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9 - 299. 다시 준비 (2)
끼리리릭······
칼카타가 페달을 밟을 때마다 인버터에 따로 붙어 있는 계기판의 바늘이 움직인다. 전기가 제대로 생산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바늘의 움직임이 불안정했다.
"지금 배터리 충전되고 있는 거 맞죠?"
나는 바늘처럼 불안정한 마음을 담아 물었다.
"으음···. 충전은 되고 있을 거예요. 그게 눈곱만큼 적어서 그렇지. 그래도 이게 최선이예요. 그나마 안개에서 벗어나서 이 정도니까. 안개 속에서는 바늘이 눈곱만큼도 안 움직였을 걸요?"
최미소는 머리에 난 뿔을 긁적이며 답했다. 그녀는 다른 계기판과 주변에 놓인 유리병을 확인해 보더니 지금 이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재 자전거 발전기 근처에는 전기를 생산하고, 생산한 전기를 보관하기 위한 여러 장비들이 놓여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칼카타의 피가 담긴 유리병이었다. 이게 없다면 시작도 못했을 테니까.
물론, 근처에 나나 한세아와 지수의 푸른 조각이 있으면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병들이 놓여 있는 까닭은 칼카타가 이미 만들어 둔 건 써야 하지 않겠냐며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뭐, 아무튼 현우씨 배터리는 어떻게든 충전되고 있으니 걱정 하지마시고, 나갈까요? 이제 저희 할 일 해야죠."
"아, 네."
"여보, 아까 빨리 페달 마구 밟으라고 한 건 장난이었어요. 지수씨 올 때까지 쉬고 있어요, 알았죠? 괜히 심술 부려서 미안해요."
"괜찮다. 너를 이해한다."
최미소는 방을 나서기 전, 칼카타에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멀뚱멀뚱 서 있는 나를 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칼카타는 어서 안 나가고 뭐 하냐는 듯 나와 최미소를 향해 손을 휘적거렸다.
"······하아, 갈게요. 생각 바뀌면 꼭 말해 줘요. 꼭이에요. 꼭!"
그런 그의 손짓에 한숨을 작게 내쉰 최미소는 무언가 당부하는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그녀는 어서 따라 오라며 내게 눈짓을 보냈다.
나는 앞서 나간 최미소에게 서둘러 따라 붙었다.
방을 나서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칼카타는 어째서인지 조금 지쳐 보였다.
***
식량 창고.
"어제는 제가 온종일 누워 있어서 잘 몰랐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정리하셨네요?"
최미소가 절반 이상 분류가 된 창고를 둘러보기 시작하면서 한 말이었다.
"딱히 분류라고 할 것도 없었어요. 그냥 유통기한이 길게 남은 것들이랑 짧게 남은 것들로 나누기만 한 것뿐인데요."
"그게 말은 쉽죠. 양이 꽤 많아서 힘들었을 텐데."
나는 그녀의 말에 딱히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머리만 긁적였다. 대신 허리를 숙여 바닥에 널브러진 크래커 한 봉지를 주웠다. 어제 옮기면서 떨어졌던 모양이다.
그 뒤로, 나와 최미소는 어제 못다 한 창고 정리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아직 힘을 쓰는 일을 하지 못하는 최미소였기에 그녀는 주로 리스트를 보면서 하나씩 어떻게 처리할지 체크하는 일을 맡았고,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거운 물자를 옮기는 일을 맡았다.
그렇게 유통기한이 임박한 것들을 오늘 먹을 식량으로 빼 두고 있을 때.
"어?"
최미소가 탄성을 내질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살짝 떨어진 구석에 있던 나는 그녀의 소리가 들리자마자 황급히 달려갔다. 몸에 무슨 이상이 생겼을까 걱정이 되었던 까닭이다.
"아, 아뇨. 놀라셨어요? 죄송해요."
"···어디 아프다거나 그런 건 아니시죠? 그럼 됐습니다."
다행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걸을 수 있을 정도까지 몸이 회복되었다고 해도 그건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 속은 아직 휴식이 필요한 상태일 수도 있었으니까.
기본적으로 출산 후 일주일은 절대적으로 안정이 필요한 시기였고, 2주부터 6주까지 몸 관리해야하는 시기였으니 말이다.
아무리 푸른 입자로 회복력을 올렸다고 해도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건 본인이 말하지 않는 이상 모르기도 했고.
"근데 뭐 이상한 거라도 보셨습니까?"
"아하핫···. 그, 제가 예전에 숨겨 놓은 꿀 한통을 발견해서···."
멋쩍게 웃은 최미소는 사람 머리 크기만 한 꿀 단지를 가리켰다. 큼지막한 유리병 안에는 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 꿀이네요?"
그걸 본 순간, 나도 무심코 탄성을 내뱉었다. 꿀은 고열량에 적당한 수준으로 섭취하면 몸에 좋은 효과를 주는 식품이지 않은가.
비록 수분이 많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건 솔직히 단점도 아니었다. 물은 그나마 제일 구하기 쉬운 편에 속했으니까.
"완전히 깜빡 잊고 있었지 뭐예요? 이거 챙기기 전에 오늘 저녁에 다 같이 모여서 꿀물이라도 한 잔씩 할까요?"
컵을 들어 마시는 시늉을 하는 최미소.
"저야 좋죠. 그럼 일단 꿀은 문 근처에 따로 두겠습니다."
그녀의 제안에 반색한 나는 냉큼 꿀 단지를 들어 옮겼다. 투명한 기를 띠는 황색의 꿀이 묵직했다. 사탕보다 몸에 좋은 꿀을 먹은 예린이 방방 뛰는 모습이 벌써 눈에 선했다. 달달한 걸 좋아하는 아이이기에 꿀도 엄청 좋아하겠지.
꿀을 가져다 놓고 다시 돌아온 나는 아직 불안한 마음이 남아 있어서 이번에는 최미소 근처에서 분류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바로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현우씨, 여기서. 그러니까 안개 구역에서 벗어나면 바로 위로 올라갈 거잖아요. 맞죠?"
묵묵히 일하고 있자니 입이 심심한지 최미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시선은 리스트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거기서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현우씨 개인적인 생각으로요."
"···글쎄요. 단순히 예상을 말하는 것도 쉽지 않네요. 위쪽이 어떤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고 있어서."
내가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냐라는 시선을 던지자,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앞으로 통조림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통조림이라고 만능이 아니니까요. 지금까지 만들어진 통조림의 수는 제한되어 있고, 그중 절반 이상이 인간이 더 이상 못 먹게 되고 있겠죠. 지금 이 순간에도요."
칼카타와 지금은 없는 그의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구해 온 통조림. 눈 앞에 가득 쌓인 그것들로는 당장은 살 수 있겠지만, 그것이 평생 먹고 살 정도는 아니긴 했다.
최미소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마저 다 떨어지면 인간은 무엇으로 버텨야 할지, 뭘 먹고 살며 하루하루를 버텨낼지가 생존에 직결되는 큰 문제가 될 거예요."
그녀는 통조림 내부에 잘 자라는 세균이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의 문제 또한 점점 커질 거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재건을 성공하지 못한다면 인간에게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라···.'
최미소의 말이 맞았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연구소로 들어가 사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뭉쳐 문명을 재건하기 전까지는, 아니, 재건하고 나서도 앞으로 계속해서 살기 위해서는.
자급자족을 해야 한다. 비축된 식량은 갈수록 줄어만 가고, 그 식량은 결코 무한하지 않았으니까.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식이었다. 옷은 대충 누더기라도 입고 다니면 되고, 잠을 잘 곳은 어떻게든 구석진 자리에 숨어 잠을 청하면 된다. 하지만 먹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숨만 겨우 내쉬다가 죽기만 할 수 있을 뿐.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칼카타의 말에 따르면 세계수가 완전히 폭주하기까지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당장은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이 순간은 영원하지 않았다.
이런 일상을 오래도록 누리기 위해서는···.
"······남산 근처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는 몰라도 우린 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십쇼, 미소씨."
우리 인간은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앞날이 어떻게 된다고 해도 저는 살아가는걸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요. 지안이를 위해서라도."
최미소는 머릿속을 잠식한 잡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녀의 머리에 난 뿔도 이리저리 흔들려 허공에 선을 그었다.
뒤이어 들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추지 않겠다는 그녀의 중얼거림. 거기에는 굳은 다짐이 깊게 새겨지고, 또 새겨지고 있는 중이었다.
서울로 진격한 군인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여기서도 보이는 세계수 근처에는 지형이 어떻게 변했을지.
그곳에서는 또 어떤 위험한 변종들이 자리를 잡고 있을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허나, 미지가 무섭다고 해서 걸음을 멈춘다면 뒤따라 오는 어둠에 잡아먹히는 결말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커다란 입을 찢어져라 벌린 채.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하리라.
마음이 돌덩어리가 얹힌 것처럼 무거워진 나는 그리 생각하며 무거운 물자들을 쉬지 않고 옮겼다.
***
그렇게 고된 일을 전부 마치고 창고 밖으로 나오니, 내가 가져다 둔 꿀 단지가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범인은 예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