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92화 (293/497)

Chapter 292 - 292. 준비 (1)

어제도 별다른 일없이 안전하게 보내고 난 후인 다음날.

"칼카타, 여기 지도에 동그라미 표시된 장소가 진원지라는 거죠?"

"그래, 확실하진 않고 추정일뿐이지만 가능성은 크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칼카타, 최미소는 지도를 넓게 펼친 거실에 모여 의논을 하는 중이었다. 주로 안개 진원지 탐색과 이동 수단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직 바깥으로 언제 나갈지 정해지지는 않았으나, 이런 건 미리미리 이야기를 나눠서 준비하기 시작해야 언제든 나갈 수 있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만들어진 자리.

지수가 몸을 완전히 회복했고, 최미소도 무사히 출산을 마쳤으니 이제 더 이상 늦장 부릴 시간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들뿐만이 아닌 나머지 사람들도 휴식을 충분히 취하기까지 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금천 소방서라······. 여기 가는 길은 저번에 저랑 칼카타가 갔던 길하고 비슷하네요?"

나는 뉴연세 여성병원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가리켰다. 그나마 다행일까. 칼카타가 안개 진원지로 추정한 곳은 시흥대로를 따라 쭉 올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단순히 도로를 따라 일직선으로 이동하면 되는데다가 도로 또한 좁은 골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길이 막힐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래, 그렇긴 하지. 다만 문제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부터다. 진원지까지는 어찌어찌 도착한다고 해도 그 이후에 빠르게 이동해야만 하니까."

칼카타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동안 의도치 않게 경계선을 그어 주고 있었던 안개가 사라지게 된다면 경계선 바깥에 몰려 있던 온갖 괴물들이 안쪽으로 밀려들어올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덧붙였다.

최미소가 세상이 안전해질 때까지 이곳에서 버틸 수 없는 것이 그런 이유였다.

세상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안개 구역을 벗어나야 했고, 안개 구역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원지를 없애야 했으며, 진원지를 없애면 안개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외부의 나무 인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테니까.

"그럼 여기 안양천에 고무 보트 띄워서 한 번에 슝 하고 가는 게 좋긴 한데···. 아저씨, 물이 다 말라 있어서 그건 안 된다고 했지?"

"어, 저번에 칼카타가 돌을 던져 봤는데 그냥 바싹 마른 소리만 들려오더라. 여러 번 확인했으니 그건 확실해."

"기껏 보트가 있어도 쓰질 못하니 좀 아쉽네···."

귀를 쫑긋거리며 한숨을 푹 내쉰 지수는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자전거 타고 갈까요? 그게 걷는 것보다는 빠르긴 하니까."

"그거 타면 우리 식량은 어떡해요? 다 못 가져가잖아요."

"애초에 다 가져가기는 무리야, 예린아. 너무 많잖니? 최대한 챙기긴 하겠지만, 버릴 건 버려야지. 아니면 자전거 뒤에 리어카라도 연결해서 끌고 가던가."

한세아와 예린이 각자 의견과 궁금한 점들을 말하거나 물어보고 있을 때.

"그냥 차 타고 가죠?"

최미소가 곤히 잠든 아기의 볼을 만지며 말했다.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해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안개 진원지를 없애니까 안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고, 그럼 차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있잖아요.

가장 큰 문제는 배터리인데 그건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미리 여분의 차량용 배터리에 충전시킨 다음에 점프하면 돼요.

충전은 예전에 제가 만들다 만 저소음 무한 동력 발전기가 있으니 그걸로 하면 되고요. 차량이야 뭐, 배터리만 충전시키면 어떻게든 굴릴 수 있으니까 지상에 있는 것들 중에서 제일 괜찮아 보이는 거 주워 오면 끝!

"

최미소의 말에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칼카타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저소음 무한 동력 발전기? 그런 게 있습니까?"

나는 발전기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저번에 칼카타가 자기 아내는 손재주가 좋다고 말한 적이 있긴 해도 그런 걸 만들 수 있을 정도까지 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냥 손 좀 풀 겸 만들어 본 거예요. 거의 다 만들어 놓고 안 썼지만요. 그도 그럴게, 어차피 전기를 충전해도 쓰려면 남편 피가 있어야 했으니까요. 겨우 전기 조금 쓰겠다고 피를 왕창 낭비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만들다가 말았어요. 그래도 지금 상황 보니까 어느 정도 만들어두기는 잘한 것 같네요. 이제 관련 부품들을 구하기 힘들어졌으니 말이에요."

그녀의 말은 내가 신경을 쓰고 있던 부분이었다. 단순히 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걸 쓰기 위해서는 필수로 따라붙어야 하는 부가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안개가 지상에 짙게 깔린 덕분에 수리산에서 보았던 전기를 머금은 요정을 찾을 수가 없기도 했다. 예린이 다룰 수 있는 건 바람 정도에 불과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한 점들 탓에 배터리를 충전시켜서 사용한다는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건만. 최미소는 어렵지 않다는 듯 손쉽게 해결책을 내놓았다.

"완성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요?"

아직까진 최미소와 데면데면한 사이인 지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얼마 안 걸려요. 마음먹고 다시 만들기 시작하면 하루도 안 걸릴 걸요? 진짜 완성 직전에 그만둔 거라서요. 대신 완성보다는 그게 오래 걸릴 거에요. 배터리 충전 시키는 일이요. 아무래도 기름으로 돌아가는 발전기가 아니다 보니까 한 번에 만들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거든요."

"저희가 휘발유 구해와서 발전기 돌리는 건 불가능한가요?"

지수는 세상이 한창 좋았을 때는 기름으로 돌아가는 발전기도 저소음으로 나온 제품이 많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발전기라···.'

나도 유튜브에서 몇 번 본적이 있었다. 알고리즘이 대체 무엇인지 이리저리 영상을 따라가다 보니 관심도 없던 공구를 리뷰하는 영상이 틀어졌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한 기억을 떠올려 봤을 때, 확실히 세상이 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편리성을 증대시킨 소형 발전기들이 많이 나왔다는 지수의 말은 사실이기는 했다.

"저도 그게 아쉬워요. 거의 자동화된 발전기들이 수두룩하게 있었을 텐데 그걸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는 게요. 지금 저희가 있는 아파트 말고는 대부분 폭격에 맞아서 아마 지상에 가도 멀쩡한 걸 구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발전기를 따로 만들려고 했던 거거든요."

"아···."

"초반에는 식량을 구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발전기를 미처 챙기지 못한 것도 있지만요."

최미소는 괜스레 뿔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흠, 기름용 발전기는 있다고 해도 김지수 네가 말한 저소음으로 나온 제품이 아니라면 못 쓸 거다. 소음이 엄청 크게 나니까. 그리고 소음은 불필요한 위험을 불러오지. 그러니 너무 아쉬워 말아라."

그리 말한 칼카타는 소음은 조상님이 막아주냐는 말을 농담을 던졌다.

"지금은 우리가 조용하게 지내니 괴물들이 이끌리지 않는 것이지 괴물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특히 지안이가 울고 말 거다. 조용히 해야 한다."

험상궂은 외형에 어울리지 않게 지안이에게 우쭈쭈를 하는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터졌다. 그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 다들 킥킥 웃기 시작했다.

"일단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각자 할일하러 흩어집시다. 미소씨는 나중에 몸 더 나아지시면 그, 발전기 한번 손 봐주십쇼. 부탁하겠습니다."

나는 박수를 작게 쳐 이목을 끌었다. 아침 회의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목적지와 이동 수단을 간단하게나마 정해졌으니 이제는 창고를 정리할 시간이었다.

***

하루 종일 창고 물자를 정리하느라 찌뿌둥해진 어깨를 풀고 있을 때.

"이현우, 바쁜가?"

칼카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잠시 흘깃 뒤를 돌아보다가 나를 불렀다.

"아뇨. 1차 분류는 다 끝나서 이제 좀 한가합니다. 왜 그러세요?"

내가 고개를 저으면서 한 말에 그는 뒤에 숨기고 있던 술을 꺼냈다. 초록색 병이 희미한 달빛을 반사시킨다. 소주였다.

"시간 괜찮다면 술이나 한잔 하지. 어쩌면 오늘이 술을 마실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는 데다가,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마셔 보겠나?"

"어······."

맑게 찰랑이는 술이 담긴 병이 살살 흔들리는 모습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러고 보니 술을 입에 대지 않은지 얼마나 되었던가.

원래 술을 막 좋아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기에 그동안 힘들고 신경이 쓰인 건 아니었지만, 막상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혹한 건 사실이다.

그의 말마따나 술을 마실수 있는 기회가 흔한 것이 아니기도 했다. 술이 없어서 못 먹는 이야기가 아닌, 술을 먹고 난 후가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사방에서 목숨을 노려오는 와중에 술에 잔뜩 취한다는 건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으니까.

'근데 여긴 안개 덕분에 괴물들이 거의 없잖아.'

그러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평소와 달리 조금 더 마음을 편히 놓아도 되는 환경이었다. 그 말인즉슨, 하루 정도는 숙취에 고생하면서 쉬어도 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그럴까요? 아니, 그럽시다!"

그리 생각한 나는 빠르게 판단을 마치고서 곧장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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