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17화 (318/497)

Chapter 317 - 317. 길 (5)

최명철의 말에 복잡한 심경이 들었는지 한세아의 눈빛에는 연민의 감정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불쌍하게 말해도 안 풀어 줄 거예요."

그녀는 냉정했다. 한세아는 군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짐을 조금 더 꼼꼼히 뒤졌다. 그래도 나오는 것이 없자 그녀는 혀를 쯧쯧 찼다.

그랬던 한세아는 다른 것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번에는 군인들이 소지하고 있던 총기였다.

철컥-

그녀의 손길에 따라 총기는 분해되었다가 다시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추 총기를 어떻게 쓰는지 감을 잡은 한세아는 자연스럽게 총기를 자신이 챙겼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거 제 거··· 에휴, 그냥 가지십쇼. 그걸로 저희만 쏘지 않으시면 됩니다."

최명철은 자기 여자 친구나 다름없는 총기를 눈앞에서 강탈당하는 모습을 보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는 이내 자신도 모르겠다며 죽이지만 말아 달라는 말을 끝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무튼 조금 전에 저희가 나온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셨었죠. 저희는 영역을 점점 넓히고 있던 안개가 갑자기 사라져서 부리나케 정찰 나온 겁니다. 그렇게 안개가 있던 경계선에서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당신들이 차를 타고 나왔고요."

"······."

"대체 우리가 뭐냐고요? 죄송한데 이건 우리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당신들 대체 뭡니까? 당신들이 안개를 없앤 겁니까?"

그리 묻는 최명철은 바깥에 나와 있는 나, 지수, 한세아, 차량 안에 있는 예린, 최미소, 지안이 순으로 바라보았다. 차례대로 향하는 시선은 아이들이 보이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특히 완전히 젖먹이인 지안이를 보았을 때 그러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네요. 일단 여기 계십쇼. 비가 더 많이 오기 전에 주변 정리 좀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나는 최명철이 원하는 답을 주는 대신에 몸을 돌렸다.

쏴아아아···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어느새 기세를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늦기 전에 방수포를 펼치고, 간이 텐트를 쳐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 기온이 떨어질 테고 그러면 일행이 제대로 쉬지를 못할 테니까.

휙- 휙-

나는 군인들이 보이지 않는 시야각으로 지수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내 손짓을 바로 알아들은 지수는 꼬리를 흔들면서 곧장 내게 따라붙었다.

이윽고.

"···주변에 정말 아무도 없어?"

"어, 거짓말은 안한 것 같더라. 세아 언니가 시선을 끌어 주는 사이에 한 바퀴 돌고 왔는데 몰래 남겨둔 표식 같은 것도 없었어. 내가 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정도면 군인들이 우리의 말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나와 지수는 그들이 말한 것들을 하나씩 검증해 나갔다.

"아저씨, 그 사람들 눈이 이상하거나 그런 건 없었지?"

"없었어. 눈은 정상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예린이한테 한 번 더 봐달라고 하려고."

내가 군인들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그들의 눈이었다. 정확히는 검은 입자가 그들의 머리를 잠식했는지의 여부였다.

만약 처음으로 조우한 군인들이 이미 오염되었다면 그들의 집단은 진작에 끝장났다는 의미나 다름없었으니까.

'군인들 상태는 정상이었어. 너무 순순한 것이 조금 이상하긴 해도.'

이미 제압되었다는 상황에서 엇나가는 태도를 보이는 것보다 협조적으로 나오는 것이 처우를 결정할 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일까. 아무튼 굳이 주먹을 쓰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인 일이었다.

"군인들이 아저씨를 찾고 다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생각해 봤어? 내가 잠깐 생각해봤는데 아저씨만 찾은 것이 아니고 그냥 졸린사 연구소에 관련된 인물들을 전부 찾고 다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아저씨 이름은 모른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어."

"나도 너랑 비슷하게 생각했어. 연구소가 봉쇄되었다고 했으니 그 문을 열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겠지. 그리고 관련자들을 계속 찾아다녔다는 소리는 연구소의 봉쇄를 풀지 못했다는 말일 가능성이 크고."

솔직히 현대 무기 체계로 봉쇄를 뚫지 못했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었으나, 가능성은 항상 열어두워야 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어색한 것이 드러난다. 바로 군인들의 태도였다. 그동안 찾았다는 사람을 만난 것치고는 극적인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뭐랄까.

'와! 드디어! 마침내!' 이런 느낌이 아닌 약간 '···이제서야.' 이런 느낌이 들었다. 이런 반응은 무언가를 포기한 사람 특유의 반응이었다.

워낙 갑작스레 조우한 터라 서로 얼떨떨한 감정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기에 시간을 두고 차차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순간, 불안한 상상이 떠올랐으나 애써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나는 지수에게 트렁크에서 방수포랑 사다리를 찾고 있으라며 말한 뒤,

똑똑-

차 유리창을 살짝 두드렸다.

지이잉-

창문이 살짝 내려가면서 비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미소가 뚜렷하게 보였다.

"미소씨,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다친 사람도 없고 무사히 잘 끝났어요. 이제 남은 건 텐트를 치는 건데 그때까지 조금만 더 차 안에서 대기해주십쇼."

"······다행이네요. 텐트는 어디에 치실 건데요?"

최미소는 이어지는 내 말에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아, 텐트는 저기 승강장 지붕 위에 칠 겁니다. 지상에서 조금 떨어져 있고, 위에 역사가 있어서 비를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럼 그쪽으로 차를 가까이 댈 게요. 뒤에 타요."

"아뇨, 어차피 바로 코앞인데요, 뭘. 저는 그냥 걸어서 가겠습니다. 지수야! 차 움직일 거니까 뭐라도 잡고 있어!"

최미소의 제안을 고개를 저어 사양한 나는 트렁크에 있는 지수에게 외쳤다.

"알았어!"

곧장 되돌아오는 지수의 답.

"아, 그리고 예린아. 저기 도착해서 내리면 군인들 좀 봐줘. 검은빛 보이면 바로 말해주고. 아니다, 말해 줄 필요 없이 상태 이상하면 바로 나 불러. 알았지?"

"네, 오빠!"

예린이 입술을 앙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꼬리도 같이 허리를 숙였다가 폈다.

텅- 텅-

나는 이제 대화는 끝났다는 뜻으로 차체를 살짝 두드렸다.

부르릉···

차량은 이내 서서히 바퀴를 굴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굵어지는 빗줄기를 맞으면서.

"······."

점점 거리를 벌리는 차량을 본 나는 티 나지 않게 속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빗방울이 어서 따라가지 않고 뭐 하냐는 듯이 툭툭 건드린다.

나는 조금만 더 있다가 움직이겠다는 듯이 바닥에 깔린 자갈을 툭툭 발로 찼다. 지금이야 최미소와 어찌어찌 대화를 나눴으나, 다음은 어떻게 될지 몰랐던 까닭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내가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아직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사실 시간이 문제는 아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크게 변하는 건 없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아마 하루가 지난 내일에서는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야, 이틀이 지난 모레에서는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이야, 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언제까지고.

눈을 감았다가 뜨니 차량은 벌써 승강장 구역에 정차를 한 상태. 지수가 어서 오라며 손을 흔든다.

···탁 잘그락-

나는 지금 해야 할 일을 억지로 머릿속으로 상기하며 한 발 내디뎠다.

청승을 부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

우리는 원래 예정대로 붕괴된 역사 승강장 지붕 위에 올라가 자리를 잡기로 했다.

철컹!

"지수야, 내가 위에 올라갈 테니까 밑에서 하나씩 밀어 줘."

내가 길게 펼친 사다리를 지붕에 걸치며 한 말에 밑에 있는 지수, 예린, 한세아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여기!"

지수는 승강장 지붕 위로 올라간 내게 곧장 방수포를 건넸다.

"어, 잡았다. 이제 손 놔도 돼."

나는 넘어지지 않게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 방수포를 잡아당겼다. 돌돌 말린 방수포의 묵직함이 손끝에 전해졌다.

다른 건물을 찾아서 들어가면 이런 번거로운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거기가 안전한지 판단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곳을 여유롭게 탐색할 시간이 없었다.

조금이나마 있던 시간은 군인들을 심문하는데 써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주변이 눈에 잘 보이고, 지상에서 바로 공격을 당하지 않을 정도의 높이인 지붕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승강장에 주차해 둔 픽업 트럭을 타고 도망가면 되는 일이고.

'방울 줄은··· 못 쓰겠네.'

집을 떠나기 전에 칼카타와 함께 잔뜩 만들어 두었던 경고 알림이. 무언가 접근한다면 곧장 알아챌 수 있게 주변 전신주에 빙 둘러 설치하는 물건이었다.

허나, 지금 상황에서는 방울 줄을 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는 탓에 방울이 쉴 새도 없이 울려댔던 까닭이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울리는 방울 소리는 오히려 우리에게 경고가 아닌 위험을 가져올 수 있으니 오늘은 쓰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런 판단과 함께 이런 물건에서도 칼카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들이 없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바로 그때, 아래에서 내 청승을 깨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군인 아저씨, 이거 줄까요?"

예린이 여전히 묶여 있는 군인들 앞에 쪼그려 앉아서 입을 연 것이었다. 아이는 품에서 꺼낸 젤리를 야무지게 뇸뇸거리고 있었다.

"진짜?"

부사수는 반색하며 입을 벌렸다. 그는 설탕이 한가득 묻어 있는 젤리를 본 순간부터 침을 꼴깍 삼키고 있는 중이었다. 사수인 최명철이 자신을 한심하게 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아뇨, 거짓말이에요!"

"아······."

고개를 푹 숙이며 너무 아쉬워하는 소리를 낸 부사수.

"움, 맛있다···!"

예린은 킥킥 웃으면서 자랑하듯이 젤리를 입에 한가득 넣고 우물댔다.

군인들 상태를 확인하라고 보낸 예린이나 아이의 장난에 그대로 넘어가는 부사수나 대체 뭣들 하는 건지.

'···진짜 어디 좀 모자란가?'

나조차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부사수는 너무 순진해 보였다. 특히 위험해진 세상이라 그런지 더욱 대비되게 보이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그런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실례되는 말이지 않은가.

"에라, 이 자식아! 지금 이 상황에서 젤리가 그렇게 먹고 싶냐? 어? 먹고 싶어?"

그러나 그의 사수인 최명철은 참지 못하고 외치고 말았다. 그동안 쌓였던 게 터진 모양이다. 그는 묶인 상태였기에 부사수를 어찌하지는 못하고 분통만 터트릴 수 있었다.

"아이, 왜 그러십니까!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하잖습니까! 저는 내일을 위해서 사과 나무를 심는 것보다 그냥 사과를 바로 먹는 게 좋은 파란 말입니다! 어차피 앞날도 모르는데 입이라도 행복해야죠!"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아오! 내가 너 때문에 속이 터져!"

"아, 진짜 너무하네!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네? 네는 반말이고 이 새끼야!"

별안간 눈앞에서 벌어진 촌극에 할 말을 잃은 지수와 한세아. 그녀들은 이내 신경을 끄고 제 할일을 하기 시작했다.

최미소는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는 지안이의 눈을 가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녀들처럼 내 할 일이나 하기로 했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저 상황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건 오직 예린뿐이었다. 아이는 나름 진지하게 그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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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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