 따라 중력에 의해 아래로 쏠리게 된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구경하던 예린은,

탁!

물방울이 바닥에 닿아 뭉개지는 순간 손을 뻗어 내려찍었다. 흡사 파리라도 잡는 모양새였다.

'···고양이라 그런가.'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를 보던 나는 행거를 둔 곳처럼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찾은 다음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그러면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방은 지수가 청소해서 건드릴 게 없고···, 이불도 햇빛에 마르도록 잘 걸어 뒀고···, 이제 남은 건···.'

아기를 보러 가는 일만 남았다. 다만, 그것은 햇빛에 옷을 다 말리고 일광욕도 충분히 즐긴 다음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기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 아직 할 일이 많이 남기는 했네.'

탈출하기 위해 안개의 진원지를 찾아서 없애야 하고, 거기까지 가는 수단도 찾아야 했다. 다른 무엇보다 가장 신경 써야 할 일들이었다.

그래도 조금쯤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을 푹 놓을 수 있는 현재를 즐겨도 되지 않겠나.

탁- 타탁!

바닥과 손뼉을 치는 예린.

쨍- 쨍-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

달달··· 호달달···

간혹 부는 강풍에 조금씩 떨리는 창문.

생존에 위협을 받는 상황이 아닌 참으로 평화로운 환경을 말이다. 이런 느낌을 받아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물론, 실제로 흐른 시간을 따지면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겠지만, 체감으로 느껴지는 시간은 억겁에 가까웠었다. 그렇게 느낄 정도로 몸이 피로를 호소하는 중이었고.

바로 그때.

"오빠! 일어나요! 이제 아기 보러 가자구요···!"

예린이 불쑥 고개를 내밀어 외쳤다. 물방울 때리기 놀이가 벌써 끝난 모양이다. 애당초 흥미가 빠르게 식는 편인 아이였으니 지금 수준이면 오래 버틴 편이기는 했다.

"끄응···. 그래, 아기 보러 갈까."

"네!"

"그 전에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보고 가자."

"좋아요!"

골골거리며 내 품에 얼굴을 비비는 예린.

조금 더 쉬고 싶긴 했으나 나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아이를 다시 안아 들었다. 옷도 다 마른 후여서 축축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와 예린은 쉼터에서 벗어나 최미소와 아기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그 집이 이 집이고, 이 집이 그 집이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착할 수 있었다.

들어가기 전에 잠시 멈춰 선 방문 앞.

안쪽에서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언뜻언뜻 들리고 있었다.

"오빠! 빨리 들어가요! 아기 보고 싶어요!"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봐."

똑똑-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다른 사람 방이기도 하고, 혹시나 안에서 수유를 하고 있을 수도 있기에 들어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절차였다. 서로 민망한 상황을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다행히 뭔가를 하는 건 아니었는지 곧장 되돌아오는 대답.

나와 예린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

"······."

방 안에 있던 최미소, 한세아, 칼카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문 밖에서 들었던 소리대로 그들은 서로 대화를 한창 나누고 있는 중이었던 듯 침대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다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나를 보며 쑥덕대는 그들의 모습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게 만들었다.

좀 과장되게 표현하면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고, 적당히 하찮게 표현하면 수상한 작당모의를 한 악당 무리들 같았다.

"···왜, 왜요. 뭡니까. 왜 그렇게 바라보는 건데요."

그러한 시선에 불안함을 느낀 나는 괜스레 아이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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