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19화 (320/497)

Chapter 319 - 319. 길 (7)

"동기의 피뿐만이 아닌 선임이나 후임의 피가 제 전신을 적셨을 때부터, 귓가에 살이 찢기는 소리가 들린 그때부터. 저는 간신히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심정은 지금도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솔직히 그 뒤는 어떻게 되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나고요."

최명철은 그저 무의식적으로 방아쇠를 당긴 느낌만 남아 있다며 팔을 살짝 움직였다. 손가락을 까딱거린 모양이다.

그는 억지로라도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끝내 기억이 나지 않는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러 복잡한 감정이 담긴 숨이었다.

"그렇게 저희는 어떻게든 서울로 왔고, 봤습니다. 남산에 자리 잡은 거대한 나무를요. 그리고 우리를 죽이려는 괴물들을 쏴 죽이고, 전차로 밀어붙이면서 살아남은 시민들을 대피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 군은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와 무전기로 끊임없이 공유되고 있는 정보를 종합해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

"현재 이 사태는 졸린사 연구소에서부터 시작된 일이며,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거목이 원흉이라는 것을. 그리고 또 한 가지. 졸린사의 두 번째 연구소라 불리는 곳에 증폭기라는 게 있다는 것까지도."

최명철은 말하기에 앞서 생각을 잠시 정리하다가 말을 이었다.

"뒤에 말한 정보는 키가 작은 분들이 알려 준 정보입니다. 자신을 난쟁이라 부른 사람들이 자기들은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했는데, 그때는 워낙 정신이 망가진 사람들이 많았었기 때문에 그냥 이번에도 그런 경우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지구 바깥에서 왔다는 걸 믿지만요."

그는 난쟁이들이 보여 준 능력을 보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정교한 손재주를 비롯한 여러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그중 가장 압권은 땅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고.

그리 말한 최명철은 그분들 덕분에 벙커에서 시민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공간을 확장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사람들만이 있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아무튼 종합한 정보를 믿고 두 번째 연구소를 찾은 다음 그곳에 진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닫힌 문이 열리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이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이 없어요."

"······현대 무기가 통하지 않았겠죠."

내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최명철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능한 한 서둘러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한 군이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전차와 폭약이면 못 여는 문이 없다고 판단하게 만든 그 안일함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부대원들에게 수많은 죽음을 가져다주었고요."

- 처음부터 난쟁이분들이 말해 준 대로 관련자를 먼저 찾았더라면···.

자조적으로 후회하는 말을 툭 내뱉은 최명철은 이야기를 이었다.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겪고 나서부터 몽타주를 들고 연구소 관련자들을 찾는 것에 박차를 가했다는 것, 사진을 얻고 싶어도 자료를 얻을 수가 없어서 몽타주로 대체한 것, 그렇게 그려진 인물은 귀가 긴 남성, 어금니가 큰 남성, 그 외 나를 포함한 다수라는 것.

하지만.

······아무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났고, 이상한 안개까지 사방에서 밀려오자 모두가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죽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이 벙커 내부에 팽배해졌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진격할 수 있는 사람도, 싸울 의지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안개가 사라졌고, 저희가 당신을 본 겁니다."

"······."

"솔직히 아직도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부. 전부 다 죽고, 대부분이 다 포기했는데. 이제서야.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찾았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믿기지 않아요."

정확히는 우리가 찾은 게 아니라 당신이 제 발로 우리에게 찾아온 거긴 하다며 말한 최명철.

"그러니까 이제 말해주십쇼. 당신은, 저희가 찾던 사람이 맞습니까."

그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내 눈을 마주 보았다. 검은 입자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그의 눈에는 미약하게 남은 삶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보다 어리거나 끽해야 두어살 많을 군인은 앳된 인상을 가진 것에 비해 눈이 깊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 이름은 이현우. 졸린사 연구소에서 비밀리에 실험을 받은 사람이며, 당신들이 그토록 찾던 관련자가 맞습니다."

나는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를 한 번씩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들은 최명철이 극적인 반응을 보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뜻 모를 한숨만 길게 내쉬었을 뿐이었다.

"다행입니다. 예전에 당신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찾으면 최대한 협조적으로 대하라고 했었거든요. 이젠 옛말이긴 해도 그 뒤로 명령이 새로 하달된 적이 없으니 그대로 지키는 게 맞다고 생각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어쩐지 묘하게 말을 잘 듣더라니. 우리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함인 것만이 이유가 아니라 그런 이유가 또 있었던 것이다.

"최명철 상병님, 그거 아까 밑에 있을 때 저한테 하신 말이랑 다른데요? 저한테는 괜히 뻗대다가 맞고 싶지 않으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셨잖습니까? 여기서 인식 한번 잘못 박히면 바로 머리에 구멍 뚫린다고도 하셨고."

······아닌가 보다.

"제발! 제발 좀! 부사수면 부사수답게! 눈치 좀! 어? 제발!"

"제가 또 뭐 잘못한 겁니까? 죄송합니다."

답답한 가슴을 퍽퍽 칠 수도 없는 최명철은 이를 악물면서 부사수를 바라보았고, 부사수는 깨깽하며 반사적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담았다. 그러나 묘하게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나까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게 하였다.

"······아니야. 그냥, 그냥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최명철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기, 이현우씨. 제가 말한 이야기들은 전부 사실입니다. 방금 부사수가 한 말은 잊어 주시고, 이것 하나만 기억해주십쇼."

최명철의 말은 거세게 내리고 있는 폭우 소리에 잡아먹혀 순식간에 사라졌다.

쏴아아아아아- 휘이이잉-!

대신 빗줄기가 철판을 때리는 소리와 강풍에 펄럭이는 방수포 소리가 빈자리를 채웠다. 방수포를 제대로 고정시키지 않았더라면 바람에 날아갔을 정도로 비바람이 거셌다.

단순히 지나가는 비가 아닌 느낌이었다.

"일단 알았으니까 담요나 잘 여미고 계세요. 언니, 언니도 담요 한 장 더 둘러요. 애기 춥겠다."

지안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한세아는 군인들과 최미소에게 담요를 더 둘러 주었다.

원래는 군인들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그녀였건만. 이제 조금쯤은 믿어도 될 것 같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근데 손목은 언제쯤 풀어 주시는지···?"

"네? 그건 안 풀어 줄 건데요?"

"아, 이건 안 되는구나. 넵, 알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한세아의 시선에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부사수. 그냥 한번 찔러봤다는 태도였다.

"······이번에는 저희가 물어도 되겠습니까?"

부사수의 모습에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억지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본 최명철. 그는 저 푸른 수정은 왜 저렇게 큰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아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자신들에게도 푸른 수정이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저렇게 큰 건 처음 본다는 말을 한 그였다. 군인들은 수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우리가 불을 피우는 모습에도 놀라는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와 함께 그동안의 여정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가끔 지안이가 칭얼거릴 때가 있었으나, 아기는 최미소가 어르고 달래자 금방 진정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군인들이 말해 준 것처럼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시간은 충분했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 이건 단순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아닌 서로를 조금이라도 더 믿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

우리의 이야기를 다 들은 최명철.

"······당연한 말이겠지만, 당신들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군요. 뭐, 이런 세상에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나마 좋은 이야기를 추리면 전우들이 만든 생존자 캠프가 기능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고, 나머지는··· 다 나쁜 이야기라 뭐 추릴 것도 없네요."

그는 비록 캠프를 만든 것이 자신이 아니라고는 해도 살아남은 시민들이 있다는 소리에 기뻐했다. 특히 전우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생겼다며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그것도 잠시, 캠프가 전부 멀쩡하지는 않다는 말에 얼굴을 굳혀야만 했지만.

"후우···, 수원역은 완전히 무너져서 아무도 없을 거라고 하셨고···. 의왕시는 캠프가 아직 돌아가고 있다고 하셨죠?"

"네, 의왕시 생존자 캠프는 약간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 겁니다. 저희들이 확인했으니까요."

나는 의왕시 캠프에서 만난 자매와 말이 많은 아저씨를 떠올리며 답했다. 그곳을 떠난 지 아직 한 달이 넘지 않았는데, 시간이 오래 지난 것처럼 기억이 희미했다. 추억을 곱씹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바빴던 탓이다.

내가 말을 이으려는 그때.

"그럼 혹시 성남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쪽에 제 부모님이랑 최명철 상병님 부모님도 계시는데."

부사수가 우리에게 물었다. 예린에게 무어라 협상을 걸던 그가 갑작스레 이야기에 끼어든 것이다.

"성남···. 그쪽 지역은 몰라요. 우리는 그냥 수원에서 철도로 의왕으로, 그 다음에 서울로 올라온 거라서요."

그 물음에 답한 건 지수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벨트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고, 손가락으로 선을 그어 경로를 알려주었다. 가족이 성남에 있었다는 소리에 연민의 시선을 보낸 건 덤이었다.

"괜찮습니다. 나중에 제 임무가 끝나면, 제 눈으로 직접 가서 확인할 거거든요."

최명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그의 얼굴은 미련이 가득했다. 흔히 미련이 그렇듯 높은 곳에 잠시 올랐다가 추락한 얼굴이었다.

"······살아 있을 겁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봐 왔던 캠프들처럼 아직 버티고 있는 캠프가 있을 수도 있다. 아니, 확실하게 있을 것이다, 어린 병사들의 가족과 연인이 있는 캠프가 무사한 상태일 것이라고, 무엇 하나 확정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 말하며 어설픈 위로를 해주었다.

최명철은 표정을 금세 가라앉혔다. 예린과 협상을 하고 있던 부사수를 본 덕분이었다.

"정말 거기 가면 갚을 거예요?"

"그렇다니까! 네가 가지고 있는 초콜렛 나 주면 내가 나중에 열배로 갚아줄게."

"약속 안 지키면 진짜 혼나요. 우리 언니랑 오빠가 군인 아저씨 혼내줄 거예요!"

"아이, 알았어."

부사수와 예린은 서로 마음에 드는 협상 타결 지점을 찾아냈는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는 이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초코바나 사탕 같은 간식들을 부사수 입에 하나씩 넣어 주었다.

최명철은 여전히 바보같을 정도로 순박한 부사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어쩌면 저것이 그가 부사수를 욕하면서도 끝까지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아닐까. 이런 세상에서 웃는다는 건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으니까.

"야, 임마. 부사수. 맛있냐? 어떻게 뺏어먹을게 없어서 꼬맹이 걸 뺏어먹냐."

"뺏은 거 아닙니다. 이건 정당한 거래라고요."

"그렇게 먹고도 또 들어가?"

"먹는다는 건 산다는 거잖습니까. 저는 먹어서 살아 있다는 걸 체감합니다."

엄숙하게 말하는 부사수의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찌나 야무지게 씹던지.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지수, 한세아, 최미소에 입가에는 어느새 헛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저기, 예린이라고 했니? 나도 한 입만."

"아저씨도 저한테 열 배로 갚을 거예요?"

"열 배나 줘야 해? ······알았어. 열 배로 돌려 줄게."

최명철은 초코바 하나를 얻어먹는 대가로 초코바 10개를 바친다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는 이내 부사수와 사이좋게 입을 우물거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사수나 부사수나 똑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어두운 바깥을 바라보았다.

···쿠르르릉······

먹구름 안에서는 뇌전이 일고, 거센 바람이 주변을 휩쓸고 있는 풍경.

쏴아아아아아- 후두둑-

토동- 토도도동-

그칠 생각도 하지 않는 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는 중이었다. 녹슨 철판과 자갈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무래도 태풍이 오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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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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