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2 - 312. 안식의 도시 - 3부 끝
텅!
도끼가 바닥을 찍으며 둔탁한 소리를 낸다.
"헉···, 허억···."
나는 도끼 한 자루에 몸을 의지한 채 전방을 노려보았다. 상황이 전부 끝났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했다.
주위를 잠식했던 어둠이 서서히 걷히면서 보이는 것은,
[끼이이이익······]
푸른 수정에 기생하고 있었던 꽃이었다.
그 거대한 꽃은 수정과 연결 고리가 끊기자 순식간에 시들어가고 있었다.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니 단순히 죽는 걸 넘어서서 빠르게 말라비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쿨럭!"
이도윤도 비슷한 상태였다. 거대한 꽃처럼 줄기가 끊긴 그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거리다가 털썩 주저앉았으니까. 벽에 등을 기대는 건 덤이었다.
격하게 피를 토한다거나 하는 그런 일들은 없었다. 다만,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숨으로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을 뿐이었다.
정신이 돌아온 것일까.
소방서 옥상을 천천히 훑는 그의 눈에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푸른 불이 일렁거렸다. 불이 일렁거릴 때마다 현실이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도윤은 이내 깨달았다는 듯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나는 결국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구나. 하, 이거··· 소방관-콜록! 실, 격이네···."
그는 품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찾는 듯했으나, 잡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다 해진 소방관 옷이 찢어지기만 했다.
"···이거 찾아요?"
나는 내 발치에 떨어진 사진 한 장을 주워 건넸다. 이도윤이 내 공격에 뒤로 물러날 때 떨어진 물건인 모양이다.
사진에는 내가 캐비닛에서 보았던 여성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언제나 구해야 하는 목숨은 둘이라는 문구와 함께.
그는 고맙다는 시선을 보낸 후, 사진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나는 벌을 받고 있었던 걸까. 아니, 벌을 받은 거지. 언제나 어려운 길만 걷다가··· 단 한 번. 정말 단 한 번뿐이었는데. ······조심해라. 그리고 기도하라. 신이··· 널 기다린다."
"···그딴 건 신이 아니야."
그의 말에 내가 무심코 중얼거린 것과 동시에.
"수영아, 미안···. 약속 못······."
이도윤은 고개를 푹 떨궜다. 손에는 사진 한 장이 꽉 쥐여져 있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리고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진정한 안식이었다.
"······."
흐릿해진 시야로 간신히 버티고 있을 때,
후두둑-
내 몸 곳곳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거대한 꽃이 어느새 하얀 재로 변하면서 그것이 만들어 낸 부산물인 가시 또한 재로 변했으나, 그것이 입힌 피해만큼은 그대로였던 까닭이다.
피부를 찢고 들어간 가시가 어림잡아 열 개는 가뿐히 넘었으니 현재 내 상태가 어떤지는 보지 않아도 알만했다. 엉망진창이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안개가 사라짐에 따라 푸른 입자가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일까. 느리지만 확실하게 생성되고 있는 푸른 입자는 곧장 내 몸의 회복을 도왔다.
"···이현우, 더 움직일 수 있겠나."
초록 피부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수척해진 칼카타. 입가에 붉은 피가 잔뜩 묻은 그는 기절한 지수를 부축하며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지수는 당연하겠지만,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꽃 변종의 아가리에 수차례 물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치명상으로 보이는 부상은 입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 하지만 모두가 살아남았으면 그걸로 족했다.
"움직, 후우-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저 푸른 수정을 챙기고 어서 내려가자.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여유는 없으니."
칼카타의 말이 맞았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 안전한 곳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 지수, 칼카타가 몸을 회복시켜야 하고, 밑에서 대기하는 예린, 한세아, 최미소도 걱정되었으니까.
도시를 잠시하고 있던 안개는 우리가 있는 중심지에서부터 서서히 가라앉아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 안개가 전부 사라진다면 외부에서 온갖 변종들이 물밀듯이 밀려올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괴물들과 추격전을 벌이기 않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리라.
"···여기 사람이 들어 있었네요."
이명이 울리는 귀를 애써 무시한 나는 푸른 수정 앞으로 이동했고, 볼 수 있었다.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귀가 긴 여성을 말이다.
"그래, 나도 보인다. ···아직 고향에서 넘어오는 동족들이 있는 것인가. 아니, 그건 아니군. 나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초기에 넘어온 뿌리다."
칼카타는 수정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관찰하는 한편, 옮기기 쉽게 밧줄로 매듭을 지어 묶었다. 그는 많이 힘들어 보였으나,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들으라는 듯 쉴 새 없이 입을 열었다.
나도 이런 수정을 타고 넘어왔다느니, 지금은 봉인된 상태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거라느니, 나중에 이 푸른 수정이 쓸모가 많을 거라느니 하는 그런 이야기들.
"···칼카타, 혹시 이 사람 알아요?"
그가 수정 안의 소녀를 향해 보내는 그리운 시선을 본 나는 가쁜 숨을 고르며 물었다. 왠지는 몰라도 칼카타가 이 여성을 아는 눈치로 느껴졌던 것이다.
"모른다. 하지만 이 아이가 숲지기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알지. 저기 목덜미 쪽에 문양이 숲지기의 표식이거든."
"그렇구나. 뭐, 그건 차차 알아가는걸로 하고 다 묶었으면 이제 나갑시다. 죽을 뻔했는데 칼카타가 그, 만일의 대비인가하는 그거 덕분에 어떻게든 살았네요."
이래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인 나는 푸른 수정을 업을 준비를 마쳤다.
칼카타가 불을 일으키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바닥에 누워 있게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못해 확실했다. 그만큼 파수꾼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푸른 수정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뿌리를 한 번에 베어내지 못할 뻔하기도 했다.
칼카타가 무어라 답을 하려고 할 때.
쿵━━━━!
지축이 흔들렸다.
"······?!"
아직도.
상황이 아직도 다 끝난 게 아니란 말인가.
나는 다급하게 몸을 숙였으나, 지진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울린 것이 아니었다.
바깥에서 오고 있었다.
드드드드드드드-!
쩌저저적!
안개가 점차 사라지면서 드러나게 된 도시의 풍경. 그 지평선에서부터 말이다.
뼈대만 남은 건물이 기울어지는 지면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진다. 쓰러진 건물은 짙은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렇게 몸을 뉘이게 된 건물은 한 채가 아니었다.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이 우리가 있는 위치에 가까워질수록 붕괴되는 건물의 수는 늘어만 갔다.
'···지렁이 변종!'
지면을 자유자재로 가르고, 건물을 무너트릴 수 있는 힘을 가진 변종은 그것밖에 없었다.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어떻게 알고 이렇게 빨리 안으로 진입을 한 것일까.
심지어 지렁이 변종은 안개가 남아있는 지상이 아닌 지하에서 길을 만들면서 이곳으로 곧장 오고 있는 중이었다.
"칼카타! 빨리! 빨리 나가요! 차 타고 도망가면 뿌리칠 수 있을 겁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훨씬 더 다급한 목소리로 칼카타를 재촉했다.
하지만.
"내가 말한 만일의 대비는 불이 아니다. 이현우, 내 부탁을 하나 들어 줄 수 있겠나?"
칼카타는 제자리에 뿌리가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가죽 가방에서 피가 담긴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뭡니까, 이런 상황에서! 말할 시간에 나가자고요!"
"지금의 너는 약하다. 그러니 당장 여기서 나가라. 나가서 목숨을 부지해라."
"개소리 그만하십쇼!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나가면 모두가 살 수 있는데!"
내가 그를 아무리 잡아당겨도 칼카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우직한 눈빛에 숨이 턱 막혔다.
이대로 차량을 타고 이동하면 지렁이 변종을 뿌리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대전사다. 대전사는 물러나지 않아. 그러니 어서 나가라!"
"그게 무슨! 싸울 거라면 같이 싸우는 게 낫잖아요! 저도 싸울 수 있어요!"
이럴 시간이 없는데, 이러는 동안에도 그 괴물이 여기로 오고 있는데. 그리 울리는 내 허망한 외침에 되돌아오는 건 칼카타가 유리병을 깨는 소리였다.
쨍━!
유리로 이루어진 병이 무언가에 부딪치면 나는 소리, 1cm도 채 되지 않는 두께가 내는 소리, 속이 텅 빈 병이 내는 소리.
그리고 그건 우리 모두가 살아서 안개의 도시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내 얄팍한 믿음이 깨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제야 칼카타의 몸 상태가 눈에 확연히 더 들어왔다.
멈추지 않고 뚝뚝 떨어지는 피, 불을 일으킨 여파인지 말아비틀어진 오른팔, 초점이 풀린 오른눈.
그는 지금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 기적일 만큼 부상이 심각했다. 내가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모습이었다.
"씨발···. 칼카타, 몸이 왜···."
"대가를 치른 거지. 얻은 것에 비하면 아주 값싼 대가다."
칼카타는 자꾸만 어긋나려는 숨을 간신히 붙잡은 채 말을 이었다.
"너는 살아서, 나의, 우리의 이야기를 전해다오. 나는 전사로서 살다 간다고 전해다오. 염치없지만 부탁한다."
붉은 피가 바닥에 흩뿌려진 광경과 함께 산산조각 난 유리병이 보인다. 조각조각 깨진 유리 조각은 어느덧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수정안에 들어 있는 아이는 숲지기의 인정을 받은 아이다. 아직 어리니 네가 잘 돌봐다오. 마지막으로, 여기서 물러나라는 말은 부탁이 아니다. 이야기를 전해 달라는 것이 부탁이었지."
"미소씨! 미소씨는 어떡하고요! 지안이도 있잖아요! 칼카타, 제발!"
"······너를 믿는다."
내 몸에 지수와 푸른 수정을 같이 묶은 칼카타는 내 발버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상을 향해 내던졌다.
휘이이잉!
속절없이 추락하는 상황 속에서 아찔한 부유감이 몸을 스쳐 지나가고, 내가 뻗은 손에도 허망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칼카타━━!"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우리 같이 살아서 나가기로 했잖아.
***
"칼카타━━!"
이현우의 간절한 외침이 길게 늘어지며 들렸다.
"···살아라, 이현우."
나는 떨어지고 있는 이현우, 김지수, 푸른 수정을 받아 낸 푸른 날개를 보았다. 그들을 무사히 받아 낸 한세아는 이내 그들을 차량에 태웠고, 차량은 망설임 없이 출발했다.
미리 이야기 나누었던 대로 아내가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든 생각은 단순했다.
나는 내 책임을 지겠다.
그러니 도망쳐라.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몇 번이고 같은 선택할 것이다.
구차한 삶보다 자랑스러운 죽음을!
바로 그때.
「이제 와서? 너는 이미 실패하지 않았니? 어리석은 아이야.」
들고 있는 지팡이에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 지팡이는 오염되지 않은 어머니의 가지로 만든 것.
이제는 공명으로 인해 오염이 전염되고 있는 세계수의 가지가 되어 버렸기에 그것의 속삭임이 들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이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지.'
부족의 염원이라는 이유로 홀로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한 실수를.
「정말. 정말 끝까지 실망만 시키는구나. 지금 너의 선택으로 인해 네 부족은 전부 죽을 거란다. 당연히 너도 죽을 것이고.」
'아니, 그건 틀렸다.'
같이 온 부족의 형제들은 안식을 얻었으니까. 남아 있는 부족은 이미 없다.
그러니까.
나는,
'반드시 살린다.'
내 실수를 조금이라도 만회할 것이다. 내가 남긴 피가 후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나는,
'여기서 죽는다.'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
나는 아스트라의 위명 높은 검은 산맥 부족의 대전사, 칼카타다.
즈으윽-
깨진 유리병 조각으로 팔뚝을 그었다. 피부가 갈라지면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나는 그 피를 바닥과 들고 있는 지팡이에게 흩뿌렸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이 피에 담긴 힘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고, 서서히 붉은 피를 밀어내며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내가 준비한 만일의 대비는 적을 교란하고 속박하는 주술.
비록 시전자가 움직이면 발동이 풀린다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그건 지금에 와서는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어차피 나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으니까.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보다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과 이미 피를 너무 많이 썼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였으나, 다행히 주술은 제대로 완성할 수 있었다.
단순히 무리를 조금 더 하면 되는 일이었을 뿐.
"쿨럭! 큭-!"
기침과 함께 한움쿰 쏟아지는 피가 바닥을 물들인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오래 못 산다. 안식의 도시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내 수명이 다하는 것이 먼저겠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바에는 죽을 장소를 스스로 고르는 편이 낫지 않은가.
차량을 타다 허무하게 죽는 것보다는 여기서 죽는 것이 더 가치있으리라 믿었다.
미리 건물 구석구석에 놔두었던 촉매와 공명하기 시작한 문양. 이제 이 문양은 저 뱀의 이목을 끌어 주리라.
한번 포착한 건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는 전설의 뱀을 말이다.
쿠르르르르르!
지축이 다시 한번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확연하게 가까워졌다. 그와 동시에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사이로 칠흑 같은 비늘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눈을 감았다가 뜰수록 점점 더 폐허로 변하는 도시와 함께.
'하, 귀쟁이 아니, 엘트라가 우리는 역병이라고 했던가.'
이번만큼은 네가 옳았다. 그래, 우리는 재앙이었어. 고향을 덮친 것만이 재앙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차라리 도망치지 말고 우리의 고향에서 생을 마감했어야 했거늘. 알량한 생의 욕구 때문에 비참하게 살아남았다.
그 결과 이 꼴이지.
아무 죄 없는 다른 별의 세상도 멸망으로 이끌고 말았지 않은가.
비록 보잘것 없는 목숨이지만, 이렇게라도 너희에게 속죄하겠다.
「······어리석기는. 이제 곧 이 별이 완전히 우리의 세상이 된다고 하는데, 그걸 거부하다니. 너는 어리석다.」
'원래 우리 부족은 어리석음이 덕목이다.'
어리석음은 곧 우직함이고, 우직함은 곧 용맹이니. 투쟁이 삶이었던 우리에게 딱 맞는 덕목이지. 그리 중얼거린 나는 킬킬 웃어댔다.
어리석은 나는 상실을 알았다.
그건 다시는 갈 수 없는 고향의 이야기였다. 투쟁을 이어 나가던 고향이기도 했다.
어리석은 나는 사랑을 알았다.
그건 새로운 보금자리가 된 고향의 이야기였다. 희생을 이어 나가던 고향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리석은 나는,
'주술사, 뒷일은 맡긴다. 너를 믿는다.'
대전사다.
'네가 마지막 남은 전사다···. 부디 어머니를 막을 수 있는 자를 찾을 수 있기를, 우리의 의지를 이어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마.'
아니, 대전사여야만 했다.
"형제들이여, 미안하다. 아쉽게도 끝까지 살아남기를 바랐던 너희의 바람은 이루지 못할 것 같아. 나는 역시 태생이 주술사인 모양이야. 하지만 사람은 찾았다. 그가 어머니를 막을 거다. 그 약속 하나만큼은 지켰군."
거짓이 특기인 주술사는 죽음이 임박한 순간이 되고 나서야 형제들의 혼을 위령했다. 그들의 혼을 주박하고 있던 거짓의 꽃을 없애고 나서야 그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중에··· 세상이 안전해지면요. 섬에 가서 살고 싶어요. 저 나름 농가 딸이라 그런 곳에서 잘 살 수 있거든요. 그렇게 저랑 칼카타랑··· 우리 아이랑. 같이 오순도순. 그럴 수 있을까요?'
내 계획을 듣고 나서 입술만 짓씹던 미소. 그녀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리 물었었다.
"미안하다.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용서해다오."
날이 지나고, 푸른 하늘을 보고 나서야 나는 미소에게 답을 줄 수 있었다.
내가 고른 여자가 아니다. 나를 고른 여자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내 마지막은 내가 정한다. 그것이 바로 대전사다.
한차례 숨을 크게 들이킨 후에,
"나는!! 검은 산맥 부족의 자랑스러운 대전사! 칼카타!! 오라! 죽음이여! 내가 여기 있노라!!!"
세상에 자신이 살아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는 외침을 내질렀다. 고향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전설도 이런 식으로 이어졌던 것일까.
한순간 대기를 웅웅 울릴 정도로 큰 외침이 멀리 퍼질 때마다 머릿속에는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발자취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뜨거운 피를 흘리던 투쟁, 찬란한 생명의 탄생, 맞잡아지는 단단한 손, 휘둘러지는 무기, 내지르는 용맹, 물러서지 않는 다리, 등을 지켜 주는 형제들, 하나씩 차가운 대지에 몸을 뉘이는 형제들, 홀로 남은 부족의 전사, 옆에 기대는 아내, 다시 찾은 희망, 기대할 수 있는 미래, 다시 뜨거운 피를 흘리고 있는 현재.
모든 것이 지나간 다음 나는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별이 달라졌어도 사는 방식은 똑같았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투쟁인 삶을 살아왔었다는 것을.
어느덧 내 입가에는 미약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리고.
[구오오오오오오오!]
폭발의 화마에 휩싸였던 지렁이 변종이 탈피로 허물을 벗어 던지고, 칠흑의 뱀으로 변한 채 포효를 내질렀다. 마주 화답하듯이.
콰아아아아앙!
그런 칠흑의 뱀이 건물을 짓뭉개는 건 거의 동시였다.
죽음의 파도가 지상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