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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313화 (314/497)

Chapter 313 - 313. 길 (1) - 4부 시작

나와 지수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을 때.

"현우씨! 지수씨!"

우리가 곤죽이 되기 전에 받아 낸 푸른 날개가 있었다. 한세아는 우리를 푸른 수정과 함께 곧장 차량이 있는 곳으로 내려놓았다. 픽업 트럭은 이미 시동이 걸려 있었다.

"빨리 차에 타요!"

그녀는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쾅!

부아아앙-!

옥상에서 떨어진 것들을 전부 실은 차량은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격한 엔진음을 내며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카타가 아직 못 왔습니다! 기다려야 해요! 아직 안 왔다고요! 차 세워!!"

나는 다급하게 외쳤으나, 차량은 멈추지 않았다.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차량에 나라도 내려서 칼카타에게 가려고 했지만, 한세아가 내 몸을 붙들었다.

"···가지 마요."

"······알고···있었어요?"

맥락없이 던져진 내 질문.

"이런 식인 줄은 몰랐어요···."

한세아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젓기도 했다.

바로 그때.

"차는 세우지 않을 거예요."

운전석에 앉아 있는 최미소가 입을 열었다. 굳은 얼굴인 그녀는 전방을 주시하면서 소리 없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누구보다 차를 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미소는 차량을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가속 페달을 밟아 속도를 올렸다.

드드드드드드드!

맨눈으로 보일 정도로 짙은 흙먼지를 일으키는 존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녀의 남편인 칼카타가 목숨을 걸고 버는 시간을 허무하게 버리지 않기 위해.

"···미소씨도, 알고 계셨군요.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나만, 나만 몰랐던 거야."

허탈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저 외면했을 뿐이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원하는 것만 보려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는 이야기다.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잦은 기침, 증발한 피, 하얗게 질린 안색, 말라비틀어진 팔. 그 모든 것들이 칼카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려주었건만.

몸에 탈력감이 맴돌고, 머리에 차오른 열기가 빠지고 나서야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박살이 난 근처의 차량들, 꺽인 전봇대, 날아간 소화전, 나무 인간 변종들의 사체.

그렇게 내려온 지상은 처음과 매우 달라진 모습이었다. 소방서 옥상뿐만 아니라 지상에서도 한차례 큰 싸움이 벌어졌다는 걸 알려주고 있는 풍경이었다.

한세아 또한 상태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총을 쏘지 못하니 근접 무기를 들고 싸운 듯 그녀는 옷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언니···! 정신 좀 차려 봐아···!"

기절한 지수를 부둥켜안은 예린이 보였다. 아이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지수에게 묻은 가루나 핏물을 닦아내는 중이었다. 예린 또한 바깥에서 한세아를 도왔는지 여기저기 잔 상처가 나 있었다.

"······."

내내 울다가 지친 것처럼 눈가가 매우 붉게 짓무른 지안이. 아기는 약하게 숨을 쉬며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안개가 순식간에 걷혀간다. 안개가 사라짐에 따라 그동안 안개가 감추고 있던 도시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때 찬란했던 모든 것이 망가지고 부서진 풍경.

멀쩡한 것이 하나도 없는 풍경.

[구오오오오오오!]

나와 지수가 아니, 우리가 떠나온 장소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거친 포효 소리가 들려온다. 거대한 질량체가 바닥을 나뒹구는 소리들까지.

그건 마치 내 심정 같았다.

그런 내 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후방에서는 계속해서 지렁이 변종이 몸을 뒤트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에 강제로 붙들려 몸의 후미를 사방으로 휘두르는 소리였다.

간혹 대기를 찢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괴물이 고통스러워하는 괴성을 내질렀다.

부아아앙-!

그러나 이제 그마저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들리지 않게 되었다.

거리를 충분히 벌린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한 박자 더 빠르게 후방이 조용해졌기 때문이었다.

"···끄으윽······."

최미소가 결국 울음소리를 참지 못한 건 그때였다. 핸들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처량한 울음 소리가 피비린내와 함께 차량 내부를 빙빙 맴돈다.

칼카타.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마음이 얼마나 많이 스며들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최미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를 도와 준다고 했던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차라리 처음부터 칼카타를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살았을까?

알 수 없었다.

푸른 수정을 챙기겠다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살았을까?

이 또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게 알았다. 이런 가정을 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칼카타는 어떻게 해서든 나와 지수를 따라왔을 것이고, 그는 어떻게 해서든 수정을 챙기려고 했을 테니까.

'숲지기의 인정을 받은 아이다. 아직 어리니 네가 잘 돌봐다오.'

칼카타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이상, 푸른 수정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없었다. 이 아이에게 잘못이 있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원망스러운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허허, 이것 좀 봐라. 벌써 아빠를 알아보는 모양이야.'

'허어! 몸을 그렇게 틀면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는다고 했잖나. 자, 다시 해 봐라.'

'잘못은 우리 별에 있다. 그래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세상을 재건하는데 내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작은 불씨는 거대한 불을 일으킬 수 있다.'

'······너를 믿는다.'

칼카타가 내게 했던 말 하나하나를 전부 기억한다.

'지금이 그 기회가 아니잖아요, 칼카타.'

괜스레 속으로 그리 중얼거려 보지만 당연히 칼카타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 대신에.

[끼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악!]

[끼에에에에엑!]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나무 인간 변종들이 답을 해주었을 따름이었다. 안개가 사라진 도시를 마치 제 세상인 양 활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니건만, 벌써 길을 막고 있는 나무 인간 변종들이었다.

그 수만 어림잡아도 스물이 넘는 물량에 얌전히 상황을 넘어가는 건 불가능할 듯했다.

[시흥대로 504→686]

현재 차량이 달리고 있는 위치는 시흥대로에서 남부순환로로 올라가는 곳.

"···미소씨, 좌우로 빠질 수 있는 길 있습니까."

"아뇨, 없어요. 뒤로 물러나서 샛길을 찾고 싶어도 지금까지 왔던 골목길에는 잔해가 너무 쌓여 있어서 차량이 못 지나가요. 그나마 이쪽이 큰 길목이라 어떻게든 잔해물 피해서 움직일 수 있었던 거고요."

나는 부정적인 답을 내놓은 최미소에게 수긍하는 한편, 차량 내부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귀와 꼬리를 축 늘어트린 채 지수를 간호하는 예린. 아이는 나와 최미소의 대화에 고개를 들었고, 푸른 가루가 담긴 유리병을 매만졌다.

불안한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는 한세아. 그녀는 총알이 얼마 들어 있지 않은 탄창을 총에 끼웠다. 지안이에게 귀마개를 끼워주면서.

하나같이 싸울 준비를 마친 그녀들이었으나, 나는 그녀들에게 손을 들어 움직임을 막았다. 그도 그럴게, 한세아와 예린은 이미 체력이 한계였으니까.

지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아직 기절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이 상태에서 나간다고 해도 도움보다는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컸다. 탄약이라도 많았다면 멀리서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아쉬웠다.

'총알이 부족하니 오히려 쏘지 않는 게 나아. 소음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고.'

결국 나가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이야기였다.

"후우···. 미소씨, 차량 잠깐 세워 주십쇼. 처리하고 올 테니. 세아씨는 나오지 말고 안에서 대기하고요. 예린이 너도."

"네? 현우씨! 저도 나가서 도울게요! 총알이 얼마 안 남아서 어지간해서는 쏘지 않겠지만 위험할 때 도와줄 수는 있잖아요!"

내가 도끼를 집어 들면서 한 말에 반발하는 한세아.

"오래 안 걸립니다. 그냥 여기 있어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차 문을 열었다.

그래,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오래 걸려서도 안 되었다.

충분히 멀리 가지 못한 우리는 칼카타가 벌어 준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크아아아아악!]

[끼에에에에엑!]

그리 판단한 나는 픽업 트럭을 인지한 나무 인간 변종들이 접근하는 모습을 보며 푸른 입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키이잉-!

혈류를 타고 흐르는 입자들은 이내 내가 들고 있는 도끼에 모였다.

사지가 분리되니 뭐니 하는 나무 인간 변종들이라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도끼에 응집되고 있는 푸른 입자들은 그것들을 한 방에 불사르기에 충분한 위력이었으니.

화르르르륵!

갈 곳을 잃은 내 감정이 길을 찾은 것일까. 불은 어느 때보다 격하게 타올랐다.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며 내게 경고를 전했으나 나는 오히려 불을 더욱 키웠다.

육체적인 고통이 강해질수록 썩어 문드러지는 내 감정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기분이었으니까.

부글부글 끓는 열기가 몸을 가득 채우자 눈의 실핏줄이 터졌는지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팔이 저릿해진 건 덤이었다.

푸른 입자를 감당하지 못한 근육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송곳이 몸을 쑤시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꾸드득-

이젠 정말 한계라며 몸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이미 심장이 혹사당했다는 건 안다. 허나, 이렇지 않고서는 전방의 괴물들을 없앨 수가 없었다.

'두 번은 못 해. 그러니까···.'

아직이야.

조금만 더.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도끼를 들었다. 내 몸 주위에는 플레어가 터지는 것처럼 푸른 불길이 불안정하게 치솟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끼아아아악!]

나무 인간 변종들이 충분히 거리를 좁히는 것과 동시에 스파크와 함께 불길이 일렁거리는 도끼로 허공을 그었다.

후웅-!

도끼날이 그은 것은 놈들의 몸체가 아닌 허공임에도 불구하고, 변종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유선형의 곡선을 형성한 푸른 불의 응집체가 전방으로 쏘아졌기 때문이었다.

퍼-엉!

앞으로 전진하는 푸른 불은 가로막는 검은 입자 덩어리를 모조리 지워 버렸다.

관절 비틀리는 소리를 내며 입을 쩍 벌리고 있던 괴물들은 흔적도 없이, 소리도 남기지 못하고 재로 변해 사라진 것이다.

그저 이질적으로 허공에 흩날리는 재만이 방금까지 괴물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커헉! 크으윽···!"

억지로 모으던 힘을 한순간에 내보낸 나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고작 한 방. 겨우 한 방을 날렸을 뿐인데 몸이 내지르는 비명이 야속했다.

삐이이이이-

이명이 들리는 귀.

쿵! 쿵! 쿵!

거세게 고동치는 심장.

"우웨엑!"

끈적한 피를 쏟는 입.

그리고 생각나는 말.

- 기본적으로 출력의 문제지. 어머니가 바다라면 너는 고무 호스 정도나 될까.

물을 과하게 쏟아내면 크기가 제한된 호스는 버티지 못하고 옆구리가 터지거나 입구가 갈라지겠지. 지금 내 몸도 그런 이치였다. 심장이, 혈관, 근육이 조각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칼카타도 이런 점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고.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야.

또 잃었어.

여기서 사람이 얼마나 더 죽어야 해.

'···대체 얼마나······!'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쿠르릉······

푸르렀던 하늘에는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 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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