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1 - 311. 시작과 끝 (11)
화르르륵!
녹아내린다.
태양광 패널이, 플라스틱 판이, 현실에 덧씌워진 꿈이.
화르르륵!
불타 사라진다.
하얀 꽃이, 그것의 가루가, 화원이, 눈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내가 무방비한 상태였을 때는 사용할 수 없었던 이적. 이 불은 시전자 주변을 제외하고는 주위 모든 것을 불태웠다.
그렇게 하나씩 잡아먹고 있는 불은 점차 기세를 부풀렸다.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매우 화려한 모습을 자랑했던 화원은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얀 세상이 붉은 화마에 휩싸여 사라지고 있었다.
"안 돼!! 기껏 지켜낸 세상이란 말이다! 내가 지켜낸 사람들이란 말이다···!!"
이도윤은 그 광경을 보며 일그러진 얼굴로 울부짖었다. 그는 무언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당연히 잡히는 것은 없었다. 그의 손은 허망하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꿈은 현실이 될 수 없다.
되어서도 안 되었다.
바로 그때.
"가라! 이현우! 길은 만들었다!!"
칼카타가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하면서 외쳤다. 입가를 붉게 물들인 핏물은 그의 상태가 매우 악화되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나조차 푸른 불을 쉽사리 피워내지 못하는 상황이었건만, 칼카타가 억지로 불을 일으킨 것이 얼마나 무리를 하는 행동이었는지 알 수밖에 없게 하는 모습이었다.
화르르륵!
그리 외친 칼카타는 지팡이로 불길을 조종해 우리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뿐.
좌우로 이루어진 불의 벽이 갈라지고, 후방으로 밀려났던 지수가 합류한 것과 동시에 나는 지수와 함께 쏜살같이 내달렸다.
생명을 태우면서 만들어 낸 기회다.
그의 믿음이 만들어 낸 기회다.
우리는 그가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놓쳐서도 안 되었다. 절대로.
"아저씨! 내가 시선 끌 테니까 아저씨는 저 줄기든 뿌리든 잘라! 푸른 수정에 붙어 있는 거!"
지수가 긴 흑발을 휘날리며 소리쳤다. 그녀 또한 어느새 방독면을 벗어 던진 후였다. 맑게 빛나는 금안이 내가 노려야 할 부분을 가리켰다.
"알았어!"
나도 마찬가지로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방독면을 벗었다. 칼카타가 주변을 깡그리 불사른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작은 렌즈로 보였던 세상이 커지면서 좀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매캐한 냄새가 맡아지는 건 덤이었다.
"너희가 뭘 안다고!"
이도윤은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는 우리를 보며 팔을 들었다. 그가 팔을 들자 불길에 갈팡질팡하던 줄기들이 정신을 차렸고, 다시금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그가 팔을 들자, 이도윤의 허리춤에 연결된 줄기 하나가 보였다. 예전에 수원역에서 보았던 것처럼 넝쿨이 속을 파고들어간 모양새였다. 아마 저것이 그를 조종하는 것이리라.
'소방관 이도윤은 죽었어. 저건 이미 사람이 아니야.'
그래, 저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푸른 수정에 기생하는 거대한 꽃이 죽은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이도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그를 붙들고 있는 줄기를 잘라 내야 했다.
그것을 넘어 거대한 꽃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푸른 수정에 달라붙어 있는 잔뿌리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내 목표는 푸른 수정에 달라붙은 뿌리. 그것이 내가 최우선적으로 노려야 할 적의 몸체였다.
쐐애애액!
몇몇 줄기가 넘실거리는 붉은 화염의 벽을 뚫고 나와 지수에게 쇄도한다. 불길을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함인지 그것들은 와이어처럼 꼬여 있었다.
콰앙-!
확연하게 두꺼워진 줄기가 전보다 한층 더 강한 파괴력을 내는 건 당연한 수순.
쩌저적-
쿠르르릉!
줄기가 강타한 바닥에 잔균열이 수도 없이 일어나며 건물 내구도를 떨어트린다. 건물이 흔들리며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건 덤이었다.
"으헉!"
"꺄악!"
나와 지수는 앞으로 몸을 굴러 화염의 벽을 뚫고 공격을 가하는 줄기를 간신히 피해냈다. 우리가 지나온 길마다 자기들끼리 몸이 비벼져 꾸득 소리를 내는 줄기들이 박혀 바닥을 쪼갰다.
"어머니만 믿으면 우리는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어!"
필사적으로 변종의 아가리를 피해내는 우리를 본 이도윤이 주변을 가리켰다. 허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재만이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만 믿으면 우리는 오늘 먹을 식량을 구할 수 있어!!"
그는 기울어진 탑을 형성하는 통조림을 가리켰다. 허나,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단 하나도.
"어머니만 믿으면 우리는 내일을 위해서 살 수 있어! 어머니만 믿으면, 어머니만 믿는다면!!!"
그가 내지른 소리는 고함보다는 절규에 가까웠다.
"내가! 우리가!! 저들이!!! 어떻게, 대체 어떻게 했어야 한단 말이냐!"
그는 지금까지 도시의 안식을 위해서 해왔던 짓을 입에 담았다.
도시를 안개로 뒤덮고,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강제로 잠들게 해 꿈을 꾸게 만들었던 것들.
푸른 수정에 기생해서 성장하는 거짓의 꽃을 지키고, 속삭임이 보여 준 현실에 목을 매달았던 것들.
"어머니가 믿음을 강요했다고? 아니! 우리가! 어머니에게 믿음으로 보답한 것이다! 그 하해와도 같은 은혜에! 우리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을!"
이도윤은 다시금 팔을 들어 줄기를 조종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다시 움직이면 그만이라는 듯이.
"그런데 네가! 너희들 따위가 뭐라고 우리를 방해해! 어머니가 오염되었든 아니든 그딴 건 상관없어! 우리에게 어머니는 그저 은혜로운 어머니일 뿐이니!"
나와 지수가 앞으로 달리고 나서 지난 시간은 고작 수십 초에 불과했다. 하지만 거대한 꽃을 몰아세우던 화염은 점점 기세를 잃어가고, 불길이 죽어 가는 만큼 줄기는 재차 기세를 얻고 있었다.
금천 소방서 옥상이 그리 큰 공간도 아니건만. 사방에서 몰아치는 공격에 일직선인 길을 달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피처럼 붉은 화염이 사라지고 있다는 건 칼카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신호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수 없다는 게 옳은 표현이었다.
고개를 돌릴 그 찰나의 순간마저 아까웠으니까. 우리는 그 순간을 앞으로 한걸음 내딛는 것에 써야만 했으니까.
쐐애애애액!
입을 크게 벌린 꽃 변종들이 몸체를 위에서 아래로 찍으려는 그때.
"···아저씨, 아까 말한 대로 내가 틈을 만들어 낼게. 절대로 놓치지 마. 딱 한 번밖에 못 만드니까."
시선을 위로 흘깃 향한 지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에는 가시적인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푸른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그녀도 아는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우리가 이길 방도가 없다는 걸. 그렇기에 지수는 정신을 유지시켜 주는 푸른 입자를 쓰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부탁해."
"나만 믿어."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린 지수는,
파지직!
크게 한 발을 내디뎠고 섬전이 되어 앞으로 쏘아졌다. 그녀를 노리고 있던 줄기들은 잔상만을 가를 수 있었다.
후우욱!
지수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허공에서 몸을 뒤틀었고, 뒤트는 방향 그대로 도끼를 휘둘렀다. 푸른 궤적을 그리는 선에 걸린 꽃 변종들은 사정 없이 잘려 나가 체액을 내뿜게 되었다.
팡!
후두둑-
이리저리 날카롭게 잘린 줄기가 단면을 내보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앞으로 혼자 튀어나온 지수에게 이목이 일순간 쏠린 상황.
[끼아아아아악!]
변종들은 푸른 입자를 사방으로 흩뿌리는 지수를 보며 적대적인 기세가 담긴 괴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녀가 아예 빠져나갈 수도 없게 주변 영역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덥석!
"아아악! 이, 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꽃 변종들의 공격에 지수는 결국 도끼를 들고 있는 한쪽 팔을 물리고 말았다. 남은 팔이 물리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의 동시였다.
그러자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는 입을 크게 벌려 팔을 물고 있는 줄기를 물어뜯었다.
콰득!
꽉 다물린 이 사이로 변종의 체액이 흐른다.
"퉤! 가!!"
줄기의 살점을 뱉어낸 지수. 그녀는 변종이 도끼를 든 팔을 놓을 때까지 그 행위를 반복했다. 결사 항전이었다.
[키에에에엑!]
하지만 고작 물어뜯는 걸로 물러날 변종들이던가. 그것들은 지수의 반항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의 팔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타탓- 타타탓!
지수 덕분에 진로가 좀 더 크게 뚫리게 된 상황 속에서 나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격하게 변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방해하지 마! 전부 여기서 잠드는 거다!! 그게 구원이야! 단 하나뿐인···!"
이도윤은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나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가까이 접근한 적을 인지한 거대한 꽃에서 가시가 쏘아졌다.
줄기 기둥이 갑작스레 갈라지면서 뾰족한 가시가 연달아 쏘아진 것이다.
파바바박!
"이런 씹!"
일견 수십에 달하는 가시들이 전방을 메우는 건 분명 두려운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여기서 멈추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마니까.
순간의 판단.
펑! 퍼벙!
황급히 굴린 눈에 보인 패널을 주워 가시를 조금이나마 막아 보려고 했지만, 날카로운 가시는 패널을 그대로 뚫고 지나갈 뿐이었다.
이질적으로 구멍이 뻥 뚫린 패널은 무심코 마른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나름 단단해 보이는 판이 아무런 방어 효과도 주지 못하고 박살이 나 버린 것이다.
그래도.
'여기서 멈추면 안 돼!'
스스로에게 각오를 다지듯 속으로 외친 나는 이를 악물었다. 곧 찾아올 끔찍한 고통을 버텨내기 위함이었다.
도끼로 가시를 쳐낼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괜히 쳐내겠다고 마구잡이로 도끼를 휘두르다가 급소라도 맞게 된다면 낭패였으니 말이다.
가시를 피해낼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곳은 사방이 뻥 뚫린 옥상이었으니까.
그러니 차라리 몇 대 맞더라도 확실하게 급소를 보호하는 편이 나은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타탓- 타타탓!
결국 어쩔 수 없이 양팔을 교차해 얼굴만 겨우 가린 채 달려 나가는 것만이 최선의 선택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순간.
푹! 푸푹!
훤하게 드러난 몸에 가시들이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살을 파고드는 고통에 순간 시야가 아찔해졌고, 숨이 토해내졌다.
"크, 윽···!"
그러나 정신만큼은 더욱 또렷해졌다.
촤아악!
날카로운 끝을 가진 가시가 볼을 스쳐 지나갔다. 가로로 그어진 선 사이로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럼에도, 내 시선은 여전히 적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내가 흘리는 피만큼이나 진득하게 이도윤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뒤에 있는 푸른 수정에 들러붙은 뿌리였다.
화르르륵!
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그동안 아껴 놓았던 푸른 입자로 불을 만들어냈다.
여태까지 정신을 차리게 해준 푸른 입자는 이제 적을 물리치는데 사용할 차례.
살아서 코앞까지 붙은 이상 뒤를 볼 것도 없었다. 여기서 끝장내지 않으면 우리에게 내일이라는 건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전부 쏟아붓는다.'
푸른 불은 이내 도끼 자루를 타고 올라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붉은 화염이 사라지면서 생긴 빈자리는 이제 푸른 불이 채우게 되었다.
이도윤.
그는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꿈은 꿈이다.
현실이 아니라, 단순한 꿈.
그와 동시에.
후우웅-!
내 푸른 불에 반응을 보인 푸른 수정에게서 기묘한 파장이 흘러나왔고,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파장과 푸른 불이 서로 맞닿은 순간,
화르르르륵!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기묘한 파장을 바로 앞에서 받은 불이 파장의 도움으로 기세를 키운 것이었다. 마치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흐읍···! 잘, 려라아악-!!"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강하게 쥔 도끼를 내세우면서. 믿음을 가지고.
"···아, 안 돼!"
이도윤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떨리는 눈을 가득 채운 푸른 불꽃을 바라보면서. 절망을 가지고.
그리고 나는,
서걱!
푸른 수정에 달라붙은 뿌리나 줄기 따위들을 잘라 냈다. 도끼날에 걸린 모든 것들을 베어냈다.
중간에 턱턱 걸리는 느낌을 받을 새도 없이 푸른 불은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불살랐다.
[끼아아아아아아악━━!]
도끼에 휘감긴 푸른 불꽃이 뿌리에 옮겨 붙어 거대한 꽃을 불태우자, 그것이 품고 있던 검은 입자들이 모조리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변종의 끔찍한 단말마와 함께,
주위가 일순간 어둠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