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5 - 315. 길 (3)
살아남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픽업 트럭은 현재 구로역을 막 지나친 참이었다.
그리고 구로역을 기점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나무 인간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때처럼 괴성을 내지르며 어기적거리는 놈들.
[까그그그극······]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는 그것들은 관절부가 갈리는 소리를 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유연해지고 있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습기를 머금은 것이었다.
아직은 비가 내리지 않고 그 습기의 정도도 낮아서 큰 위협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르니 조금 더 서둘러야 할 듯했다.
우리가 있는 하늘까지 가득 채운 먹구름은 차량을 계속해서 앞으로 떠밀고 있었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이.
부르르릉!
최미소도 그 모습을 본 것일까. 그녀는 속도를 서서히 올렸다.
점점 앞으로 향할수록 담벼락 너머 길거리에는 나무 인간들이 늘어났고, 이동하는 차량을 눈치챈 놈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나무 인간들이 따라붙기 전에 거리를 벌리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철도 위로 이동하는 덕분에 우리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도로보다 현저히 적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선로를 이탈한 화물차들이 종종 가로막는 일이 있었지만 아예 못 지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는- 아니, 이걸 잘 풀리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엔진음이 빙빙 맴도는 차랑 내부에는 오로지 침묵만이 있건만.
"······."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촤자자자작-
묵빛의 선로 사이에 있는 자갈들이 타이어에 밀려나 이리저리 톡톡 튀는 모습이 보인다.
그와 동시에 안개의 도시에서 자라나지 못했던 넝쿨들이 다시 도시를 점령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회색뿐인 도시를 녹색으로 덧칠하는 넝쿨은 우리가 꽤 멀리 왔다는 걸 알려주었다.
'······칼카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고작 하루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지구 반대편으로 이동한 것도 아닌 겨우 6km를 움직이기만 했는데,
칼카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그가 잊혀질까.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워낙 강렬했던 터라 어쩌면 오래도록 기억이 남을 수도 있겠지.
아니,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계속 기억할 것이었다. 다른 모든 걸 떠나서 그냥 내가 잊고 싶지 않았다. 잊어서도 안 되고.
'너는 살아서, 나의, 우리의 이야기를 전해다오.'
그가 내게 부탁했으니까.
마지막으로.
그러니 그를 잊혀지게 만들 수 없는 우리는 끝까지 살아야 하리라.
부르르릉-
어느덧 픽업 트럭은 신도림역 승강장을 지나치고 있었다. 우뚝 서 있는 고층 빌딩들 사이에 자리 잡은 신도림역은 뜻밖에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이야기였다. 흉하게 허물어진 건물들에 비해 상태가 낫다는 말이었으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는지 뭉텅이로 건물 중단부가 패여 있는 광경에 비해서 신도림역만큼은 제 형체를 온전히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우리의 도착지가 아니다.
그렇기에 역사가 멀쩡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일행 또한 별말 없이 운전에 박차를 가할 뿐이었다.
하늘에서 태풍이 몰아치기 전에, 비가 쏟아지기 전에, 우리가 오갈 데가 없어지기 전에, 조금 더 멀리 가야만 했다.
끝도 없이 이어진 묵빛의 선로를 따라가는 차량이 덜컹거리며 신도림역 승강장을 지나친 것이 그때였고,
"······콜록!"
내 허벅지를 베고 있는 지수가 작은 기침과 함께 눈을 스르륵 뜬 것이 그때였다.
"언니!"
지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예린이 황급히 고개를 들이밀어 지수의 상태를 살폈다. 아이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생수 한 병을 땄다. 다행히 상태가 악화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언니, 이거 마셔···!"
"···예린아, 내가 할게. 이리 줘. 지수야, 물 마실수 있겠어?"
지수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가 조금씩 물을 목으로 넘기면서 흐릿한 시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처음에는 갈아입혀진 옷과 붕대가 둘둘 말린 자기 몸을 보면서 어깨를 움직여 보거나 손가락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이어서 허리를 움직였을 때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아예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닌 듯 천천히 몸을 풀었다.
이윽고, 목을 충분히 축인 그녀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빈자리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고,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차량 내부에 가득했던 침묵이 사라졌다.
대신 작은 훌쩍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나는 묵묵히 지수의 귀를 만져 주며 위로했다.
이걸로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는 영등포역에 진입하기 전에 위치한 고가 도로 아래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차량에 이상이 생겨 움직이지 못한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 탓은 아니었다.
"으아아아앙!"
갑작스레 지안이가 울음을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최미소 대신에 지수가 황급히 안아서 달래 보았지만 아기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세아가 안아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기저귀를 갈아야 할 시간인가 싶어 확인해 보았으나 그것도 아닌 상황. 이제 남은 답은 하나뿐이었다.
"······미소씨, 차 잠시 세우고 교대하시죠. 아기가 배고픈 것 같습니다. 전방에 있는 고가 도로 밑으로 가서 멈추면 될 겁니다."
나는 전방을 주시하는 한편, 잠시만이라도 차량을 숨길 장소를 찾아냈다. 멀리 있는 곳까지 볼 필요도 없었다. 그저 앞에 세우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기본적으로 철도 양옆에 담벼락이 세워져 있는 덕분에 담이 무너지거나 그런 것이 아닌 이상 일차적으로 시야를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굳이 고가 도로 아래로 숨으려고 하는 것은 혹여 주변 고층 빌딩에 있는 나무 인간들이 지상을 보더라도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방이 막혀야 아기 울음소리가 좀 덜 퍼지겠지.'
나는 그리 생각했고, 일행들 또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끼이익-
차량은 고가 도로 아래에 멈춰 섰고, 주변은 더욱 어두워졌다. 도로판의 그림자가 픽업 트럭을 잠식하니 체온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 괴물들은 없어요. 세아 언니, 지금 자리 바꾸면 될 것 같아요."
지수가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감정을 추스른 그녀는 잊지 않고 자기 할 일하고 있었다.
"언니, 이제 쉬어요. 지금부터는 제가 운전할게요. 얼른 애기 받구요."
"응, 고마워."
지수의 말을 들은 최미소와 한세아는 서로 자리를 바꿨다. 사람이 움직임에 따라 차량이 두어 차례 흔들린다.
그렇게 무사히 자리를 바꾼 그녀들. 한세아는 온기가 채 식지 않은 핸들을 잡았고, 최미소는 조수석에 앉아 서럽게 울어대는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다행히 배가 고픈 것이 정답인 듯 지안이는 울음을 뚝 그치고 정신없이 젖을 빨았다.
울다 지쳐 잠든 아기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었는데 밥을 잘 먹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 한결 가셨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분유를 타올까 했지만, 냉장 보관도 아니고 상온 보관일 경우에는 1시간 이상 보관하면 큰일 난다는 소리에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아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괜히 차량을 움직였다가 아이가 체하기라도 하면 낭패였으니까. 의사도, 약도 없는 상황에서 최대한 조심해야 하지 않겠나.
"······."
괜스레 좀이 쑤신 나는 직진으로 쭉 뻗은 철도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역사가 있었다. 정확히는 백화점과 결합한 역사였다.
영등포역.
수원역처럼 민자역사인 곳.
허나 지금은 폭격에 맞아 건물 상단부가 뭉개진 곳.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라 뼈대는 유지되고 있었으나 건물을 장식하고 있던 외벽이나 유리창들은 모조리 깨져 나간 후였다.
"아저씨, 오늘 어떻게 할 거야? 저기서 하루 자고 가?"
"···음. 예린아, 뭐 보이는 거 있어? 저 건물 어때?"
나는 지수에게 줄 답을 잠시 미뤄두고, 예린에게 물었다. 이럴 때면 예린의 눈이 유용하게 쓰였으니.
"아까는, 그러니까 신도림역에서는 검은빛이 자주 보였는데 지금은 잘 안 보여요. 앞으로 갈수록 검은 게 줄어드는 것 같아요."
아이는 눈을 부릅뜨며 신중하게 시야를 움직였다.
"그래? 그럼 오늘은 저기서 보내야 하나···."
하늘에는 이제 희미한 회색 구름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검은 먹구름뿐. 지금 당장에라도 폭우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도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많이 피곤해 보였으니 이쯤 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쉬고 가는 건 좋은데 한강은 어떻게 건널 건가요? 여기만 넘어가면 바로 한강이 코앞이잖아요."
최미소가 밥을 다 먹은 아기를 소화시키기 위해 등을 살짝 두드리면서 물었다. 그녀의 손이 아기의 등을 어루만지자 아기는 이내 작게 트림을 하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래,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남산으로 올라가려면 한강을 거쳐야 했다. 그 과정이 다리를 건너는 것이든, 고무 보트를 타고 강을 넘는 것이든 간에 강을 넘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그냥 다리 건너면 되지 않을까요? 뭐, 동작 대교나 한강 대교, 원효 대교, 마포 대교··· 이런 다리들 많잖아요? 설마 그게 전부 끊어졌을까요? 다 끊어졌다고 해도 세아 언니가 우리 데리고 날아가면 되고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면 가능은 할 테지만, 온갖 이목이 다 쏠리는 게 문제예요. 기껏 넘어가서 착지하더라도 그 주변이 나무 인간들로 덮여 있다면 낭패잖아요."
"그럼 우리가 가져온 고무 보트라던가···?"
우리는 현재 가지고 있는 수단 중에서 강을 넘어갈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여기서 아무리 대화를 나눠도 직접 가서 보지 않는 이상 방법을 정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를 보낼 곳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일단 다시 출발할게요. 나머지 이야기는 쉬면서 나누자구요."
한세아의 제안에 나, 지수, 예린, 최미소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르르릉-
픽업 트럭이 전진함에 따라 우리는 몸과 정신을 바짝차렸다. 건물 잔해물이 곳곳에 널린 역사로 향하는 만큼 주변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몰랐던 까닭이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주변을 경계한 덕분인지 영등포역 지상 승강장 지근거리까지 도착한 우리는 곧장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지수가 당혹성을 토해내며 알아차렸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었다.
"······어?"
승장강 주변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돌아다니는 군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 ━━!"
우리가 군인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처럼 그들도 접근하는 차량을 인지한 듯 두 명의 군인들은 손을 번쩍 들며 무어라 외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었을까.
대체 무어라고 하는 건지,
이대로 차를 세워야 하는 건지 무시하고 가야 하는 건지, 군인들이 어떻게 살아 있고,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우리는 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일단 머리부터 깨야 하나?'
뜬금없이 조우한 군인들에 의해 머리가 텅 비어 버린 상황 속에서 먼저 움직인 건 지수였다.
벌컥!
"아저씨! 저 사람들 잡아!!"
지수가 차 문을 단숨에 열며 외쳤다.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푸른 스파크를 튀기며 앞으로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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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린이 장패드!
한세아 장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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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신폭신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