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04화 (305/497)

Chapter 304 - 304. 시작과 끝 (4)

신이시여,

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뜨거운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후욱-, 후욱-."

이도윤은 얼굴을 감싸고 있는 공기호흡기 면체에서 공급되는 차가운 공기로 심호흡을 했다. 그가 이제 들어가야 할 곳은 불타고 있는 단독주택. 정확히는 주택들이 모여 있는 단지였다.

원체 노후화가 진행된 주택이라 불길이 한번 옮겨 붙으면 끄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화재는 일어난 상태. 동료없이 혼자서 화재를 진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불길을 이기지 못한 건물이 주저앉기 전에 먼저 고립된 요구조자를 구해 내야 했다.

화르르륵!

불길이 끝을 모르고 타오른다.

콰아아앙! 쾅!

퍼-어엉!

그가 달려 나가고 있는 와중에도 주변에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건물이 붕괴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직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눈을 뜬 직후부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바로 그때.

'정신 차려라, 이 자식아.'

'그래, 지금 뭐 하는 거냐? 움직여야지!'

'도윤이 감 다 죽었네···.'

'임마! 이도윤! 상황 파악은 나중에 하고 일단 움직여라!'

보이지 않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래, 서울이 불바다가 되고 있는 이유는 조금 나중에 알아봐도 된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어째서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는지.

그것들 전부 말이다.

'···그러니까.'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떠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누구 있습니까!! 들리면 대답하세요!!"

이도윤은 그리 생각하며 무거운 다리를 문 턱 너머로 옮겼다. 평범한 가정집으로 보이는 내부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녹아내리고 있는 플라스틱, 금이 쩍쩍 갈라진 가구들, 균열이 생긴 전자제품들, 불타고 있는 커튼, 허공에 떠다니는 붉은 불씨.

그리고.

"케헥! 사, 살려, 주세, 요···."

앞으로 쓰러진 방문 너머로 연신 기침을 내뱉고 있는 사람 하나. 중년의 여성은 이미 연기를 많이 들이킨 듯 제 몸을 가누기 힘들어 보였다.

"······!"

이도윤은 곧장 불길을 넘어 요구조자에게 접근했다. 인기척을 느낀 여성은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이내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도윤아, 우선 공기 마스크부터.'

'여기서 연기를 더 마셨다가는 위험하다.'

'여분의 공기통 들고 온 거 없냐?'

알고 있어.

이도윤은 일단 자기 면체를 여성에게 씌워주었다. 꺼질 듯 가냘프던 여성의 숨은 맑은 공기가 주입되자 조금은 안정적으로 변했다.

콰르르륵···

뜨겁게 달궈진 천장의 타일이 형편없이 무너져 내린다. 노후화된 건물은 서서히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크흐윽···."

얼굴을 연기와 열기로부터 보호해주고 있던 마스크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열기가 기도를 고통스럽게 자극했다.

이도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어깨에 이고 있는 요구조자와 함께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허억···, 허억···."

고작 이제 한 사람을 구해 냈을 뿐이건만. 벌써 차오르는 숨과 떨리는 팔다리가 야속했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는데 한순간에 변한 세상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윽고.

"흐으···."

"여기는 안전합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마시고 가만히 대기하십쇼!"

이도윤은 금천 소방서 안에 이름 모를 여성을 눕혔다. 주변에 그나마 멀쩡한 건물은 지금 그가 있는 소방서뿐이었다.

통화가 되지 않아 구급대에 연락도 불가능,

소방서에 남아 요구조자를 보살필 대원들도 없고,

어째서인지 차량에 시동이 걸렸다가 엔진이 꺼지기를 반복했다.

쾅! 콰쾅!

퍼어엉-!

소방차를 끌고 나가면 좀 더 효율적으로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테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는 포격과 폭격에 이도윤은 동선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숨을 고르고 있는 와중에도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는 까닭이었다.

'불이 더 번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여성에게 여분의 공기 마스크를 씌워준 그는 이번에는 도끼 한 자루와 소화기를 들고 바깥으로 향했다.

'제발···!'

언제나 집중하여 가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빠르고 효율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게 하소서.

화르르륵!

타닥- 타닥-

도시 곳곳에서 붉은 화마가 기승을 부린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세져 있었다.

화르르륵!

이도윤이 이번에 진입해야 하는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다가오는 것들을 전부 잡아 먹으려는지 넘실넘실거리는 불의 기세에 그는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긴장감과 압박감에 땀이 비가 오는 듯 쏟아졌다.

불은 악마다.

그것은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니까.

'이 자식 또 정신줄 놓네? 정신 차려!'

'도윤이 감 다 죽었네. 에이스 맞냐?'

'너 아까도 그 말했잖아. 아니, 좀 다르긴 하네.'

그래, 나는 팀원들에게 우스갯소리로 에이스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것은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닌 내 팀원들이 옆에서 도와주었기에 들을 수 있었고, 이룰 수 있었던 이야기다.

'도윤아, 우리가 구해야 할 생명은 언제나 둘 이상인 거. 잊지 마라. 그러니까 죽지 마.'

그리고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다.

'집중해. 할 수 있잖아. 매번 어떻게든 해왔잖아.'

불이 무섭다고 해서 소방관이 도망치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딸깍-

푸화아악!

이도윤은 안전핀을 분리한 소화기를 분사했고, 소화 분말이 불길을 잠시 진정시킨 틈에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후욱- 여기 누구 있습니까?! 후욱- 소방관입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물건을 두드려서 인기척을 내십시오!"

그는 목청껏 외쳤다. 비록 그의 목소리는 일차적으로 마스크에 막혀 둔탁하게 변했지만, 이도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쳤다.

그러다가 숨을 죽이고 소리를 들었다.

부디 이 안에 누군가가, 그의 목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있다면 어떤 반응해주기를 바라면서. 지금부터 이도윤은 그 미약한 반응을 잡아내야 했다.

"후욱- 후욱-."

거칠게 변한 자기 숨소리.

와르르르-

건물 벽돌이 무너지는 소리.

쿠르르륵-

화마가 건물을 잡아먹는 소리.

쿠그긍- 기기긱-

철골이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

···툭

···툭

희미하게 들리는 무언가가 두드리는 소리.

"······!"

방금 귓가를 자극한 것이 착각이 아니라면 이도윤이 들은 소리는 눈앞의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구조 신호를 보낸 것이다.

'···막혀 있다.'

현재 그가 있는 위치와 소리가 들린 벽 너머에는 무수히 많은 장애물들이 깔려 있었다. 방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잔해물들은 혼자서는 치울 수 없는 양과 무게였다.

'도윤아, 내력벽은 아니다. 그냥 가벽이다. 부셔도 돼.'

'이 자식 이거 이번에는 도끼 잘 챙겼네? 그걸로 벽에 구멍 뚫어버려!'

같은 시야를 공유하면서 그가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확인해주며 조언해주는 동료들.

눈앞에 있는 것이 건물의 하중을 받는 내력벽이었다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섣불리 건드리면 건물이 폭삭 주저앉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특히 건물 내구도가 한계에 달한 지금은 더욱 그러했다.

'···고마워.'

이도윤은 거친 숨을 내쉬며 소방 도끼를 위로 치켜들었고, 곧장 아래로 강하게 내려찍었다.

콰직! 콰악! 콱! 콰드득!

묵직한 도끼날이 휘둘러질 때마다 벽은 뭉텅이로 패였다.

후두둑- 후두둑-

부서진 파편들이 발밑에 쌓인다.

이윽고.

콰앙!

벽에 구멍이 뚫렸다. 몇 번 더 허물고 나니 틈은 사람이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크기로 확장되었다.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여유는 하나도 없었다. 건물에 화재가 난 지 시간이 이미 오래 지났고, 그에 따라 요구조자의 상태는 점점 악화할 것이 분명하니까.

휘이이이···

건물 외벽이 심상치 않게 무너진 탓에 백 드래프트 현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압 차가 심하게 났다면 구조는 어렵- 아니, 포기했어야 했을 터다.

자욱한 검은 연기와 붉게 타오르는 불씨를 헤치면서 앞으로 나아가자 어린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의 옆에는 녹아내린 플라스틱 장난감과 짧은 쇠 막대기 하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막대기로 벽을 두드려서 신호를 보낸 듯했다.

"꼬마야! 괜찮니?!"

"······."

이도윤은 여분의 공기 마스크를 기절한 아이의 얼굴에 씌워주었다. 아직, 아직 늦지 않았을 것이다. 살릴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끝없이 되뇌며.

그는 아이를 앞으로 안은 채 빠르게 건물 바깥으로 움직였다. 그가 지나온 길마다 화마가 길목을 막기 시작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건물 자재들이 형편없이 무너진다.

'······이거 백린이냐?'

'이게? 아니, 뭐가 어떻게 되는 거냐 대체.'

'도윤아, 나가면 빨리 물부터 부어라. 그럼 일단 꺼지기는 할 거다.'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는 물에 적신 붕대로 감는 것뿐이야.'

숨을 참고 있는 이도윤이 힘겹게 다리를 놀리고 있는 사이, 그의 머릿속에서는 대화가 한창이었다. 그들이 신경을 집중한 것은 아이의 팔을 좀 먹고 있는 무언가. 옷을 녹이면서 타오르고 있는 무언가는 살점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의 팔을 섣불리 만진 탓에 그가 끼고 있는 장갑도 버려야만 했다.

콸콸콸!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온 그는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곧장 아이의 팔에 물을 흘려보냈다. 진득하게 눌어붙어 살을 녹이고 있던 그것은 물에 닿자 잠시 진정 상태로 접어들었지만 그뿐이었다.

부글부글!

물을 붓는 걸 조금이라도 늦춘 순간, 물질이 붙어 있는 피부에서 기포가 솟아올라왔으니 말이다.

그러니 아직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아직 숨은 쉰다.'

도움이 절실한데, 그를 도와줄 수 있는 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악문 이도윤은 아이를 안고 소방서로 향했다. 가만히 있어 봐야 아이는 알아서 치료되지 않는다. 어차피 응급치료 도구든 다른 무엇이든 소방서로 가야 얻을 수 있지 않은가.

타탓- 타타탓-

신이 도운 것일까.

"정신이 드셨습니까?!"

"네, 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중년의 여성이 마스크에 의지해 간신히 숨을 쉬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많이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움직일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었다.

"이 아이의 팔에 감은 붕대에 물로 계속 적셔주십쇼! 그것만 해주시면 됩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예요!"

"네? 아니, 알았어요! 물만 계속 뿌려주면 되는 거 맞죠?"

"예, 부탁드립니다! 아, 아이의 팔은 함부로 만지시면 안 됩니다! 발화 물질이 묻어 있습니다!"

"조심할게요!"

다행히 중년의 여성은 이도윤이 착용하는 장비와 데려온 아이를 보더니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아예 정수기통을 꺼내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도윤은 내심 안도감이 드는 속을 달래면서 다시금 건물 바깥으로 향했다. 아직 그가 찾아야 하고, 구해야 하는 사람들은 넘쳐났으니까.

그가 왕복할 때마다 그의 몸은 무거워졌다.

대신 소방서에는 부상자들이 한 명씩 눕혀졌다.

그가 무거운 다리를 강제로 움직일 때마다 한계에 다다른 그의 몸이 비명을 질렀다.

대신 소방서에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 부상자들이 일어나 서로 도왔다.

살아남기 위해서.

화르르륵···

어느새인가 포격과 폭격은 중단되었으나 도시는 여전히 불타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 곧 승진이었는데.'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소방장 다는 놈이 나올 줄 알았더만. 아쉽겠어.'

'이거 다 환각은 아니겠지?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어어? 야, 이도윤! 앞에 조심해라!'

[끼아아아아악!]

우당탕탕!

"허억···, 허억···. 크으윽!"

이도윤은 가물가물한 시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사람 아니, 괴물을 겨우 피할 수 있었다. 때마침 경고를 전한 그의 동료가 아니었다면 지금 바닥을 뒹구는 것은 괴물이 아닌 자신이었겠지.

[끼에에에엑! 끄아아악!]

괴물은 몸에 달라붙은 불길을 끄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치는 중이었다. 이도윤은 그것을 뒤로하고 소방서로 향해 걸었다.

마침내 어떻게든 소방서 건물로 들어갔을 때.

"아! 소방관님!"

사람들 사이로 바삐 돌아다니는 중년의 여성이 그를 반겨 주었다. 아직도 어색하게 보이는 꼬리를 흔들면서.

"콜록! 콜록! 아이는··· 아이는 어떻습니까?"

"하아, ······안 좋아요. 급한 대로 진통제가 있길래 먹이고, 물을 계속 붓고 있는 중인데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여기 있는 분들 응급 처치 해주신 게 혹시···?"

"저 저기 있는 여성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거든요. 응급 처지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의사는 아니더라도 의료직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부상자를 그냥 넘길 수는 없으니까요."

"콜록! 콜록!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아니, 또 어디 가시려고요! 당신도 더 움직이면 안 돼요! 지금 소방관님 꼴이 말이 아니라고요! 세상에 손 짓무른 것 좀 봐···."

이도윤의 상태는 소방서에 있는 여느 부상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중년 여성이 행동을 말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가 입고 있는 장비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질척하게 달라붙는 무언가가 장비를 전부 갉아먹은 까닭이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벌써 20명이나 구하셨잖아요! 소방관님 몸으로는 이제 무리라고요!"

이도윤과 이름 모를 중년의 여성은 서로 가진 뜻을 쉽사리 굽히지 않았다. 각자 서로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드드드드드드드드!

지상을 울리는 거대한 진동이 깊은 지하에서부터 전해지더니,

쿠쿠쿠쿵!

거대한 나무뿌리가 아스팔트 도로를 뚫고 솟아올랐다. 이내 뿌리 끝부분이 쩌억 갈라지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푸른 수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웅-!

잔뿌리로 감싸진 푸른 수정에서 기묘한 파장이 퍼진다. 멀리 퍼지는 파장이 온갖 사물에 닿을 때마다 기묘한 줄기들이 순식간에 자라나게 되었고, 이질적인 꽃들을 피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하얀 꽃잎과 무엇보다 붉은 수술을 가지고 있는 하얀 꽃이 사방을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

"저게 뭐야!"

"꺄아아악!"

이도윤과 그가 구한 생존자들은 갑작스레 변화한 상황에 당혹성이 가득 담긴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은 우왕좌왕하면서 무작정 앞으로 내달리려고 하거나 본능적으로 책상 밑에 숨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털썩-

사방으로 휘날리는 꽃가루에 의해 한순간에 의식을 잃어 버리게 되었지만 말이다.

꾸드드득!

그들이 암전하는 시야로 마지막에 본 것은 도시를 잠식하고 있던 불길이 가루에 먹혀 진화되고 있는 모습과 푸른 수정을 기준으로 거대한 하얀 꽃이 자라나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금천 소방서 건물 중앙을 꿰뚫은 나무뿌리에서 자란 꽃이 아른아른하게 보이면서, 이상하게도 꽃 주변에 서 있는 그의 아내와 아이가 이도윤에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수영아···. 세현아···. 나는 아직···!"

이도윤은 흐릿해져 가는 의식을 최대한 붙잡으면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는 옆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의 손은 허망하게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저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케 하시고 제가 최선을 다 할 수 있게 하시어, 이웃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에 따라 제 목숨이 다하게 되거든,

······부디 은총의 손길로 제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아주소서.

「너의 소원을 들어 주마. 이제부터 이 도시는 오로지 안식만이 존재하리라.」

***

그렇게 지금의 도시가 만들어졌다.

불이 도시를 불태우지 않기를 바라는 한 사람의 소망으로.

불이 사람을 불태우지 않기를 바라는 한 사람의 염원으로.

인간의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푸른 입자가 반응했으나, 푸른 입자를 억누르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양의 검은 입자가 소원의 방향성을 뒤틀어 버린 결과물.

그렇게 만들어진 모두가 고통받지 않고, 그저 편안하게 잠에 빠지게 하는,

안개가 가득 들어찬 안식의 도시였다.

「그가 온다. 감히 내 것을 탐한 그가. 이번에도 네가 그를 구하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모든 일이 전부 잘 풀릴 거야.」

동료의 목소리들 대신 머릿속을 울리는 속삭임.

"······구해. ······구해?"

멍하니 하얀 안개를 보고 있던 이도윤이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무감정만이 있다가 서서히 다른 감정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가 알고 있는 사실과 속삭임이 왜곡한 사실이 서로 충돌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누구를··· 구해···?"

누구를?

어디 있지?

왜 보이지 않지?

왜 들리지 않지?

왜 느껴지지 않지?

안 보여. 안 들려. 안 느껴져.

없어. 없어없어. 없다고.

세현?

세현이 누구야.

"아아아아악······!"

이도윤은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몸이 바닥에 툭 쓰러졌고, 그는 몸부림 쳤다.

「쯧. 이래서 인간이란. 자, 처음부터 다시 세 보자꾸나. 내 말을 잘 들으렴. 잘 들어서 너의 뇌리 구석구석에 새기려무나.」

속삭임은 이도윤의 시야를 통해 주변을 보면서 말했다.

지금 너에게 붙어 있는 왼팔로 하나.

네 옷에 박혀 있는 손가락으로 둘.

바닥을 굴러다니는 말라비틀어진 안구를 합치면 셋.

저 멀리 떨어진 다리를 더하면 넷.

네 발치에 나뒹구는 뼈를 세면 다섯.

네가 품에 안고 있는 작은 두개골까지 여섯.

······.

······.

속삭임은 그 수가 스물에 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속삭임은 이내 전부 다 있다며, 네가 다 구한 사람들이라며 말하면서 폭소했다.

"아, 아···. 다 있구나···."

이도윤의 머릿속에는 속삭임뿐만이 아닌 그가 구해 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그가 어디선가 구해 온 식량을 나누어 먹고, 같이 밤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장면들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꺄하핫! 나 잡아 봐라! 응, 못 잡죠? 약 오르죠?'

'너 잡히면 진짜 가만 안 둬!'

조금 꾀죄죄하지만 표정만큼은 밝은 아이들이 건물 내부에서 뛰놀고 있었다. 앞에서 뛰는 아이의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배고프더라도 같이 힘내서 버팁시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았어요. 멀쩡한 건물을 발견했거든요.'

'아, 그럼 사람들 모아서 다 같이 물자 탐색 한번 할까요?'

외부 탐색을 맡은 어른들이 힘들게 모아온 식량들을 배급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보다 더 꾀죄죄했다.

"진짜 다 있어···. 내가 구한 사람들···."

위험한 세상에서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는 무엇도 할 수 있었다.

물론,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이 아닌 꿈에서의 이야기일뿐이었지만. 이도윤은 그걸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할 수도 있었다.

미몽에 빠진 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그래. 네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하지 않았니. 그러니까 이제는 네가 내 약속을 이행할 차례란다.」

"그렇다면 이제···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어요···."

이도윤이 멍하게 몸을 돌려 하얀 꽃을 향해 가는 와중에도 속삭임이 이어졌다.

「이현우, 그가 이곳에 오는 순간 네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그에게 꿈을 보여주어라.

다시는 깨지 못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