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91화 (292/497)

Chapter 291 - 291. 아이 (5)

"현우씨, 세아한테 잘해요. 이렇게 착한 사람 본 적이 없으니까."

갑작스러운 최미소의 발언.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한 그녀는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역시 조금 전까지 수유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언니!"

한세아는 최미소를 살짝 붙잡으며 안절부절 못하는 자세를 취했다. 아침에도 최미소를 언니라고 지칭하더니 그동안 서로 지내면서 많이 친해진 것 같았다.

"···계획···그대로······."

"알겠··· 내가 잘··· 걱정···."

최미소와 칼카타는 그런 한세아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둘이서 무어라 쑥덕쑥덕대기 바빴다. 간혹 나를 보며 무슨 말을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괜히 가슴이 콕콕 찔렸다.

'···심각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엄청난 위기 상황이라던가, 제시간 안에 해치워야 하는 급한 일에 대해서 말하는 건 아닌 듯했다. 그도 그럴게, 칼카타가 나를 보며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었으니까. 그는 음흉한 속내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놓고 였다.

"아, 예. 세아씨한테 잘해야죠···. 그런데 그, 아기 좀 봐도 될까요?"

나는 최미소와 칼카타를 추궁하지 않았다. 추궁을 한다고 해도 답을 알아낼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대신 예린과 함께 이곳에 온 목적을 말할 뿐이었다.

"가까이서 보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

"그럼, 당연히 되지. 이리 오렴. 하지만 조용히 해야 한다? 방금 막 잠들었거든."

"네···!"

최미소가 웃으면서 한 말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나를 재촉하는 예린. 아직 내 품에서 내리지 않은 아이는 어서 앞으로 가라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살금살금-

혹여 장판이 눌리면서 큰 소리를 낼까 봐 신중하게 발을 내디뎠다. 방금 전까지 대화 소리가 훨씬 더 컸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기가 자고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몸이 바싹 굳었던 것이다.

이윽고.

"우와···."

아기 바로 앞까지 도달한 예린은 숨을 죽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죔죔을 시도하는 작은 손, 얼굴 중앙에 귀엽게 자리 잡은 코, 가끔 오물거리는 입, 살며시 닫힌 눈꺼풀.

성체의 보호 본능을 한껏 자극하는 아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귀여웠던 것이다. 특히 쪽쪽이를 빨 듯 입을 오물거리는 표정이 치명적이었고, 주먹을 쥔 것도 아니고 핀 것도 아닌 상태인 손의 모습에 기절할 것 같았다.

일행 중 가장 체구가 작은 사람이 예린이었는데,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예린보다 모든 것들이 훨씬 작고, 젖살이 통통하며, 힘도 약해 주먹을 쥐는 것도 하지 못 하는 아기가 태어났으니까.

나와 예린은 정신없이 아기를 구경했다. 단순히 보기만 하는 행위였지만, 이 정도로 귀여운 생명체는 온종일도 볼 수 있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기는 엄마인 최미소를 더 닮았다. 보일락말락 솟아 있는 작은 뿔도 그렇고, 대체적으로 얼굴 형태가 엄마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처럼 보였다.

칼카타와 닮은 부분이라고는 회색 머리칼뿐이었다. 외면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내면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겠지. 정말로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외모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자아이인데 얼굴이 험상 궂은 것보다는 단아한 편이 훨씬 낫지 않은가.

"귀엽죠?"

흐뭇하게 웃고 있던 한세아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를 길게 뻗어 아기의 손 위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자극을 인지한 아기의 손은 전보다 아주 살짝 더 쥐어졌다.

"···네. 엄청 귀엽네요."

남의 아기를 봐도 이렇게 귀여운데, 내 아이를 보게 된다면 대체 얼마나 귀엽게 느껴질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마 그 자리에서 바로 기절하는 게 아닐까.

"어후···."

이러다가 홀려도 단단히 홀릴 것 같아서 나는 서둘러 몸을 뒤로 물렸다. 순간적으로 지수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머릿속에서 상상된 것도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데에 한몫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내가 미쳤지.'

분명 아이를 갖기에는 아직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무심코 그런 생각하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오빠, 아기 더 안 봐요?"

내가 뒤로 물러나자 예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내 품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아이였기에 자동으로 나를 따라서 물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어, 난 이제 괜찮아. 더 볼래? 내려줄까?"

"으음···, 아뇨. 저도 괜찮아요."

나는 예린을 고쳐 안으며 최미소를 바라보았다.

"아기 이름은 뭔가요? 어제 듣기로는 이름을 미리 지어 두셨던 것 같은데."

"우리 딸 이름은 지안이라고 지었어요. 새길 지 자와 눈 안 자를 써서 지안. 눈으로 새기다. 가뜩이나 위험한 세상이니까 어디 한눈팔지 말고 주변을 잘 관찰해서 살아가기를 바라며 지은 이름이에요."

최미소는 사과즙 팩에 꽂은 빨대를 쪽쪽 빨며 말했다. 그녀는 주스 가져다줘서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자신은 시골 출신이라 이런걸 특히 좋아한다고.

그리고 순식간에 내용물을 쪽 빨린 사과즙을 본 칼카타는 재빨리 새 팩으로 갈아 끼워주었다. 그 덕분에 빨대 내부에는 쉴 새없이 즙이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름이 우리 식이네요?"

솔직히 나는 칼카타와 이어진 그녀이니 그의 고향과 관련된 이름을 지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막상 제대로 듣게 된 이름은 평범한 한국식 이름이었다.

"남편 고향식으로 이름을 지을까 했지만, 그건 그이가 바라지 않았거든요."

"그래, 그랬지. 내 고향식으로 짓는 이름은 여자아이에게 어울리지 않거든. 그리고 지구에 왔으니 지구식으로 이름을 짓는 것이 맞지 않겠나. 아니면 이름이 이상한가?"

"아뇨! 지안이라···. 이름 좋은데요? 어감도 괜찮고, 뜻도 좋네요."

특별하고 거창한 뜻이 담긴 것이 아닌 그저 살아남기를 바라며 지은 이름.

나는 칼카타와 최미소가 아기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모성애와 부성애. 곤히 잠든 아기에게 사랑이 가득 담긴 시선을 보내는 그들의 모습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느껴진 건 그때였고,

"흐으응···."

그들의 모습과 자기 목에 걸린 한 쌍의 반지를 번갈아 보던 예린이 갑작스레 울먹이는 소리와 함께 내 품에 얼굴을 묻은 것이 그때였다.

"예린아, 왜 그래? 어디 아파?"

나는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는 아이가 당황스러웠다. 조금 전까지 해맑은 얼굴로 아기를 잘 보고 있었건만, 영문을 모르겠다. 일단 급한 대로 어화둥둥 달래며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당황한 표정을 지은 한세아가 아이를 건네 받으려고 했으나, 아이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기에 그저 내가 안아서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쉬고 계십쇼. 저는 이제 나가 보겠습니다."

"언니, 저도 나가 볼 게요. 무슨 일 생기거나 제가 필요하면 불러요."

나와 한세아는 예린을 데리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시끄럽거나 매우 소란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방이 북적거린 탓일까. 아기의 미간이 조금씩 찌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더 있다간 잠에서 깬 아이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어어, 그래요. 저희는 신경 쓰지 말고 아이부터 어서 달래요."

최미소와 칼카타의 배웅을 받으며 허둥지둥 바깥으로 나온 우리는 아이를 데리고 일단 거실로 돌아왔다.

달칵-

뒤에서 방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나오느라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칼카타가 대신 닫아준 모양이다.

이윽고.

"······."

"······."

나, 예린, 한세아는 거실에 마련된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내가 훌쩍이는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는 소리와 한세아가 부드러운 천으로 예린의 눈가를 살살 닦아주는 소리만 들리고 있을 뿐.

"현우씨, 지수씨 상태는 어때요?"

한세아가 슬쩍 물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상황을 예린이 부담스러워할까 싶어 입을 연 듯했다.

"오늘 저녁이면 다 나을 것 같습니다. 아까 예린이랑 같이 방 치우고 있을 때 보니까요."

곧장 눈치를 챈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럼 저녁은 좀 푸짐하게 준비해야겠네요. 아, 창고 정리하면서 본 게 하나 있는데 갈비탕 캔이 있더라구요."

"···그게 캔으로도 있어요? 아니, 그것보다 창고에 있었다고요?"

나도 창고를 보지 않은 건 아니건만. 어디 깊은 구석에 숨겨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던데요. 그리고 팩으로도 나왔던 마당에 캔으로 못 나올 것도 없지 않을까요? 오늘 저녁은 그걸로 먹는 게 어때요? 미소 언니 몸보신 할 겸, 간만에 고기도 먹을 겸 해서."

생각해 보니 유통기한이 무려 3년이나 됐었다며 놀라는 반응을 보여 준 한세아는 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예린이는 어때? 질리게 먹은 참치캔 말고, 고기 먹고 싶지 않니? 비록 레토르트이긴 해도 맛있을 거야. 뜨겁게 데워서 밥 말아 먹을까?"

"크응···, 전 좋아요···."

갈비라는 소리에 축 늘어진 꼬리를 간신히 들어 올리며 대답하는 예린. 아이는 결국 자신이 왜 울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염없이 반지를 보고 있는 모습은 왜 울었는지에 대해 짐작하게 만들었다.

나와 한세아는 티 나지 않게 깨문 입술을 숨기며 괜스레 더 신이 난 기색을 유지했다.

***

해가 저물고, 달이 뜨기 시작한 저녁.

나, 지수, 예린, 한세아는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최미소와 칼카타는 아기를 돌보면서 간단하게 먼저 먹었다고 하니 우리만 모여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몫은 충분히 따로 빼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머리 만한 캔에 담긴 갈비탕의 양이 상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배불리 먹어도 남을 정도였다.

"아저씨!"

완전히 회복한 지수가 쌩쌩해진 얼굴로 내게 들러붙었다. 피부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반짝거리는 지수. 스트레스받지 않고 푹 쉰 결과였다.

다만 문제는,

"아저씨, 아기 봤어? 진짜 귀엽더라. 나중에 우리가 만든 아기도 귀엽겠지?"

그 정도가 너무 과하다는 것일까. 지수는 오늘 하루 보지 못한 걸 충당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착 달라붙어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주 그냥 꿀이 뚝뚝 떨어지네요. 이 암캐가···. 뭐? 우리 아기? 진짜 적당히 해야지···. 역시 언니가 말한 대로···."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한세아의 중얼거림에 식은땀이 볼을 타고 흐른다. 한세아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를 빤히 바라보며 계속해서 무어라 중얼거렸다.

분명 그녀의 말을 지수도 듣고 있는 중일 텐데, 지수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꼬리로 내 팔을 휘감았다.

우물우물···

기운을 회복한 예린은 에너지를 소모한 만큼 보충하겠다는 듯 고기를 한가득 입안에 욱여 넣고 있었다. 그러면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는 감상 모드로 접어든 상태. 나를 도와줄 생각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꾸구국-

한세아가 들고 있는 실리콘 국자가 비명을 내지르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중간 부분이 'ㅅ'자로 꺾인 모습이 괴로워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광경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국자야 뭐, 여분이 있으니까···.'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아니,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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