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02화 (303/497)

Chapter 302 - 302. 시작과 끝 (2)

지수와 한세아가 뒤에서 밀고, 나와 칼카타가 앞에서 견인 고리에 연결한 줄을 잡아당기자,

덜그럭-

즈즈즈즈···

한차례 흔들린 픽업 트럭. 차량은 이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동안 잠들어 있던 바퀴가 도로 위로 굴러가면서 자잘한 각종 파편들이 말려 들어간다.

"아저씨! 뒤에서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 칼카타도요!"

하얀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지수의 외침.

"알았어!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그녀에게 답을 되돌려주고는 시선을 다시 전방으로 향했다. 차량에 여러 물자가 실리고, 뒷좌석에 사람도 타게 되니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이 매우 묵직했다.

특히 푸른 입자를 사용하지 못하는 탓에 더욱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이 고생이 끝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소방서까지만 끌고 가면 그 뒤부터는 배터리를 교체한 차량으로 편하게 앉아서 탈출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그때를 위한 고생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현재 나, 지수, 한세아, 칼카타가 흘리는 땀이 달콤한 과실로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휘이이이-

붕괴된 건물의 단면을 타고 흐르는 바람 한줄기가 지상에 가라앉은 하얀 가루들을 밀어낸다. 그렇게 밀려난 안개는 언제 자리를 비켜줬냐는 듯이 순식간에 빈자리를 다시 메웠다.

'···안개의 도시.'

예전에 칼카타가 말했던 이 도시를 부르는 명칭. 도시를 뒤덮은 이 하얀 가루들은 소화제였다. 우리가 이 도시에서 지내면서 몇 가지 한 간단한 실험을 통해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비록 열을 감지하지 않아도 눈에 띄는 형태이고, 그 수가 비정상적으로 많다는 특징만 제외한다면 영락없는 소화제 가루였다.

불을 잠재우는 소화제.

살아 있는 것을 잠재우는 하얀 가루.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고 하던데, 분말로 이루어진 하얀 안개가 도시를 뒤덮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후욱-, 후욱···."

정화통 주변에 뭉쳐진 가루들을 툭툭 털어낸 나는 차량을 이끄는 것에 박차를 가했다.

바로 그때.

"이현우. 너에게 힘을 다루는 법을 알려 준다고 했었건만, 정신 차리고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고 말았군."

칼카타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한 치 앞도 알아보기 힘든 전방을 향해 있었다.

오늘따라 말을 걸기 힘든 분위기에 그에게 말을 걸어볼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마침 칼카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 주어서 다행이었다.

"뭐, 괜찮습니다. 간간이 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 줬잖아요."

나는 잽싸게 그의 말을 받았다.

임시 거점에서 같이 생할하면서 칼카타가 틈이 날 때마다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고, 힘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 조언해주었던 것을 떠올리면서.

태산같이 고정한 하체와 적에게서 떼지 않는 눈으로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적을 노려라.

칼카타가 내게 바란 것은 쉽다면 쉬운 일이지만, 기본이 없다면 이룰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단기간에 무언가를 제대로 배운다는 건 힘든 일. 그러나 아직 앞으로 배울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나는 그리 믿고 있었다.

"그리고 칼카타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요. ···맞죠?"

확답을 바라는 물음으로 말을 이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는 건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해 줄 말은 이것뿐이다. 작은 힘에 취하지 마라. 너는 분명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을 다룰 수 있어. 항상 집중해라."

칼카타는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자기 말을 이었다. 그는 내 상태를 고무 호스로 빗대어 설명했던 이야기에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너와 내가 다루는 힘의 계통은 너무나 달라서 확실하게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네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의심치 말고, 믿음을 가지고 한 걸음 내디디라는 것."

"···무엇을 믿고요?"

"믿음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 믿음이 향하는 방향이지. 가족, 친구, 동료, 형제, 희망, 미래, 너 자신. 네가 무엇을 믿든 간에 상관없이 네가 향하는 목적지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칼카타는 그 말을 끝으로, 등에 매인 것을 잠시 바라보았다. 천으로 둘러싸진 막대기였다. 예전에 그가 자기 미련이라고 말한 물건이기도 했다.

"칼카타는요? 칼카타가 믿는 곳의 끝에는 뭐가 있습니까?"

"세상."

-내 가족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리 답한 칼카타는 내 말에 멀리, 아주 멀리 있는 곳을 바라보는 듯 고개를 들었다. 방독면에 가려져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네가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증폭기가 있지. 저번에도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 이계인은 증폭기를 제작하면서 염원을 담았다.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미래, 고향에서 도망친 우리라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말이다. 그러니 내게는 네가 희망이군. 이제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건 너뿐이니."

"······."

무거운 말이었다.

내가 반드시 연구소에 들어가서 오염되어 폭주한 세계수를 막을 것이라는 건 이전부터 해 오던 다짐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칼카타가 이곳에 온 이래로 그의 부족원들을 하나씩 잃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물론 이런 세상에서 소중한 이들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게 낯선 이의 경계선을 넘는 순간부터는 확 와닿는 느낌의 역치가 달라지지 않은가.

이번에도 그런 경우였다. 비록 많은 시간을 보내진 못했어도, 칼카타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미 타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최미소도 마찬가지다.

나는 숨을 돌릴 겸, 우리가 얼마나 이동했는지 알 겸 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짙은 안개가 주변을 메우고 있다고 해도 아예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 주변의 특징을 파악하는 걸 쉬어서는 안 되었다.

'···난간이 있는 걸 보니까 안양천 위구나.'

지금 우리 일행은 안양천 위의 다리인 금하로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저씨! 잠깐만 세울 수 있어? 아니다, 차는 세우지 말고, 나 잠깐만 천 좀 보고 올게!"

나처럼 안양천 위를 지나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지수가 차체를 툭툭 두드리며 신호를 보냈다.

"어어, 갔다 와. 앞 잘 안 보이니까 조심해서."

"응!"

지수는 잽싸게 난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손에는 자잘한 돌멩이들이 들려 있었다. 돌을 던져 안양천의 수위를 확인할 셈인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휙! 휙!

손바닥만 한 돌멩이들이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간다. 허공에는 작은 구멍들이 뚫렸다가 사라졌다.

따악-!

···푹!

이어서 들리는 같은 돌멩이들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흙에 돌이 박히는 소리. 나와 칼카타가 확인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물이 바싹 말라 있나보다.

"씨이···."

지수는 기대하고 있던 첨벙 소리가 들리지 않자 애꿎은 난간에 발길질을 했다. 텅 소리를 낸 철제 난간은 억울하다는 듯이 몸을 떨어댔다.

그녀는 차량 위에 얹어진 고무 보트를 바라보다가 차량 뒤편으로 움직였고, 다시 픽업 트럭을 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뒤에서 차량을 미는 지수에게서 짙은 아쉬움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지수씨, 너무 아쉬워 마요. 고무 보트도 당장은 못 쓰더라도 나중에 쓸 일이 생기겠죠."

"그래도···."

지수와 한세아는 서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도란도란 나누면서 차량을 밀었다.

나와 칼카타는 묵묵하게 밧줄을 잡아당겨 차량을 앞으로 이끌었다.

휘이이이이···

다리의 영역이 끝나면서 주변에는 서서히 폐허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뉴연세 병원으로 가면서 한번 봤던 길이라 그런가. 풍경이 생각보다 눈에 익숙하게 다가왔다.

끼이익-

뒤이어 도착한 시흥 사거리. 트럭이 향하는 방향을 좌측으로 꺾어 시흥 대로로 진입했다. 이제부터는 방향을 틀 필요도 없었다.

그저 5차선의 넓은 도로인 대로를 따라 쭉 올라가면 될 일이었으니까.

우리는 뒷좌석에 타고 있는 최미소, 지안이, 예린의 상태를 한번 더 확인한 후, 괜찮다는 신호를 받고 나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나간다.

무너진 희명 병원이.

지나간다.

깨진 유리창에 비친 구름처럼 하얀 안개가.

지나간다.

쓰러진 교회 첨탑이.

보인다.

안이 텅 비어 버린 전차가.

보인다.

하얀 가루가 소복이 쌓인 백골이.

보인다.

생기가 하나도 없는 거리가.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렇게 얼마나 이끌었을까.

흡사 감옥 같은 외관을 가지고 있는 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일하게 몇 개 있는 유리창문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구멍이 송송 뚫린 철판으로 막혀 있는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 건물은 우리의 목적지인 금천 소방서였다.

"생각보다 금방 왔군."

칼카타는 여기까지 조용히 온 것만 해도 운이 좋은 거라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나는 반쯤 붕괴된 소방서를 눈에 담았다. 이곳이 안개의 진원지가 맞는지 건물 주변에는 유독 짙은 안개가 맴돌고 있었다.

"계획대로 합시다. 세아씨는 아래에서 대기하시면서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주시고, 지수랑 칼카타는 저와 함께 안쪽으로 진입해서 진원지를 없애고 돌아오는 걸로."

지수, 한세아, 칼카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기지개를 켜 굳은 몸을 푼 우리는 지수를 선두로 조용히 건물 앞에 나란히 섰다.

그와 동시에.

[119 금ㅊ 소방○]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군데군데 비어 있는 글자 간판과 눈처럼 내리는 하얀 가루들이 그런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어서.

어서 들어오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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