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9 - 309. 시작과 끝 (9)
"조심··· 위···온다!"
"아으···! 칼카타! 수가 너무···! 많···!"
잠든 의식을 일깨우는 소리에 나는 스르륵 눈을 떴다. 그리고 곧장 막힌 숨을 토해냈다.
"커흑! 켁! 콜록! 콜록!"
난리를 친 건 꿈인데, 어째 현실의 몸이 욱신거린다. 아직도 잠에 취한 것인지, 꿈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것인지 여전히 흐릿한 시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옥상 구석. 갑작스레 기절한 나를 보호하기 위해 한쪽으로 치워 둔 모양이다.
휘리리릭!
쾅!
전방에서는 거대한 꽃에서부터 시작된 줄기가 바닥을 강타하는 중이었다. 그 꽃과 대치하는 칼카타와 지수를 잡기 위해서 말이다.
쩌저적!
줄기에 담긴 힘이 어찌나 강한지 그것이 바닥을 내려칠 때마다 이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건물이 죽는 소리를 토해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너머에서는 폐허가 된 도시가 보였다.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린 세상이지만, 이곳이 내가 있을, 있어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초라하게 변한 현실이 내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었다.
"큭···."
그 세상을 잠시 보던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났다. 언제까지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인 까닭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칼카타와 지수가 싸우고 있건만, 내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
꿈을 지키는 이도윤.
현실을 지키려는 칼카타와 지수.
이도윤은 우리의 적이 아니었다. 단지, 꿈에서 길을 잃은 사람일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벽에 기대어져 있던 도끼를 들고 앞으로 내달렸다. 어느 때보다 또렷한 의식을 가지고서.
타탓! 타타탓!
짙은 안개 사이를 가르며 도끼를 높게 쳐 들었다.
"지수야!! 칼카타!! 숙여요!"
"······!"
"아저씨···! 으아앗?!"
지수와 칼카타는 도끼로 반원을 그리는 나를 보더니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방독면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매우 지쳐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을 붙잡기 위해 줄기가 아가리를 벌렸으나,
쐐애애애액!
후웅-!
뒤이어 휘둘러지는 도끼날이 줄기를 모조리 갈라버렸다. 푸른 입자가 담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힘이 도끼에 실려 전방의 적을 분쇄한 것이다.
마치 내가 다룰 수 있는 힘의 총량이 미약하게나마 늘어난 느낌이었다.
"네가 어떻게!!! 왜 구원을 거부했지? 왜! 왜!!"
거대한 꽃을 지키는 파수꾼, 이도윤이 꿈에서 깨어난 나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처럼.
"···지수야,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야?"
나는 그의 외침에 답하지 않고, 지수와 칼카타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옷이 찢어져 있거나 찢긴 옷 사이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꽃가루들이 상처 부위에 달라붙어 있는 건 덤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시간을 끌었다가는 거대한 꽃을 제압하는 것보다 푸른 입자가 소진되는 것이 먼저이리라.
그러니 서두를 필요성이 있었다.
"한 시간?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흘렀을 수도. 아저씨, 갑자기 왜 기절한 거야?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
지수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도윤을 경계하면서 물었다. 격한 움직임에 의해 그녀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세계수가 함정을 파 놓았었어. 내가 다시는 깨지 못하도록."
신이라 불리는 세계수가 했다고 하기에는 스케일이 작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위력만큼은 결코 우습지 않았었다. 내가 혼자였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못했을 정도로.
'내 심장 속 조각이 없었더라면, 대항할 수도 없었겠지.'
나름 같은 조각을 품고 있다는 것일까. 현실에서는 몰라도 꿈에서만큼은 비등비등하게 싸움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요행이었을 수도 있지만 내가 꿈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뭐?! 아저씨,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어떻게든 벗어나서 이렇게 일어나 있잖아."
물론, 까딱 일이 잘못되었다가는 꿈에서 영원히 깨지 못하고, 조각마저 빼앗겼을 터. 그리되면 인간에게 미래는 없었겠지. 나는 그 말만큼은 하지 않았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으니까.
"잡담은 그만. 지금은 눈앞의 적에 집중해라."
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칼카타.
탁!
그는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찍었다. 그러자 스멀스멀 몰려들고 있던 안개들이 확 밀려났다. 어쩐지 평소보다 시야가 좀 더 넓더라니 칼카타가 한 행동 덕분에 시야 확보가 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안개가 훅 밀려나면서 금천 소방서 옥상이 좀 더 눈에 잘 들어왔다.
꽃가루 범벅된 태양광 패널, 뼈 무더기 위에 눈처럼 내려앉은 하얀 분말, 구석에 기울어진 탑을 만들고 있는 통조림, 층이 무너져 울퉁불퉁해진 바닥, 깨진 유리 조각과 건물 외벽 파편, 주변을 뒤덮은 하얀 꽃들.
내가 꿈에서 엿보았던 장소와 같은 장소이건만, 전혀 다른 풍경이 된 소방서 옥상이었다.
"···지금 보이는 뼈 무더기. 저게 끝이 아니야. 아까 저 꽃 뒤로 한번 날아갔었다가 바로 내팽개쳐졌는데 거기에 더 많은 뼈가 있는 게 보였었어."
헛구역질을 하는 지수가 방독면 아랫부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입을 막기 위해 올려진 손은 방독면에 막히자 괜히 정화통만 툭툭 쳤다.
스르륵-
잠시나마 밀려났던 안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리를 채워 우리의 시야를 가렸다.
바로 그때.
"···왜. 왜 나를 방해하는 거지? 왜 어머니가 하는 말을 듣지 않는 거지···? 왜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려는 거지?"
이도윤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허나, 그가 진짜로 보는 것은 현실의 우리가 아닌 현실에 덮어씌워진 꿈이었다.
"여기에 살아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는 거야!"
지수는 개소리하지 말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산발이 된 그녀의 머리는 그녀가 얼마나 이도윤의 공격에 시달렸는지 알려주었다.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여기에 지금 즐겁게 뛰어 다니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 저기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이도윤은 아무것도 없는, 하얀 가루가 떠다니는 허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도윤이 보고 있는 광경이 어떤 광경인지 안다. 꿈이 깨진 유리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내가 본 것은 그가 꾸고 있는 꿈이었으니까.
비록 일부에 불과하긴 해도 이도윤이 어떻게 사람들을 구했는지, 그가 어쩌다가 이렇게 변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
묵묵히 도끼 자루를 꽉 쥐었다. 그가 꾸고 있는 꿈을 부술 자격이 내게 있는지는 모른다. 허나, 부수지 않고서는 내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알았다.
"···칼카타. 칼카타가 저랑 같이 전방을 맡아요. 지수 너는 뒤로 따라오면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걸 막아줘."
그리 판단한 나는 심호흡하면서 몸을 조금 낮췄다.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게.
"알았다."
"응, 아저씨."
각자 준비를 마친 칼카타와 지수가 고개를 끄덕인 것과 동시에.
"···안식을. 사람들의 안식을!! 방해하지 마!!"
이도윤이 줄기를 조종해 나, 지수, 칼카타에게 날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줄기의 기세가 매서웠다.
팡!
줄기가 공기를 터트리며 쇄도한다. 도합 수십에 달하는 줄기는 빠져나갈 공간을 없애겠다는 듯 사방을 점거해 오고 있었다.
"지금!"
나는 일행에게 신호를 준 후,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내 신호를 받은 지수와 칼카타가 앞으로 쏘아진 건 거의 동시였다.
콱! 콱! 콱! 콰직!
우리가 지나온 길마다 끝이 뾰족한 줄기가 박혀 들어갔다. 한 방에 목숨을 끊겠다는 듯 깊숙하게 파고들어가는 줄기였기에 한대라도 허용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휘리릭!
그렇게 박힌 것만 수십 개. 하지만 아직도 줄기는 많이 남아 있었다. 거대한 꽃의 줄기는 한 번의 실패에 물러서지 않고 재차 쇄도하기 시작했다.
안개 사이를 뚫고 나오는 줄기들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언제, 어디서 갑작스레 튀어 나올지 예측할 수가 없었으니까.
쐐애액!
나는 그런 줄기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제발 빗나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까앙━!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나아간 도끼날과 단단한 줄기가 서로 부딪치니 주홍 불꽃이 튄다.
"미, 치인···!"
맥없이 잘려 나갔던 처음과 달리 내 도끼질을 버텨 내는 줄기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도가 올라가고 있는 줄기. 이대로 버티기만 해서는 이길 방도가 없었다.
특히 꽃가루 탓에 푸른 입자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현 상황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저씨!"
지수가 살짝 뒤로 밀려난 나를 받아 낸 다음 쉬지 않고 밀려오던 줄기의 파도에 몸을 던졌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파도를 유연한 몸놀림으로 피하면서 달렸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츠즈즈즈즉!
바닥을 쓸 듯 지나가는 줄기.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 줄기에는 어느새 봉오리가 맺히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데굴-
줄기의 끝에서 자라난 봉오리는 꽃이 되었고, 꽃에서는 기괴한 눈과 가로로 길게 찢어진 입이 만들어졌다. 단순히 줄기의 공격만으로도 힘든 상황인데, 설상가상으로 변종까지 탄생한 것이다.
"······어?"
포식자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몸이 굳은 지수. 그녀는 필사적으로 굳은 몸을 풀기 위해 몸을 뒤틀었으나,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변종이 쩍 벌린 아가리를 지상에 내려찍는 것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적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건 우리뿐만이 아닌 변종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바로 그때.
"대전사가 있는 한 그렇게는 못한다!"
칼카타가 지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강대한 몸을 앞세운 그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아 가로로 세웠다.
······콰직!
그가 앞을 막아도 아랑곳하지 않은 변종은 그대로 벌린 입을 닫을 뿐이었다. 그것에게 물러선다는 선택지따위는 없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후두둑!
완전히 다물리지 않은 아가리에서 피가 떨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진 피는 하얀 세상에 붉은 점을 찍기 시작했다.
한 방울, 한 방울씩.
점이 선이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