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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293화 (294/497)

Chapter 293 - 293. 준비 (2)

나와 칼카타가 술을 들고 식량 창고로 향하고 있을 때.

···쿠르릉······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후둑- 후두둑-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 수 있는 빗소리와 함께.

'어후, 습기가 장난 아니네.'

비가 내리는 양상이나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진한 습기 냄새를 맡아보니 이번에 내릴 비는 약하지만 오래 내릴 듯했다.

"칼카타, 근데 갑자기 왠 술이에요?"

나는 코를 간지럽히는 비내음을 맡으며 칼카타에게 물었다. 그가 술 한잔 하자고 해서 혹한 마음에 일단 따라왔으나, 마음 한구석에선 의아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마셔 보겠나? 그리고 술을 마시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거지. 물론, 주변 상황을 잘 살펴봐야 하지만 말이야."

칼카타는 아내에게 아기가 들어서고 나선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가 이제서야 한번 마셔본다는 말을 덧붙였다. 지구 바깥에서 왔다고 해도 역시 유부남이라는 건지 아니면 칼카타만 유별난 건지 몰라도 아내를 끔찍이 생각하는 그였다.

"그럼 다 같이 모여서 마시는 건 어떻습니까? 기왕 마신다면요."

"이미 다 물어보고 오는 길이었다. 다들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더군. 이현우 너마저 사양하면 어쩌나 싶었건만. 그게 아니라서 참 다행이야. 혼자서 마시면 적적하지 않은가. 달도 보이지 않아서 특히 더 궁상맞게 마셨겠지."

"아쉽네요. 술자리는 좀 시끌벅적한 편이 좋은데."

지수는 후각이 예민하니 술 냄새를 싫어했을 것이고, 예린이는 아직 어리니까 안 되고, 최미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남은 사람이라고는 한세아뿐인데, 그녀 또한 사양했다고 하니 아쉽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이윽고.

끼익···

우리는 안주가 사방에 널린 식량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필이면 비가 오는 날이라 창고 내부는 어두웠다.

그러나 완전히 보이지 않는 편은 아니었다. 혹시 몰라 손전등도 가지고 왔으니 필요할 때 키면 될 것 같았다.

"자, 어차피 여기 있는 것들 전부 가지고 갈 수 없으니 이제 아낄 필요 없다. 먹고 싶은 건 원하는 만큼 가져오도록."

칼카타는 창고 안 물자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동할 때 챙길 수 있는 물자의 양은 한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평생 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버려 두고 가야 하는 물자의 양이 상당했던 것이다. 예전에 한세아가 모텔 거점을 버리고 나를 따라왔을 때처럼 말이다.

까득-

나는 우선 술부터 깠다. 안주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닌데, 벌써부터 급하게 챙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한 잔 받으십쇼, 칼카타."

"고맙군."

칼카타가 내민 잔에 채워지는 맑은 술. 뒤이어 그가 내 잔을 채워주는 걸 끝으로 우리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크으···."

식도를 타고 넘어가면서 생기는 화끈함과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역한 알코올의 향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요 몇 개월간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더니 고작 한잔에서 취기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특히 비가 와서 그런가. 잘못하다간 몸이 한 번에 훅 갈 것 같았다.

"지구의 술은 거친 맛이 없어 아쉬워. 깔끔해서 마시는 게 편하긴 하다만."

"후우···, 그 거친 맛이 뭔진 몰라도 막상 그 술 마시면 지금 이 술이 더 생각날 걸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킬킬 웃은 나와 칼카타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잔을 나누면서 한동안 대화없이 술만 들이켰다.

한잔 마시고, 땅콩 하나 주워 먹고.

다시 한잔 마시고, 과자 하나 주워 먹고.

그렇게 이어지는 상황들 속에서.

"···이현우. 저번에 네가 말했던 지렁이 변종. 아직 기억하고 있나?"

먼저 입을 연 것은 칼카타였다.

"그럼요. 잊을 수가 없죠. 그렇게 커다란 걸 봤는데요. 왜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내 고향의 이야기다. 고향에서 전설로 취급되던 이야기지."

"전설? 그게 지렁이 변종하고 관련이 있습니까?"

"글쎄. 확신은 서지 않지만 비슷한 구석이 있기는 한 것 같아서 이야기를 꺼낸 거다. 크고 긴 몸체, 땅을 파고드는 습성, 대지를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는 능력. 이런 점들이 비슷하더군."

"대충 말만 들어 보면 그냥 제가 말한 지렁이 변종이랑 특징이 똑같네요."

"다만, 확연히 다른 특징도 있다. 칠흑 같은 비늘, 날카로운 독니. 이런 것들은 네가 말한 지렁이 변종의 특징에 맞지 않지."

"비늘이랑 독니요? 그건 지렁이라기 보다는 뱀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요?"

나는 머릿속으로 지렁이와 뱀을 같이 떠올렸다. 둘의 전체적인 외형은 비슷할지 몰라도 세세하게 파고들어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뱀이라···.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그걸 보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는 그 존재를 이렇게 불러왔다. 죽음, 이라고."

칼카타는 취기에 붉어진 얼굴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는 살아남았으니 이야기가 후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또 한 가지의 특징이 기억나는 군. 그것은 한번 포착한 걸···."

"······? 왜 말을 하다가 말아요. 사람을 화나게 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아니, 아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뭔가 황급하게 대화를 마무리 짓는 느낌에 의아한 눈으로 칼카타를 바라보았으나, 결국 그는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계속 기다려도 내가 원하는 답을 해주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칼카타. 저 칼카타에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습니다."

잔을 채워주며 이번에는 내가 입을 열었다. 말해야지, 말해야지 생각만 했던 이야기였다.

"의왕시 캠프에서 사람 한 명을 만났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들어 보니 그 사람, 귀가 길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름은 엘트라라고 했습니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요?"

"알고 있다. 네가 그 귀쟁이를 만났다는 건 널 보자마자 알았었어. 네 심장에 귀쟁이 특유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니까."

"···왜 말 안 했어요? 일부러 숨긴 건 아닌데···."

나는 그의 대답에 흠칫 놀랐다가 이내 수긍했다. 칼카타는 나를 보자마자 내 심장 속에 있는 조각을 알아차렸던 사람이다. 그러니 심장의 상태를 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터다.

그러나 괜스레 정보를 숨긴 상황이 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슴도 콕콕 찔렸고.

"네가 부담스러워 보였으니 말이다. 네가 말하면 듣는 거고, 아니면 묻히는 거지. 본디 이야기란 그런 것이니."

"······."

"엘트라를 언급했다는 건 이제 말할 준비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겠다. 이번에는 내가 묻지. 그 귀쟁이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있었나?"

엘트라가 입자로 화해 죽기 전에 했던 말들은 하나같이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던 지라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무슨 말을 해도 괜찮으니 말해 봐라."

그런 내 표정을 본 칼카타는 표정을 진중하게 바꾸며 내 빈 잔에 남은 술을 모조리 털어냈다.

술병에서 맑은 술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은 어서 자기처럼 입을 열어 속에 담긴 걸 모조리 털어내라며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다.

- 세상을 망하게 만들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죄인이 아니면 누가 죄인인가!

- 나는! 우리는! 세상을 이렇게 만들려던 게 절대로 아니었어!

- 실패했다, 실패했다실패했다, 실패했다!!

- 차라리 실험이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고향에서 그냥 죽었더라면···.

- 우리는 살고 싶었어! 죽음이 가득해진 고향을 등지고서라도! 비참하게라도 목숨을 유지하고 싶었다!

- ······우리는 역병이었어.

엘트라의 처절한 외침은 아직 내 뇌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덕분에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묵묵히 답을 기다리고 있는 칼카타를 보며 내가 들었던 말들을 하나씩 꺼내 말해주었다.

심한 고문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는 것과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외쳤던 말들.

그리고 내 심장 속 조각을 인지하자 짧게나마 제정신으로 돌아왔었다는 이야기까지.

***

"허, 일이 그렇게 된 건가···. 틀린 말은 아니군. 우리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어. 너희에게는 미안함뿐이야."

"그게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납니까. 지금 세상이 이렇게 된 건 어느 한 쪽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어요. 알잖아요, 칼카타도."

"머리 아픈 이야기는 질색이다. 그냥 미안하다. 내 고향을 지키지 못해서. 네 고향을 이렇게 만들어서."

"아니···."

"내 사과를 받아다오. 그래 주겠나."

나는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너무 늦었고, 책임을 나눌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굳이 책임을 따지자면 졸린사 연구소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리고 사과를 받을 이들은 내가 될 수 없었다. 진정으로 사과받아야 할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용서를 구할 사람들은 이제 없다.

책임을 질 사람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시간 또한,

얼마 남지 않았다.

"저번에 병원에서 했던 말 기억해요? 그 말 다시 한번 할게요. 절 도와줘요, 칼카타. 같이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어요."

"···그래. 내 마지막까지 널 지키며 도울 것이다. 그러니━콜록! 콜록콜록!"

"칼카타!"

나는 갑작스레 거센 기침을 토해내는 칼카타를 보며 벌떡 일어났다. 잔뜩 취한 몸을 강제로 일으키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돌았다.

"괘, 콜록! 콜록! 괜찮다. 괜찮아···."

"괜찮기는 뭐가 괜찮습니까! 지금 기침을 이렇게 하는 게 한 두 번도 아니고 제가 직접 본 것만 해도 세 번을 넘어가잖아요!"

"그냥 술 마시면서 사레가 좀 들렸을 뿐이야."

"그놈의 사레 타령은 질리지도 않아요?"

"콜록! 그게 사실인 걸 어떻게 하나. 대전사는 거짓을 말하지 않아."

칼카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그가 말한 대로 정말 사레가 들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몸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천으로 두른 무언가나 연구소 봉쇄를 풀 수 있는 방법 같은 대화 거리가 아직 남았건만. 이건 어쩔 수 없이 잠시 뒤로 미뤄 놔야 할 듯했다. 대화를 이어가기에는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그리 생각한 내가 술자리를 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어허! 벌써 가는 건가? 자자, 그러지 말고 내가 한 곡조 뽑아볼 테니 구경이나 하도록. 너도 아는 노래일 거다. 크흠!"

칼카타가 어깨동무를 하며 행동을 막았다. 단단한 근육질이 목에 감기자 숨이 턱 막힌다.

"아, 뭔 갑자기 노래예요. 이제 슬슬-."

"비 내리는 호남선~."

술병을 거꾸로 잡은 칼카타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구수하게 뻗어졌다.

그리고.

"···남행 열차에···."

잠이나 자러 가자고 말하려는 시도 마저도 무심코 이어서 흥얼거린 가사에 막히고 말았다. 무의식적으로 따라 부른 것이다.

어렸을 적, 고속 도로 휴게실에서 불법 트로트 노래를 질리도록 들었던 기억이 어른이 된 지금에서도 남아 있을 정도로 영향이 컸던 모양이다.

"큭. 크하하하핫!"

한 소절도 채 부르지 않은 칼카타는 나도 모르게 가사를 따라 부르는 내 모습을 보고 웃느라 여념이 없었다.

"흐흐, 으하하핳!"

그를 보며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 또한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에 잠식당해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뜬금없이 노래를 부른다길래 뭔가 싶었건만. 갑자기 예전에 유행했던 트로트를 부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지구 바깥에서 온 칼카타가 말이다.

지금 바깥에 비까지 내리는 상황이라 더욱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술기운 탓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것일까. 칼카타를 걱정하고 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 보이지 않고, 잔뜩 신이 난 채 술병을 흔드는 내가 있었다.

쏴아아아아···

비록 둘밖에 없는 술자리였으나, 소리만큼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에 못지 않았다. 다행히 왁자지껄한 소리들은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에 대부분 막혀 사라졌다.

노래를 한바탕 뽑아낸 나와 칼카타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그때.

끼이익···

내 후방에 있는 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잠을 자지 않고 있는 건 나와 칼카타뿐이어야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수고했어요, 칼카타."

뒤이어 들리는 한세아의 목소리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고개를 돌려 뒤를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취기가 몸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얼. 나는 별로 한 것도 없다. 그냥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주고 받았을 뿐이지. 이제 남은 건 네 몫이다."

얼굴이 붉어져 딸꾹질하는 칼카타가 킬킬 웃으면서 답했다. 노래가 주는 여운에 취한 그는 오징어 다리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어댔다.

"그게··· 아니, 지금 둘이서 무슨··· 말을···."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이해하기 전에, 눈꺼풀이 닫혔다는 말이 옳은 표현이었다.

그렇게 시야가 암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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