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0 - 310. 시작과 끝 (10)
후두둑!
어느새 날카로운 이가 돋아난 입이 칼카타를 물자, 피부가 찢어지며 빨간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가장 커다란 체구를 가진 변종의 입은 지팡이로 어찌어찌 막아 냈으나, 변종이 한 마리가 아니었던 탓에 모든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내가 기절하고 있었던 동안에 싸움이 꽤 오래 지속되었던 것도 칼카타가 제때 못 피하게 만드는데 한몫 했겠지. 지수와 칼카타는 체력 소모를 이미 많이 한 상태였으니까.
심지어 아무리 안개를 밀어냈다고 해도 여전히 공기 중에 미약하게 남아 있는 꽃가루가 상처에 달라붙고 있는 중이지 않은가.
칼카타뿐만 아니라 지수 또한 그것에게 받는 영향이 조금씩 커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틀림없었다.
"칼카타!"
나는 달려가면서 그를 불렀다. 칼카타의 피가 떨어진 곳에는 하얀 분말이 뭉쳐 반죽 같은 덩어리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칼카타는 괜찮다는 손짓을 한 다음, 자신을 물고 있는 꽃 변종을 붙잡았다. 커다란 손아귀로 주제도 모르고 자신을 먹어치우려는 변종들을 하나씩 떼어냈다.
"흐읍···!"
그가 숨을 크게 들이킨 것과 동시에.
찌이이이이익!
거대한 꽃이 만들어낸 변종이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섬유질의 줄기가 결대로 갈라져 나뉘었고, 끈적한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끼아아아━!]
콰직!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변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입이 다물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칼카타가 시끄럽다는 듯 손아귀를 움켜쥐어 입을 뭉개버렸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너는 어머니한테 속고 있는 거다. 아니, 그건 이미 어머니가 아니야."
그는 이도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 내용이 툭 잘린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이야기. 내가 자리에 없을 때 이어졌던 대화의 연장선인 모양이다.
쐐애애액!
칼카타의 말을 들은 이도윤은 그에게 답을 되돌려주었다. 다만, 그 답이 언어가 아닌 적대적인 공격일 따름이었다.
"······이런 씹!"
전방위적으로 내리퍼붓는 줄기의 공격. 피할 틈이 없는 공격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기껏 거리를 좁혔는데 다시 뒤로 물러나야만 하는 판이었으니. 아니, 뒤로 물러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내가 우선적으로 지수를 뒤에 숨긴 그 순간.
"후우···, 이현우.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라. 두 번은 못 보여주니까."
칼카타가 시야를 가리는 방독면을 벗어 던졌다. 그는 이제서야 답답함이 좀 가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산같이 대지를 지탱해라."
그는 다리를 단단히 고정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뒤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적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그는 우리에게 쇄도하는 줄기 하나하나를 전부 눈에 담았다. 목숨을 노리는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
"네 등 뒤에 누가 있는지 잊지 마라."
그리고 그는,
쾅! 콰앙! 콱!
터엉-!
푸른 핏줄이 돋을 정도로 강하게 붙잡은 지팡이로 하나하나를 전부 쳐 내기 시작했다. 요란한 함성을 내지르지도 않은 채, 힘든 기색을 보이지도 않은 채.
파앙!
채찍처럼 날아드는 줄기들이 그의 지팡이에 의해 튕겨 날 때마다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허공을 때려댔다. 원래 목적인 나, 지수, 칼카타를 죽이지 못하게 된 그것들은 애꿎은 화원만 망가트리고 있는 중이었다.
태산같이 버티고 있는 칼카타가 거대한 꽃의 공격을 막아 낼수록 주변에는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꽃가루들이 일어나 자욱한 먼지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큭!"
그런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나와 지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눈 뜨고 구경하는 건 죽여달라고 소리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건만, 어찌 가만히 구경만 하겠는가.
우리도 칼카타의 부담을 최대한 덜어 주기 위해서 도끼로 줄기를 막아 내고, 베어내고, 밀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기의 수가 워낙 많았던 터라 몸에 잔 상처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옷가지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줄기에 의해 피부가 팍, 하고 터져 나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화원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쾅! 쾅! 쾅! 콰쾅!
여전히 기세가 죽지 않은 꽃의 공격. 숨을 쉴 틈도 내주지 않겠다는 듯 휘둘러지는 줄기가 끝이 없었고, 사방을 둘러싼 줄기 탓에 운신의 폭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이대로 버티기만 해서는 우리에게 이길 방도가 없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아저씨! 저 푸른 수정! 저거 부수지 않는 이상 이거 계속될 거야···! 꺄악!"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공격을 간신히 막아 내는 지수가 외쳤다. 그녀는 바로 앞이 아닌 조금 더 멀리 있는 푸른 수정을 잠깐 보았다가 빈틈을 노린 줄기에 복부를 가격당하고 속절없이 뒤로 날아갔다.
"안 돼! 지수야! 이런 씹! 칼카타! 무슨 방도 없습니까?!"
지수의 말처럼 푸른 수정에 기생하는 모양새인 거대한 꽃과 이도윤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수정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내가 푸른 불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상황을 한결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뼈 저리게 아픈 사실로 다가왔다.
지금 내가 꽃가루로부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하고,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푸른 입자를 다른 곳을 돌린다면 곧장 다시 기절하고 말 테니까.
그럼 그때야말로 정말 모든 것이 끝이었다. 다시는 눈을 떼지 못할 테니 말이다.
'······불을 쓰는 건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가능해.'
푸른 불을 다루지 못한다면 나는 이렇게나 무력하다는 말인가.
인간과 비교하기조차 민망한 수준의 근력 차이, 인간보다 강대한 몸, 빠른 회복력. 그리고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물량.
무엇 하나 인간이 변종을 앞지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현실에 나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팔을 휘둘렀다. 도끼로 허공을 그었다. 심장을 노리는 줄기를 막아냈다.
바로 그때.
"···이현우. 잠시나마 안식에 들었을 때, 무엇을 보았나."
여전히 줄기를 지팡이로 쳐 내던 칼카타가 뜬금없이 물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느긋하게 물어볼 질문은 아니었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
내가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와중에도 묵묵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칼카타.
"아오, 진짜! 꿈! 꿈을 꿨습니다! 모두가 안전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꿈이요!"
"행복한 꿈이군. 그럼 왜 다시 현실로 돌아왔지?"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팡이로 바닥을 그었다. 바닥에는 검은 재로 이루어진 선이 생겨났다.
"뭘 당연한 걸 물어요! 꿈은 꿈일 뿐이니까! 현실이 아니니까! 됐습니까! 으헉!"
나는 뒤통수를 노리는 줄기를 간신히 피해내며 답했다.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괴로움이 없다고 해도,
굶주림이 없다고 해도,
슬픔이 없다고 해도.
실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꿈은 현실의 도피처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꿈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그곳에는 오직 거짓뿐이라는 걸 알기에. 아무리 행복한 꿈이라고 해도 현실을 보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다.
살아가리라.
결국 세상은 흥함과 쇠함의 반복. 이번에 쇠했다면 다음은 반드시 흥한다.
변하지 않는 진리와도 같은 사실. 그 사실에 기대어 우리는 버텨 낼 것이고,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내 믿음이 향하는 곳.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우리의 손으로 직접 이뤄내야 할 현실이다.
"굳, 이···! 큭, 한 마디 덧붙, 이자면···! 내 믿음이 향하는 곳이 여기니까! 칼카타가 말했잖아요! 믿음의 방향이 중요한 거라고!"
나는 금천 소방서로 오면서 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믿음의 대상보다 그 믿음이 향하는 방향이 중요한 것이라는 이야기.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이라고 믿었다.
쩌억···
거대한 꽃이 조종하는 변종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공격을 버텨 내는 우리에게 위기감을 느낀 듯 그것은 살기를 풀풀 흘려대며 나와 칼카타를 노려보았다.
까가가가각-
날카로운 이빨로 우리를 잘근잘근 씹겠다는 것처럼 이빨 갈리는 소리를 냈다.
"저리 꺼져!"
뒤편에서 지수의 도끼질 소리가 들려온다. 초반에는 줄기를 잘라 내는 소리였던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둔탁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많이 지쳤다는 신호였다.
아직까진 어찌어찌 견디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몰랐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우리가 불리해진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내 말을 곱씹던 칼카타가 심호흡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가. 그게 네 믿음인가. 보아라, 이현우. 작은 불씨는 거대한 불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내 믿음이다."
자신이 뿌린 희망이 미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그의 말.
"···????."
칼카타는 지팡이로 바닥을 탁 내려찍었다.
그러자 어느새 바닥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선과 그가 흘린 피에서 붉은 불똥이 튀더니 순식간에 거센 불길이 되어 끈질기게 목숨을 노려오던 줄기들을 모조리 불살랐다.
화르르르륵!
[끼에에에에에에엑!]
바닥에서 솟구친 화염의 폭풍이 주변을 잠식했다.
내가 피워내는 푸른 불과 달리 피처럼 새빨간 불.
생명을 태우는 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