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8 - 318. 길 (6)
휘리릭!
그드득-
나는 승강장 지붕 위에 있는 전신주에 로프를 걸어 잡아당겼다. 방수포를 들어 올리기 위함이었다.
본래 전신주에 함부로 손을 대는 행위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전선에 흐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아니, 하나 있기는 했다. 고압 전선줄을 타고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득-
방수포 중앙의 고리와 연결된 로프를 조금씩 아래로 당기니 방수포는 점점 삼각형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단순히 위로 올리기만 한 상태라 삼각형보다는 축 늘어진 미역에 더 가까웠다.
찰칵!
꽈악- 꽉-
바람이 불어도 방수포가 날아가지 않게끔 고리를 마저 연결시키고, 두어 차례 더 잡아당겨 확인한 나는 이 정도면 튼튼하게 묶였다고 판단했다. 이제는 포를 넓게 펼칠 차례였다.
"지수야, 텐트 지주핀 들고 올라와서 나 좀 도와줘. 급한 건 다 끝났고 이제 펼치기만 하면 돼."
"알았어!"
보관함에서 고정핀을 챙긴 지수는 곧장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윽고.
"아저씨, 여기다가 박아 넣으면 돼?"
"어어, 거기. 방수포가 지붕을 넘어설 수 있게."
나와 지수는 아래로 늘어진 방수포가 시야를 가리지 않게 들어 올려주며 핀을 승강장 지붕에 박아 넣기 시작했다.
탕! 탕! 탕!
지붕 철판에 못이 박히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위에서 내려치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말뚝은 점점 깊게 박혀 단단하게 굳어갔다.
쏴아아아······
토통- 토도도동-
지붕 철판에 빗줄기가 박히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통통 튀는 물방울 소리가 울릴 때마다 우리는 행동을 좀 더 빠르게 움직였다.
찰박-
어느새 녹슨 지붕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바로 위에 영등포역 고가가 있는 덕분에 비는 바로 머리 위에 떨어지지는 않고 있었으나,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 덕분에 우리는 옆에서부터 젖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기온이 확연하게 떨어지기까지 했으니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행을 위해서라도 서두를 필요성이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면서 흘깃 아래를 바라보니, 여전히 군인을 감시하는 한세아와 그들을 구경하는 예린이 보였다.
"······."
그리고 차 안에서 지안이를 달래고 있는 최미소가 보였다. 아기를 품에 안은 그녀는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저씨?"
순간 내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지수가 조심스레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자, 빨리 마저 고정시키자! 이거 하나만 더 박으면 되겠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든 다음, 괜스레 목소리를 키웠다. 이내 탕! 소리와 함께 방수포는 완전히 삼각형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방수포가 지붕을 넘어서 펼쳐졌고, 혹시 몰라 배수구도 몇 개 뚫어 놓았으니 빗물이 아래에 고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세아씨! 다 끝났습니다! 캠핑용 매트랑 담요 챙겨서 올라오십쇼!"
"네! 금방 갈게요!"
싸늘해진 기온에 팔을 쓸어내리고 있던 한세아. 군인들의 포박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한 그녀는 예린과 함께 트럭 트렁크로 이동했고, 거기서 여러 물품들을 하나둘씩 꺼냈다.
그렇게 한세아가 차량에서 꺼낸 것은 내가 말한 매트와 담요, 최미소와 지안이였다. 거기에 각종 도구가 담긴 가방까지.
'차량은 여기 그대로 두면 되고, 수정은···.'
현재 푸른 수정은 여전히 트렁크에 실린 상태. 수정이 푸른 불에 반응했다는 것이 떠올랐던 나는 다시 수정에게 불을 가져다 대어 보았었으나, 이번에는 별다른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었다.
거대한 꽃의 뿌리와 푸른 수정이 분리된 후부터 도시에 퍼지지 않는 파장.
그 묘한 파장이 흘러나와 이목을 끄는 것도 아니고, 누가 훔쳐 가려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힘들게 굳이 위로 올릴 필요는 없을 듯했다.
만에 하나 누가 푸른 수정에 손을 대려고 하더라도 불침번을 서는 사람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더욱 그러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생겨도 곧장 도망치거나 싸울 수 있는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현우씨, 여기요! 매트 가져왔어요!"
"잠시만요. ······이제 됐어요. 차례대로 올라오십쇼."
나는 한세아가 건넨 접이식 매트를 펼쳐 바닥에 깔았다. 비록 엠보싱 매트일 뿐이라 뛰어난 보온 효과는 없겠지만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인 상황이었다.
적어도 녹슨 철판을 막기는 해야 할 것 아닌가. 매트가 조금 얇아 보이는 것에 비해 생각보다 푹신하기까지 했고.
이 이상 바라는 건 사치가 분명하리라.
"어두워지기 전에 언니 먼저 올라가요. 지안이는 잠시 저한테 주시구."
"···응, 고마워."
한세아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최미소는 양손으로 사다리를 붙잡고 한 칸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사다리는 삐걱거리며 불안한 소리를 토해냈다.
후두둑-
그녀의 신발에 끼어 있던 자잘한 흙 알갱이들이 떨어지면서 물기 맺힌 사다리에 달라붙는다.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고, 물기에 잡혀 고정되어 버린 흙 알갱이들은 이내 자기들끼리 뭉쳐 작은 덩어리를 형성했다.
마치 옹기종기 모여 앉을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잡힌 우리 말이다.
최미소, 한세아, 예린 순으로 올라왔고, 군인들을 바닥에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들 또한 일으켜 세워 올라오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부사수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일이 있었으나, 다행히 내가 붙잡고 있었던 터라 다치는 일은 없었다.
순간 그냥 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이윽고.
"······."
"······."
모든 인원이 천막 안에 들어오고 나니 맴도는 건 침묵이었다.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점점 거세지는 빗소리가 빙빙 천막 안을 돌았다.
깜빡- 깜빡-
천막 가장자리에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불면서 천장에 고정된 미니 랜턴이 흔들린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간혹 지안이가 칭얼거렸지만 등을 토닥이자 아기는 금방 진정했다.
침묵을 깨고 싶지 않아 하는 건지 계속 이어지는 침묵이 입을 다물게 만드는 건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꼬르륵-
누군가의 배꼽시계가 우렁차게 울렸다. 소리가 어찌나 길게 이어지던지 듣지 못한 척을 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저 밥 좀 주면 안 되겠습니까. 오늘 온종일 움직였더니 배고픕니다."
부사수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 참 넉살도 좋네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한세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부사수는 그저 순박하게 웃을 뿐이었다. 사수인 최명철은 데리고 다니기 창피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건 참아도 제가 배고픈 건 잘못 참아서···."
"······준비할까요, 현우씨?"
이마를 탁 친 한세아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마침 우리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 다 같이 저녁을 먹는다고 나쁠 것도 없었다. 무언가를 같이 먹는다는 행위는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많이 줄여주는 효과가 있었으니까.
'서로에게 물어볼 것이 아직 많이 남기도 했고.'
그리 생각한 나는 한세아를 도와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얌전히 앉아 꼬리만 흔들고 있던 지수와 예린이 도와준 덕분에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애초에 복잡한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보글보글-
가스 버너 위에 올려진 통조림이 가열되면서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몸을 덥혀주는 자그마한 열기는 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 앞에는 통조림이 하나씩 놓이게 되었고, 그녀들은 군인들을 주시하면서 입을 우물거렸다.
그리고 나는 군인들에게 밥을 먹여주면서 물었다. 아직 신뢰도가 쌓이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손목을 풀어 주는 건 좀 그랬으니까.
"아까 못다 한 이야기 이어서 합시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못 들었는데 당신들이 여기 왜 나와 있었다고요?"
"저흰- 크흠! 저희는 2인 1개조로 이루어진 정찰조입니다. 바깥으로 나온 이유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안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여의도에 고립되어 있었던 것만큼 저희는 주변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드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큼지막한 닭가슴살을 꿀꺽 삼킨 최명철이 답했다.
그는 현재 벙커에서 여러 정찰조가 여의도 주변을 탐색한다는 계획이 세워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장 인원을 차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비번이었던 자신들이 나오게 된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인원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아남은 수가 내 생각보다 적을 수도 있겠어.'
그렇게 벙커 바깥으로 나온 인원이 달랑 둘밖에 되지 않는다니, 대체 얼마나 죽어 나간 것일까.
"그래서 승강장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거예요?"
"······어슬렁이라고 하니까 어감이 좀 그렇습니다···. 저흰 나름대로 목숨 걸고 나온 건데···."
툭 튀어나온 지수의 물음에 부사수도 같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는 이내 옆에서 눈치를 준 최명철에 의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내가 준 연어살 조각을 냉큼 받아먹었다.
"그럼 저를 찾았다는 건 무슨 말이었습니까? 몽타주를 그려서 찾을 정도면 꽤 절박했다는 것 같은데요."
"우선 당신이 저희가 찾던 인물과 동일 인물이라는 가정하에 말을 잇겠습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도 모르고, 괜히 이야기가 겉돌지 않게 처음부터 말씀드리는 게 낫겠지요."
"대체 말을 얼마나 길게 하려고 처음부터 한다고 그래요? 그냥 아저씨를 왜 찾았냐 이것만 말하면 되잖아요?"
툴툴거리는 지수의 말에 비가 내리는 바깥을 보며 센치해지려던 최명철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에이, 지수씨. 어차피 여기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조용한 것보다 이야기 듣는 게 낫잖아요? 잠자코 있어 봐요."
한세아는 지수에게 고개를 저으며 너무 타박하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최명철에게 다시 말하라는 듯 시선을 보냈다.
"또 나만 정없는 사람이지. 알았어요. 가만히 있을게요."
지수는 입을 삐죽 내밀며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고, 나는 그녀의 손을 토닥이는 것으로 그녀의 기분을 달래주었다.
"······아무튼, 저희 제30보병여단은 남산에 자란 세계수를 저지하라는 명령받고 움직였습니다. 북을 경계하는 부대에게 갑자기 남하해서 서울을 치라는 명령이 하달되니 모두가 당황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요."
잠시 주춤한 최명철은 특히나 부대원 모두가 기절한 상태에서 막 눈을 뜬 직후라 더욱 정신을 차리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마치 단체로 이세계로 전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짐승 귀나 꼬리가 붙어 있는 모습도 그렇게 되는 데에 한몫했다는 말과 함께.
어투는 농담조였으나, 그 안에 담긴 말만큼은 절대로 농담이 아니었다.
아마 그때 부대는 발칵 뒤집혔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엉망이었겠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위에서 내려온 명령.
이해되지 않는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수행한 군인들.
어쩌면 그 명령을 따랐던 이유가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군인인데 일단 따라야지. 어느 하나 당황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는 상황 속에서 저는 솔직히 서울로 향하는 준비하는 동안만 해도 실전에 가까운 훈련인 줄 알았습니다. 저뿐만이 아닌 제 동기들도 그랬습니다. '뭐, 진짜로 서울로 내려가겠어? 그냥 훈련이겠지. 뭔진 몰라도 이러다가 말 거야.' 이러면서요."
최명철은 당시를 회상하는 듯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부대 바깥을 나가는 순간, 흔히 영화에서나 보던 좀비 같은 것들이 수풀에서 튀어나와 제 동기의 목을 물어뜯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