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8 - 308. 시작과 끝 (8)
넝쿨이 내 심장을 꿰뚫기 직전.
···탁!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심장을 노리려는 넝쿨을 잡아챘다.
"······너."
그것은 내가 움직일 줄은 몰랐다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어."
수많은 사람이 덧없이 목숨을 잃고 만 현실. 그건 내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네가 바라는 게 무엇이든 전부 이루어져."
「포기해라.」
그것은 내가 한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에 잡힌 넝쿨을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했다. 손아귀에 잡힌 넝쿨이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진다.
"굳이 힘든 현실을 바라볼 필요가 있어?"
「포기해라.」
나는 답하지 않고 전신을 옭아맨 넝쿨을 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벗어나.
벗어나.
이건 꿈이야.
깨기 힘든, 깨어나고 싶지 않은 아주 달콤한 꿈.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 받아들여서 나와 하나가 되는 거야."
「그러니 포기해라.」
아니.
여긴 현실이 아니야.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어.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끄으윽···!"
그러나 나는 점점 전신을 조여 오는 넝쿨에 의해 가지고 있던 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반항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넝쿨은 점점 더 강하게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힘겹게 고개를 드니 나를 응시하는 그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풍경이 보였다.
집집마다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거리마다 시끄러운 경적 소리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밤이고 낮이고 항상 불이 꺼져 있는 현실과 달리,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도시는 눈 부신 빛을 하늘로 향해 내뿜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얼핏 푸른빛이 타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을 불살라 빛을 내는 유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밤하늘의 별조차 한 수 접을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는 도시의 야경.
어찌 보면 매우 익숙해서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풍경이었다.
그러나 다시는 보지 못할 것 알기에 은연중에 보기를 포기했던 풍경이기도 했다.
'···포기? ······아니, 누구 마음대로.'
이 세상을.
수많은 생명이 서로 부딪치며 얽히는 세상을.
생명이 발하는 열기가 찬란한 빛을 내는 세상을.
나는 그런 세상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허나, 쿵쿵거리는 심장은 진정되기는커녕 점점 크게 박동했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예전의 세상을 다시 만들고 말 거야.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도 아닌 바로 내가.
키이잉-!
흔들리는 의지가 아닌 굳은 의지를 가지게 되니 심장 속의 푸른 입자가 잠에서 깨어났고,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바보같이 행동해서 죽을 뻔한 일, 속삭임에 현혹되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일,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으나 최악의 결과를 낳았던 일, 낯선 이에게 목숨이 구해진 일, 살기 위해 발버둥친 일, 사람을 구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던 일,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걸 지켜보았던 일.
그 과정에서,
나는 물러서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나는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너···!"
그것은 조금씩 일어나는 나를 보며 노호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넝쿨을 더욱 많이 만들어내어 나를 압박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화르르륵!
어느새 생성된 작은 불씨가 넝쿨을 불살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예전에 내가 누나에게 들었던 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언젠가.
내가 어렸을 적에.
부모를 잃고 나서 어색한 집에서 어색한 밤을 홀로 보내고 있을 때.
무서운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목이 꺾인 시체가 내 목을 조르는 꿈이었다.
어린아이답게 눈물 콧물 질질 짜면서 당시 같이 지내고 있던 누나에게 달려갔을 때, 누나가 내게 해준 이야기.
'나쁜 꿈을 꾸는 것은 아직 괜찮다는 증거야. 싸울 의지가 있다는 거거든. 하지만 좋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면 그때부턴 조금 조심해야 해. 그 꿈은 너를 서서히 옭아맬 테니까. 많이 무서웠니? 괜찮아. 방금 네가 꾼 꿈은 무서운 꿈이었으니까. 너는 강하구나.'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던 누나는 남들과는 다른 소리를 했다. 보통은 놀란 아이를 달래는 것에 집중할 텐데, 그녀는 오히려 대견하다며 칭찬을 했었으니 말이다. 생소한 반응에 눈물이 쏙 들어갔더랬다.
내가 지금 꾸고 있는 꿈은 나쁜 꿈일까.
아니면 좋은 꿈일까.
'내가 지금 꾸고 있는 꿈은···.'
악몽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괜찮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까 일어서라!
"끄윽···, 그거 알아? 인간의 역사는 걷기의 역사라고 하더라."
나는 조금씩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넝쿨을 밀어내며 말했다.
인간의 역사는 걷기의 역사. 모든 것은 인간이 걸음으로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모든 것이 인간이 걷기 시작하면서 생겨났고, 발견되었으며, 발명되었다.
길 한복판에서 정신을 차린 내가 여기까지 다리를 놀려왔던 것처럼.
만남을 이어가면서 새로운 것들을 배워왔던 것처럼.
"말했잖아. 나는 끝까지 걸을 거라고.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너라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지."
"이현우!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희생은 희생이 아니야! 그리고 그 누구도, 떠밀린 끝에 고른 결과를 선택이라고 부르지 않아! 나는 지금!! 너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고 있는 거라고!"
"그 기준을 왜 네가 정해. 내가 이렇게 하겠다는데."
우리는 걸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걸어서 살아남을 것이다.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항상 그래 왔듯이.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조금쯤은 쉬어도 되련만.'
세계수가 방금 내게 했던 말이었다. 자비를 가장한 기만이 한 말이기도 했다.
'힘들지 않느냐고? ···당연히 힘들었지. 힘들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목숨이 경각에 달할 정도로 위험한 일들을 숱하게 겪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달라지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움직인 거고, 그래서 걸었던 거야.
그리고 나는 마침내,
탁-!
두 다리로 대지를 지탱하고 일어섰다. 전신을 옭아매던 넝쿨의 두꺼운 줄기가 형편없이 끊어지는 건 거의 동시였다.
"네가 감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너는 우리 인간을 이길 수 없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너는 가만히 보기나 해. 나는 앞으로 걸어갈 테니까."
내 인식이 바뀐 탓일까. 그나마 꿈에서라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던 그것은 다리가 바닥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꿈에서는 무엇도 가능하다고 하는데! 대체 왜 거부하는 거야!!"
"네가 말한 것에 답이 있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이런 꿈이 아니야."
내 믿음이 향하는 곳은 이따위 꿈이 아닌, 거짓뿐인 꿈이 아닌, 실재하지 않는 꿈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는 현실이었다. 지수, 예린, 한세아가 기다리고 있는 현실이었다.
화르르륵!
불씨가 어느덧 불로 승화된 것이 보인다. 흐릿했던 내 의식 또한 타오르는 푸른 불을 보며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내 믿음과 의지를 연료 삼아 불타오르는 푸른 불을 내딛는 발걸음에 오롯이 담았다. 그렇게 발을 내딛자 대지에 내 족적이 남았다.
인간이 세상에 남기는 흔적이었다.
탁-
가벼운 발걸음 소리. 허나, 그 파장만큼은 가볍지 않았다.
[끼아아아아악!]
원형으로 퍼진 푸른 입자의 파장이 여전히 나를 포기하지 않은 넝쿨을 모조리 불살라 버린 것이었다. 고작 이런 걸로는 이제 나를 막을 수 없었다.
부스스···
검은 입자와 절규를 토해 내다가 죽어 가는 넝쿨들. 그것들이 흩날리는 재가 사방을 뒤덮었다.
"······!"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던 세계수는 주변을 점거하는 푸른 불을 보자마자 뒤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그녀는 물러날 수가 없었다.
다리가 고정된 것도 그렇게 되는데 한몫 하긴 했지만, 넝쿨을 조종하고 있던 그것이기에 넝쿨이 전부 불타면서 불이 옮겨 붙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아아악!"
푸른 불이 그것을 태운다. 그것은 불을 끄기 위해 몸부림을 쳤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한번 옮겨 붙은 불은 꺼지지 않을 테니까. 그것의 몸이 전부 타 버릴 때까지.
여기서 끝장을 내면 좋을 텐데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무리 그것을 불 태워도 결국 여긴 현실이 아닌 꿈일 뿐이었으니까.
"이 배신자!"
"우리 아이들에게 살아갈 터전을 준다고 했으면서!!"
"같이 살아가자고 약속했으면서!!!"
내가 한걸음 나아갈 때마다 그것의 외침이 이어졌다.
콰르르르르!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그것이 내지르는 고함에 꿈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이곳이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처럼 공간이 쩍쩍 갈라졌다.
깨진 유리처럼 무너져 내리는 공간이 보여주는 또 다른 꿈을 잠시 눈에 담던 나는 답하지 않고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그런 말은 인간을 가지고 놀기 전에 했어야지.'
내가 바라던 미래를 위해서.
내 믿음의 끝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서.
내가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을 때.
"네 누나 이름. ······기억은 하니?"
바닥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그것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슬픔이나 후회로 떨리는 것이 아닌 지독한 증오로 떨리는 목소리였다.
"지금 네 누나는-!"
"···더 이상 너한테 놀아나지 않아."
나는 그것의 말을 끊은 것과 동시에 문고리를 돌려 활짝 열린 문으로 보이는 현실로 나아갔다.
그토록 쉬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