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0 - 300. 다시 준비 (3)
"360도 돌아가면 뭐가 바뀌는지 아나?"
"아무것도 안 바뀌잖습니까. 그냥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건데."
"그래, 네 말대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허나, 그 흔적이 남는다. 무의미한 행동이라는 건 없어. 무엇이든 원인이 있다면 결과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뭔가 있어 보이는 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약 지금 칼카타가 자전거 페달을 밟아 발전기를 돌리고 있는 중이 아니었다면 감탄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 봐라. 헉, 전기가-, 생기지 않나···!"
"···이제 교대할까요?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요."
"아니! 나는 대전사다! 고작··· 고작 이 정도에 굴복하지는 않아···!"
칼카타는 눈을 부릅뜨며 처절하게 외쳤다. 거센 외침과 다르게 몸에는 점점 힘이 빠지고 있는 그였다.
그가 온 힘을 짜내 페달을 쌩쌩 돌릴수록 인버터 계기판의 바늘은 전기가 안정적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 또한 상태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현재는 칼카타가 페달을 밟고 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안장에 앉아 페달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칼카타가 어째서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금 되돌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점심에서 아침으로 말이다.
***
창고 정리를 마치고 난 다음날 아침.
이제 오늘이 된 아침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나, 지수, 예린, 칼카타, 최미소가 한창 아침 식사 준비하고 있을 때.
"···저 할 말이 있어요."
가만히 보글보글 끓고 있던 냄비를 보고 있던 한세아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입을 연 순간에도 말하지 말까 하는 고민이 새겨져 있었다.
"뭔데요?"
마침 그녀의 옆에 있던 내가 한세아의 말을 받았다.
"···안 나왔어요."
"네?"
"···알이 안 나왔어요."
"···네?"
내가 멍청하게 되묻는 소리에 근처에 있던 일행의 시선이 순식간에 집중된다. 그들은 프라이팬에 계란을 부치고 있거나, 소금을 푼 물에 계란을 삶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각자 들고 있는 도구를 놓친 상태였다.
···탁-
실리콘 국자나 집게 따위들이 조용하게 바닥에 떨어진다.
"항상 매일 새벽마다 배를 간지럽히는 느낌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 느낌이 없었어요. 당연히 알도 안 낳았구요."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 무슨 말···?"
"모르겠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겠죠···?"
걱정스러운 얼굴로 배를 쓰다듬는 한세아. 그녀는 이내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어떠한 생각에 머리가 하얗게 변한 상태였기에 별다른 말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언니, 그거 혹시 임신한 거 아니예요? 아니면 미리 알을 많이 낳아서 그렇다던가."
나 대신 지수가 추측을 내놓았다. 지수는 아침 식사로 만들어지고 있는 알들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오직 나 혼자 먹어야 하는 알들. 엊그제 한세아가 낳은 알들이었다.
칼카타가 단언하기를 새와 합쳐진 수인들이 낳은 알들은 유정란만 아니면 미식의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알들이 어떤 과정에서 낳아졌는지 알고 있는 일행들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먹기를 거부한 상황.
예린이마저도 '이건 좀···.'이라며 난색을 표했으니 말 다 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임신?'
중요한 건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린 지수가 말한 임신이라는 단어였다. 비록 추측일 뿐이었지만,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었으니까.
후두둑-
일행이 따로 먹을 아침을 만들고 있던 냄비 안에 내가 들고 있던 불린 미역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와 동시에 내 혼도 쏙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피임 도구없이 싸질러서 생긴 상황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걸 인지한 나는 입에 자물쇠가 채워진 것처럼 입이 꾹 다물렸다.
스윽···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한세아 앞으로 따뜻한 꿀차를 내밀었다. 어제 예린이가 포란을 하는 것처럼 품고 있던 꿀 단지의 꿀로 만든 것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정난 것이 없건만. 벌써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고, 그중 비중이 가장 큰 것은 한세아의 몸 상태였다.
"만약 임신이면 조금 더 서둘러야겠네. 아닌가? 임신 초기면 더 조심해야 하나?"
지수가 팔짱을 끼고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한세아는,
"아니, 아직 모르잖아요···. 어떻게 될지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그냥 숨기고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미리 말한 거예요···."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녀는 자기 때문에 일정에 영향이 가는걸 바라지 않는다는 말을 곧장 덧붙였다.
"일단 계획대로 움직여요. 아까도 말했듯이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고, 임테기를 써서 결과를 확인한다고 쳐도 2주를 기다려야 한단 말이에요. ···혹시 몰라서 미소 언니가 준 테스트기 미리 써봤는데 나온 결과는 당연히 한줄이었구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 이것이 한세아가 내놓은 답이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괜스레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일단···."
그리 생각한 내가 천천히 말을 꺼내자, 잠자코 말을 기다리고 있던 지수, 예린, 한세아, 칼카타, 최미소의 시선이 다시금 집중되었다.
"일단 아침 먹고, 조금만 더 이동을 서두르는 걸로 합시다. 지수야, 너 오늘 밖에 나가서 쓸 만한 차 찾아본다고 했지?"
"응."
"그래,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몸 이상하면 바로 올라와서 숨 돌려. 아무리 푸른 조각이 있다고 해도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알았어. 걱정 하지마, 아저씨."
지수는 어느새 준비가 다 된 아침밥을 우물우물 거리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갑작스러운 한세아의 발언에 처음에는 놀란 듯했으나, 금세 평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미역 줄기를 옴뇸뇸 씹으면서 공동 육아니 뭐니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미소씨는 어제 고생 많이 하셨으니까 오늘은 몸조리에 집중해 주시고요. 칼카타는 저랑 같이 배터리 충전하러 갑시다."
"알았다."
나는 연이어 일행에게 오늘 각자 해야 할 일을 말해주었다. 강제가 아닌 부탁. 다행히 그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린이는 세아씨랑 같이 방에 있으면서 지안이 좀 돌봐줘. 할 수 있지?"
"네···!"
"마지막으로 세아씨. 아직 모른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걱정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세아씨는 일단 놀란 몸을 진정시키면서 상태를 지켜봐주십쇼."
"그, 놀라지도 않았고, 오늘 할 일이 좀 있는데···."
"부탁합니다."
"······알았어요."
한세아는 내 얼굴을 보더니 마지못해 수긍해주었다. 그녀는 괜히 말을 꺼내서 일을 크게 만들었다며 투덜거렸으나, 내가 조용히 손을 잡아주자 한세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짝!
이어지는 내 박수 소리를 끝으로, 지수, 예린, 한세아, 칼카타, 최미소는 각자 맡은 일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현 상황에 맞지 않게 입안에 남은 삶은 계란은 고소하기만 했다.
***
그런 일이 있는 아침이었기에 우리는 이동을 조금이라도 더 서두르기 위해 배터리 충전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칼카타."
칼카타와 교대한 나는 안장에 앉아 페달을 밟으면서 그를 불렀다. 바퀴가 돌아가자 계기판의 바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 그러나?"
"칼카타는 어땠어요? 미소씨가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 때요."
"조금 생소한 기분이었지. 허나, 그건 기분 좋은 생소함이었다. 내 아이가, 내 후대가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릴 예정이라는 말이었으니까."
잠시 회상하는 얼굴을 만든 칼카타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너는 어떤가? 물론, 아직 뭐라 말할 수 없는 단계이기는 해도 한세아가 말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 있지 않나."
"저는 음···. 이거 뭐, 이상하게 말로 표현이 안 되네요. 그냥 좀 신기한 느낌이었어요. 처음에는 '와 진짜?' 이런 생각이 들다가 나중에는 '만약 임신이면 아기 이름은 뭘로 하지?' 부터 시작해서 내 자식이 커가면서 사춘기가 왔을 때 나한테 틱틱거리면 어떡하지, 요즘 교육은 또 어떻게 시켜야 하나, 공부도 좀 잘했으면 좋겠는데, 골고루 안 먹고 편식하면 어쩌지, 내가 정말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내가 몇 명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이어지다가 마지막에는 다 큰 자식이 결혼해서 손자 낳는 상상까지 들더라구요."
"······좀 유별나긴 하군."
칼카타는 땀을 훔치고 있던 손수건을 멈칫거렸다. 그는 이내 킬킬 웃어 대며 자식이 부모한테 시달릴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크흠, 그런가요? 근데 저번에 연구소가 봉쇄되었다고 했잖습니까. 그 문 제가 열 수 있을까요?"
괜스레 민망한 기분이 든 나는 화제를 돌렸다. 솔직히 나도 조금 주책맞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고, 주제를 더 이어 나가기에는 가슴이 많이 간질거렸다. 대단한 이야기를 나눈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한 번쯤은 물어봐야 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기껏 앞까지 다다랐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낭패인 상황도 없지 않은가.
"너는 열 수 있다. 어디까지나 출입 권한이 삭제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이야기지만. 연구소를 봉쇄한 것이 네 누나라고 추정되고 있는 이상, 아마 네 권한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지. 그러니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지금은 기억을 잃은 나보다 연구소 구조를 더 잘 아는 칼카타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리 믿으며 페달을 더욱 열심히 돌렸다.
"그럼 연구소 구조는 어떻게 됩니까? 증폭기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아, 그 부분은 내가 나중에 말해주겠다. 머릿속에 기억하는 구조도를 옮겨 놓은 게 있거든. 그거랑 같이 보면서 설명- ···아니, 그 구조도를 보면 된다. 어렵지 않아."
"······?"
나는 묘하게 말의 흐름을 돌리는 칼카타에게 의문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바로 그때.
"콜록! 콜록!"
뭘 보냐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칼카타가 급하게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토해냈다. 거센 기침이 내뱉어질 때마다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핼쑥해졌다.
"칼카타!"
"괜-콜록! 괜찮아! 호들갑 떨 필요 없다! 그냥 옆에 있는 물이나 좀 다오."
손을 휘휘 저으며 내 접근을 막은 칼카타.
"여기요···!"
"후우···. 좀 낫군. 이현우 너는 이제 나가 봐라. 배터리도 이 정도면 충분히 쓰고도 남을 정도니까."
내가 곧장 내민 생수를 벌컥벌컥 마신 칼카타는 뭐라 할 새도 없이 나가라는 축객령을 내렸다.
"서두르기만 하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은 푹 쉬어 둬라. 이제 쉴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나는 나가라고 했다."
"어어? 칼카타! 칼카타!"
힘이 어찌나 강한지. 나는 칼카타가 내 어깨를 잡고 미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조금 전에 격한 기침을 토해낸 사람이 내는 힘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
칼카타에게 내쫓기 듯 거실로 나오는 것과 동시에 하얀 가루로 범벅된 지수가 보였다. 그녀는 임시 승강기에서 막 나온 참이었다.
"아저씨!"
그녀는 눈을 찡그리며 귀에 묻은 가루를 털어내고 있다가 내가 보이자 부리나케 달려오려고 했다. 그러기 직전에 지금 자기 꼴을 보고선 멈춰 섰지만 말이다.
"잠깐 쉬러 올라온 거야?"
"아니! 일 다 끝냈어! 여기 앞에 지하 주차장이 있더라고. 거기 입구만 무너졌지, 내부는 생각보다 멀쩡하더라. 그 덕분에 차도 금방 구할 수 있었어."
다행히 머지않은 곳에서 상태가 멀쩡한 차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지수. 근처의 백골로부터 차 키를 얻었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의 표정은 씁쓸하게 변했다.
"임시 승강기 앞으로 끌고 왔으니까 이제는 차 내부만 청소하면 돼. 그럼 바로 출발할 수 있어. 배터리는 어때?"
"어, 배터리도 문제없어."
"근데 아저씨,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좀 안 좋은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칼카타가 있는 방문이 닫히기 직전, 그가 내게 했던 말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이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허나, 내가 나온 직후에 기침 소리를 들은 최미소가 방 안으로 들어갔으니 상태가 조금 나아지리라 믿었다. 안개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상태가 조금 나아지리라 믿었다.
정확히는 그리 믿고 싶었다.
나는 지수에게 답을 주는 대신 고생을 많이 한 그녀의 귀를 마구 주물러 주었다.
"헤윽···."
귀에 묻은 가루를 털어내주는 사이에 얇은 피부를 곧게 펴주자 지수는 앓는 소리를 냈다. 아직 가루를 다 털어내지 못한 꼬리가 붕붕 돌아가면서 가루를 사방으로 흩날렸다.
잘했냐는 듯 머리를 살짝 앞으로 내밀고 있었기에 무언가 바라는 게 있나 싶었건만. 귀를 만져 주는 것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휙휙-
꼬리털에 달라붙어있던 하얀 가루들이 덧없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내일이구나.'
그래, 드디어 내일이 안개 구역에서 벗어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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