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4 - 294. 준비 (3) -한세아
계획 실행 하루 전.
달칵-
미소 언니가 있는 방 안에 들어온 나는 곧장 머리를 싸매고 주저앉았다.
"아아악······."
사정 없이 흔드는 머리를 따라 단발이 찰랑이며 볼을 간지럽힌다. 허나, 고작 간지러움 따위로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해소할 수 없었다.
'뭐? 다음은 나라고? 진짜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기껏 당당하게 다음은 나니 뭐니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게 현 상황이다.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가장 아픈 건 가슴이었다.
자괴감에 몸부림을 치고 나니 뒤이어 분노 어린 슬픔이 찾아온 것이다.
나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처음은 근사한 곳에서 하자고 했으면서,
하더라도 일이 다 끝난 다음에 하자고 했으면서.
그날 달빛 아래 입맞춤을 통해 서로에게 약속을 깊게 새긴 줄 알았었는데, 그건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물론, 현우와 칼카타에게 이런저런 이유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야속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다못해 미리 언질이라도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밤새 그 소리를 듣지 않았어도 됐잖아···.'
아니, 사실 듣지 않으려면 듣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 소리에 몸이 굳었고, 다음에는 계속해서 울리는 신음 소리에 몸이 굳었다.
'이 암캐년이···.'
취소. 년이라는 말은 좀 심하니까.
'이 암캐가···.'
설마 하니 발정기가 왔을 줄 누가 알았겠나. 사람에게 발정기가 찾아오다니 세상이 참 요지경이었다. 게다가 이성을 유혹하는 페로몬이라니.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이어 나가는 와중에 문득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암캐가 생리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 한 번쯤은 봤어야 했는데 말이다.
'나는 매일 알로 나오니까 안 하는 거였는데, 암캐는 발정기 때문에 생리를 안했던 거였어···.'
자기 마음도 솔직하게 표현할 줄 모르는 것 같아 내가 앞서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이제는 격차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수준까지 차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냥 기회가 있을 때 잡아 먹었어야 했다. 그 점이 너무 후회가 된다. 지금까지 참으라고 해서 잘 참았는데 일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래도 지수씨도 모르고 있었겠지···.'
애써 그리 생각한 나는 빠른 회복을 도와주는 보양식이라도 만들어서 먹여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어차피 미소 언니 챙길 겸 해서 같이 만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정신이 드니?"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미소 언니가 보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방에 들어오고 나서 한 행동을 전부 지켜본 모양이다.
"···다 봤어요?"
"그럼. 처음부터 다 봤지. 그리고 애초에 여긴 내 방인 걸. 근데 무슨 일이야.?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했네."
"언니이······."
웃음기를 지우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미소 언니에게 울상을 지으며 걸어갔다. 긴장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렸다.
"미안, 나 때문이니?"
"아뇨, 언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
"그럼? 아, 이야기하기 전에 나 사과즙 하나만 가져다주면 안 될까? 아직 움직이기는 힘들어서."
미소 언니는 곁에 둔 아기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지안이는 세상 모르고 푹 자고 있었다.
"알았어요. 즙 먹기 전에 죽이라도 한 숟가락 드시는 건 어때요? 미역 듬뿍 넣고 끓였는데."
"지금 먹으면 게워낼 것 같아. 미안해. 기껏 힘들게 끓여줬는데."
"괜찮아요. 여기요."
아쉽지만 속에서 받지 않다고 하니 억지로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남은 죽이야 상하기 전에 칼카타나 현우에게 처리하라고 하면 될 일이고.
쪼옥- 쪼오옥···
미소 언니는 빨대가 꽂힌 사과즙 팩 하나를 순식간에 비웠다. 이건 입에 맞나 보다. 그럴 줄 알고 미리 하나를 더 준비해 둔 팩을 바로 건넸다.
"여기요."
"···고마워. 그래서 무슨 일이니?"
민망한 얼굴로 옅게 웃는 미소 언니.
"아, 그게···."
나는 어제 새벽에 있었던 일과 방금 칼카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이야기 중간중간 말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목이 타는 듯 팩을 갈아치우는 건 덤이었다.
***
"그렇구나···. 그렇게 된 거구나···."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미소 언니. 언니는 잠시 속으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세아야. 임신은 쟁취하는 거야. 다른 누군가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황새가 물어다 주는 게 아니라는 거지. 그리고 저기를 봐. 뭐가 보이니?"
미소 언니가 가리킨 창문 너머에는 안개가 넘실거리고, 폐허로 변한 도시의 풍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언가 어려운 답을 원하는 건 같지는 않아서 그저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말했다.
"어···, 망한 세상?"
"그래! ···그래! 세상이 망했어. 세상이 망했는데 뭘 망설여? 여기서 우리가 더 잃을게 있어? 가지고 싶으면 갖는 거지. 내가 그랬듯이!"
순간적으로 커진 목소리에 지안이가 미간을 찌푸리자 미소 언니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목소리를 줄였다.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고 덮쳐. 그 다음은 분위기가 알아서 해 줄 거야. 현우씨도 세아 너한테 마음이 있다고 했잖아. 이러면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지."
"······그런가요?"
"그런가요? 가 아니라 그렇구나! 라고 해야지."
"그렇구나!"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니 말대로 내가 여기서 뭘 더 잃어야 하는가. 이미 우리는 많은 걸 잃었는데. 나는 이제 하나라도 더 잃고 싶지 않았다. 특히 현우가 그러했다.
"그래도 불안하면 이거 줄게."
"언니, 이건 줄이잖아요."
"내가 예전에 만일을 대비해서 가져다 둔 거야. 일단 가져가. 쓸지 안쓸지 몰라도 필요할 때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
미소 언니는 망설이는 내 손을 잡아당겨 줄 한 묶음을 올려 두었다. 원래 용도가 무엇이었을까. 손바닥 위에 올려진 줄의 무게가 생각보다 묵직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기는 무슨! 후회하지 말고 마음먹은 걸 해. 이런 세상에서는 매 순간이 아까우니까. 만약 거부하면 그냥 뚝배기를 깨버려. 뚝배기 말고 다른 것도 괜찮고. 망치 줄까?"
"그건 진짜 괜찮아요···. 망치보다는 주먹이 편해요."
"······그건 예상 못했던 답이네. 세아는 내가 말해주기도 전에 알아서 잘했겠다."
눈을 휘둥그레 뜬 미소 언니는 소리를 죽인 웃음을 토해냈다.
바로 그때.
끼이익···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눈치를 보며 들어온 사람은 칼카타. 그의 손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여보! 이리 와요."
"크흠, 큼. 배는 안 고픈가?"
"세아가 이것저것 챙겨줘서 배는 안 고파요."
"그, 고맙다. 한세아."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금니를 긁적이는 칼카타.
"칼카타, 왜 말 안 해줬어요···."
나는 그에게 원망스러운 중얼거림을 날렸다. 칼카타가 처음부터 언질이라도 줬다면 이렇게까지 허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리 말해주지 못한 건 미안하군.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다. 수인의 발정기는 원하는 씨앗을 품기 전까지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행사 같은 거니까. 그리고 그 과정은 상당히 고통스럽다고 알고 있다."
"결과를 누가 몰라요. 그래도 과정만큼은 달라질 수 있었잖아요."
"여보, 멀찍이 떨어져 있지 말고 여기 와서 혼나요."
"안 혼나는 건 없는 건가···? 아니, 알았다. 갈 테니까 그렇게 보지 좀 말도록. 꿈에 나올까 무섭다."
두 여자의 시선에 기가 죽은 칼카타는 서둘러 침대 근처로 다가왔다. 그는 곤히 자는 아기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다가 표정 관리를 했다.
"계속 혼나기 전에 제안을 하나 하겠다. 내가 사과의 의미로 자리를 마련해주지."
칼카타는 내가 입을 열기 전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요? 막 위험하거나 그런 건 싫어요."
미소 언니에게서 줄을 받아 든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내가 생각해서 행동한 것과 남이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확연히 다르지 않은가.
"그런 건 전혀 아니야. 아직 이현우에게 말은 하지 않았으나 내일 밤에 술자리를 가질 생각이거든. 거기서 술을 왕창 먹이기만 할 뿐이다. 네가 허락한다면 말이다. 어때, 위험한 일인가?"
"여보, 그거 그냥 당신이 술 마시고 싶은 거 아니에요?"
"어허! 나는 진실로 한세아를 돕고 있는 거다. 내가 엎지른 물을 수건으로 닦고 있는 중이지.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닦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너무 많이 마시지만 마요. 걱정돼. 가뜩이나 당신 몸··· 아녀요. 알아서 잘하리라 믿을게요. 그래도 되죠?"
"그럼. 걱정하지 마라."
미소 언니와 칼카타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나는 곰곰이 생각을 이어 나갔다.
방금 칼카타가 제안한 건 만취가 된 현우를 내 마음대로 가지고 놀라는 뜻이겠지. 그 과정에서 내가 현우를 어떻게 만지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내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그렇게 해도 잠에서 깨지 않는 현우를 내 마음대로?'
쿵쿵거리기 시작하는 심장 소리에 무심코 침을 꼴깍 삼켰다. 벌써 내 머리에는 온갖 상상이 스쳐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대부분 빨간 딱지가 붙여야만 하는 상상이었다.
"좋아요. 내일이라고 했죠?"
"그래, 내일이다. 준비는 내가 하겠지만, 그 외 나머지는 네 몫이다, 한세아. 그리고 내 부족은 임신한 사람을 처음으로 친다. 선후 순서에 상관없이 말이다. 게다가 전쟁통에서 애는 생긴다고 하더군. 후회할 일을 남기지 마라."
자기가 있었던 부족에서는 애를 먼저 가지는 자가 승자라며 칼카타는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표정이 징그럽다며 미소 언니에게 한대 맞았다.
"큭-, 어째 갈수록 손이 매워지는 것 같아. 아무튼 기회는 내일 밤이다. 명심해. 아, 나중에 내 부탁하나 들어줬으면 좋겠군. 어려운 일은 아니다."
"부탁? 뭐, 알았어요."
내가 주머니에 들어 있는 줄을 만지작거리며 답하는 것과 동시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될까요?"
이어서 들리는 현우의 목소리.
"네, 들어오세요!"
미소 언니는 나와 칼카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무언의 신호를 보낸 후, 문밖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 살짝 큰 목소리에 다시 미간을 찌푸린 지안이를 품에 안아 달랬다.
척-
말없이 엄지를 척 내세운 칼카타의 모습에 나도 현우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엄지를 세워 보였다.
계약 성립이었다.
***
하루가 지난 다음날 저녁.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 열차에~."
나는 칼카타와 현우가 술자리를 가진 창고 문 밖에 서 있었다. 창고 안에서는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트로트가 들려왔다.
쏴아아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상황이라 저런 트로트를 부르는 것인지. 뜻밖에 목소리가 좋아서 어울린다는 생각에 무심코 작게 웃을 뻔했다.
그리고 나를 웃게 만드는 건 곧 내 손에 들어올 현우였다. 칼카타와 이야기를 미리 마친 대로 노래가 끝나고 5분 정도 뒤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끝이었다.
그렇게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함께 노래가 끝난 뒤.
끼이익···
나는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괜스레 차오르는 긴장감에 손이 달달 떨렸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떨리지 않았다.
"···수고했어요, 칼카타."
인사불성이 된 채 벽에 기대앉아 있는 현우의 모습에 나는 칼카타에게 엄지를 척 세웠다.
"무얼. 나는 별로 한 것도 없다. 그냥 서로 하고 싶은 말들을 주고받았을 뿐이지. 이제 남은 건 네 몫이다."
칼카타는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어 대며 킬킬 웃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건지. 가까이 가니 술 냄새가 확 풍긴다.
"전 이만 현우 데리고 가 볼게요. 정리 부탁해도 될까요?"
말없이 손을 휘적거리는 칼카타.
나는 다시 한번 엄지를 척 세워준 다음에 현우를 업고 다른 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몸이 들린 현우는 무의식적으로 나를 뒤에서 안았다.
"···히힣."
등에서 느껴지는 현우의 체온에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으면서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그와 동시에 줄을 꺼내 들어 현우의 손목을 묶기 시작했다.
줄이 조금씩 조여 들수록 현우는 답답함을 느끼는지 몸을 뒤척였다. 순간 조금 불쌍한 마음이 들었으나 마음을 다잡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된다. 그걸 누가 모르나.
하지만 먼저 잘못한 건 현우다.
나는 참았는데.
약속 하나만 믿고 계속 기다렸는데.
왜 나만 안 돼?
왜 나만 또 참아야 해?
암캐가 잘 기다려서 상을 받았으면, 나도 지금까지 잘 참았으니까 상 줘야 하잖아.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나만 나만 나만 나만 나만 나만 나만 나만?
'···그래, 이러면 안 돼.'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다시 한번 속으로 중얼거림이 퍼졌다. 다만, 이번에는 그 방향이 달랐다.
꽈악-
현우의 손목을 밧줄로 단단히 묶는 것에 박차를 가했다.
조금 세게 묶은 듯싶었지만, 그래도 처음은 좀 무서우니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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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에 들어갈 삽화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