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297화 (298/497)

Chapter 297 - 297. 한세아 (3)

"어흑···."

나는 잠결에 느껴지는 욱신거림에 눈을 떴고, 곧장 신음을 내뱉었다. 온몸에서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던 까닭이다. 멀쩡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허리를 조금 뒤틀면 바로 뚜둑거리는 뼈 소리가 이어졌다.

설마하니 어제 한세아와 몸을 섞다가 기절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 확실했다.

퓨즈가 끊긴 것처럼 기억이 온전하지 않았고, 후반부의 기억이 날아간 상태였으니 말이다.

대자로 뻗어진 팔에서 저릿함이 느껴지길래 무의식적으로 들어 올리려고 했으나, 무언가가 내 팔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간신히 옆으로 돌리니, 새근새근 자는 한세아가 보였다. 그것도 얇은 이불로 몸만 겨우 가리고 있는 한세아가.

순간적으로 팔이 저린 것도 잊은 채, 자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간혹 무언가를 먹는 것처럼 입을 오물거리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불현듯 떠올려지는 기억 하나.

'···또 피임을 안 했어······.'

처음에야 아무것도 모르고 싸질렀다고 해도 피임 도구를 끼지 않은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도 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쯤 되면 그냥 고의나 다름없지 않은가. 비록 중간에 훼방을 놓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나를 놓아주지 않았느니, 남자를 도발했느니, 나를 바라보는 그녀들의 모습에 넘어가고 말았느니 하는 변명은 말 그대로 변명일뿐이었다. 밀어 내려면 어떻게든 밀어낼 수 있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지수는 임신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불행인 건 세아가 아직 어떨지 모른다는 것.

확정이 되지 않은 앞날을 걱정하고 있을 그때.

"······몇 개야. 이게 대체."

창문을 통해 넘어온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쿠션이 내 시선을 끌었다. 정확히는 그 위에 놓인 알들이었다.

분명 어제만 해도 알은 하얬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일반적인 계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체적인 방의 모습을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칸 3개짜리 목재 서랍장, 서랍장 위에 올려진 쿠션, 쿠션에 담긴 알들, 귀여운 병아리 캐릭터가 그려진 벽지.

지수가 홀로 시간을 보냈던 방이 아닌, 다른 구석 방이었다. 어쩐지 어제 하루 동안 뭔가 바쁘게 준비하더라니.

병아리가 그려진 벽지가 이곳에 있을리도 없고. 손으로 하나하나 그려서 거사를 치를 방을 나름대로 귀엽게 꾸민 모양이다.

내가 로맨틱이나 낭만적인 방이 좋다고 한 걸 기억해서 한 행동이리라.

"진짜 미안하게···."

가슴을 콕콕 찌르는 묘한 감정에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다시 내렸고, 어느새 스르륵 눈을 뜬 한세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힣. 현우씨이······."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조용하게 히히 웃으며 내 다리 위에 자기 다리를 올렸다. 말랑한 허벅지가 다리를 누르고, 좀 더 거리가 좁혀진 덕분에 그녀의 가슴이 형체를 잃어 뭉개졌다.

"그, 세아씨.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말을 들은 한세아는 조금 더 자고 싶은 모양인지 다시 눈을 감았다. 작게 도리도리 치면서.

"으응···, 아침에 일어나서 만나면 저한테 해 줘야 할 거 있었잖아요···. 빨리 해줘요···. 해주면 일어날게요."

말투는 반말에서 다시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해 줘야 할 것?'

수줍은 얼굴로 무언가 바라는 모양새에 나는 필사적으로 굳은 머리를 돌렸다. 뭔진 몰라도 내가 그것들을 해주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태세였다.

나와 한세아 사이에서 침묵이 조금씩 길어질수록 나를 바라보는 한세아의 눈은 점점 죽어 갔다.

'뭐지? 뭘 해야 하지? ······아.'

그런 그녀의 시선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한 건 당연한 수순. 식은땀을 훔치는 것도 못한 채, 계속해서 한세아가 원하는 말과 행동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머릿속으로 기억을 이리저리 굴렸다.

한세아가 태도를 이리 나오는 것은 분명 어제 기억과 관련이 있을 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떤 기억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안아 주면서 사랑한다고 말해줍니다···.'

'주변에 누가 있든 간에 상관없이 바로 키스 박고 시작합니다···.'

'내가 보이면 무조건 뒤에서 끌어안아 줍니다···.'

바로 어제 한세아가 나를 묶어두고 귓가에 속삭였던 말들이었다. 나는 손을 불끈 쥐려는 걸 간신히 참고서 일단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꽈악-

"어···사랑합니다···?"

한세아가 베고 있는 팔을 굽혀 그녀를 끌어안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는 상태에서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으려니 말끝이 불안정하게 올라간다.

"왜 뒤에 물음표가 붙어요?"

그 부분을 바로 지적하는 한세아. 그녀는 아직 뭔가 더 남았다며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사랑합니다···!"

그녀를 좀 더 강하게 끌어안은 나는 다시 한번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입술을 살짝 맞대었다. 부드럽고 말랑한 한세아의 입술이 내 입술에 의해 살짝 밀려났다.

쪼옥-

아침부터 진한 키스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가볍게 입술만 부딪치고 끝나는 버드 키스.

"하아···, 저도 사랑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세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입술을 떼어냈다. 볼에 달라붙은 적색 머리카락도 같이 떼어냈다.

그녀는 내 손을 자기 가슴팍으로 이끌며 만지고 싶으면 만지라는 말을 했으나, 나는 간신히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여기서 자극을 더 받는다면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풍만한 가슴을 손으로 주물럭거리면 그 순간은 좋겠지. 허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지금 내 상태로는 몸이 달아오른 한세아를 막을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비록 처음에는 졌더라도 두 번째부터는 이겨야 하지 않겠나.

그러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뭔가 새벽에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 있었는데 이상하게 확 와 닿지 않네요. 지금 저랑 현우씨가 이렇게 나란히 누워 있는 것도 그렇구. 그것도 이불 한 장으로 몸만 가리고서."

내심 아쉽다는 듯 나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한세아. 그녀는 어쩔 수 없다며 뒤로 물러났다.

한세아와 한 침대에서 누운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같이 누워도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었으니까.

지수와 몸을 섞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세아와 몸을 섞은 건지. 그동안 참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빠른 진도였다.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아니.'

꿈으로는 알았다. 현실이 될 줄 몰랐을 뿐이지. 곁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이 지금 내가 눈을 뜨고 있는 이곳이 현실이라는 걸 다시금 자각시켜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감되는 현실감은 미약했다.

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아, 어제 말하긴 했지만, 그때는 현우씨가 못 들은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말할게요."

한세아가 까먹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는 듯 불쑥 입을 열었다.

"······? 무슨 말이요?"

내 물음에 한세아는 장난스러운 기색을 얼굴 한가득 띠우더니 숨을 작게 들이켰다.

그리고.

"야, 이현우. 내가 이긴 거다?"

상체를 조금 일으킨 뒤, 내 귀에 속삭였다. 그녀는 입을 가리며 킥킥 웃었다.

"아니, 허. 참."

뭐라 반박하기 위해 곧장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온몸의 욱신거림에 그대로 도로 누울 수밖에 없었다. 뼈 마디마디에서 뚜둑 소리가 크게 나는 건 덤이었다.

···그래, 내 패배였다.

아주 명확한 사실이었다.

***

나와 한세아가 얇은 이불 아래에 숨어 음흉한 손장난을 치고 있을 때.

"세아씨, 혹시 저거··· 다 유정란입니까···?"

나는 잠시 숨을 돌리며 제발 아니라는 대답을 바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현재 눈에 보이는 알만 일곱 알. 보기에는 일반 계란과 별반 다를 바가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니던가.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긴 해도 만약 저 알들이 비정상적으로 쑥쑥 커져서 아기가 태어난다면 나는 일곱 아이의 아빠가 되는 셈이다.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한 것이 없는데 애 아빠가 되는 건 너무 일렀다.

'그렇다고 싫다는 말은 또 아니지만···.'

조금 수가 많긴 해도 내가 어떻게든 책임을 지면 되는 일이다.

"헤엑··· 헥···. 걱정 하지마요. 아쉽지만 다 무정란이에요. 확인해 봤어요."

한세아는 유정란과 무정란을 구별하는 방법이 따로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녀는 잔뜩 낳은 무정란으로 계란 파티를 열 수도 있겠다며 실실 웃었다.

"현우씨도 아쉽겠어요. 우유 못 마시게 되어서."

"아니, 크흠! 그나저나 이제 잠도 다 깼으니 나갈까요?"

나는 민망한 이야기에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 전에 간단하게 세수하고 나가요. 지금 다른 사람들이 현우씨 얼굴 보면 제가 그렇게 만든 줄 알 거 아니에요."

아직 밝은 대낮에 맨몸을 보여주기는 부끄럽다며 이불 아래에서 꼬물꼬물 움직여 옷을 입은 한세아. 그녀는 방 한 켠에 마련된 거울을 가리켰다. 거울에는 눈가가 퀭한 내가 비쳐지고 있었다.

"···세아씨가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뭐라고요?"

"아뇨, 아닙니다···."

대번에 꼬리를 내린 나는 마저 옷을 챙겨 입고, 시키는 대로 수건에 물을 적셔 얼굴을 꼼꼼하게 닦기 시작했다.

이윽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끝마친 나는 침대에 걸쳐 앉아 한세아를 바라보았다.

"아! 현우씨. 못 일어나겠어요···. 허리 아파요···. 안아줘요."

허리를 잠깐 두드린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고개를 살짝 내리며 팔을 뻗어왔다.

알을 잔뜩 낳아 유난히 잘록 하게 된 허리에 착 달라붙은 나시티가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얼른 안아달라며 팔을 살살 흔들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한세아를 살며시 안아 들었다. 품에 들어온 그녀는 안정감을 느끼는 듯 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한세아를 데리고 거실로 나오니,

"패배한 망아지가 왔구나."

칼카타가 내 모습을 보며 킬킬 웃어댔다.

"놀리지 마십쇼···. 아니, 잠깐.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했어요?"

"패배한 망아지라고 했다. 그러게 내가 뭐랬나. 앞날이 훤하다고 하지 않았나."

뭐가 그리 당당한지 음흉한 웃음을 숨길 기색도 없이 어금니를 긁는 칼카타의 모습에 나는 이번 사건의 뒤에도 칼카타가 있었음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에라이!"

그와 동시에 목에 둘러진 수건을 그에게 던졌다.

나는 칼카타에게 또 당했다.

어쩐지 갑자기 술을 권하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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