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1 - 321. 길 (8)
"아저씨, 이거 방수포라도 더 둘러야 할 것 같은데?"
내 옆에 착 달라붙어 있던 지수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펄럭이는 천막을 둘러보고 있었다.
파르르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요동치는 천막. 찬 바람이 솔솔도 아니고 뭉텅이로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우리가 하룻밤만 보낸다고 해도 이대로 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러다간 추위에 몸이 상하는 게 먼저일 테니까.
적어도 바람을 추가적으로 막아줄 수 있는 가림막이라도 설치해야 했다. 특히 우리에게는 아기도 있으니 신경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어, 지수야. 금방 갔다 올게. 어차피 여분의 방수포도 여기 있어서 밑에 내려갈 필요 없으니까."
그리 말한 내가 몸을 일으키자, 덩달아 따라 일어나려던 지수는 몸을 굳혔다. 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세아와 예린도 마찬가지였다.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됐습니다. 사람 많으면 괜히 더 복잡해져요."
나는 군인들에게 손을 휘적거려 밀어냈다. 아직 묶여 있는 상태인 군인들이건만, 어떻게 나를 도와 준다는 말인가. 경계심이 많이 풀어지기는 했어도 포박을 풀어 줄 생각은 아직 없었다.
쏴아아아아아-!
천막을 젖히고 바깥으로 나오니 비바람이 훅 들어온다. 그 비는 입구 근처에 있던 군인들에게 쏟아졌다.
그리고 거센 비바람은 무어라 말을 하려던 최명철의 입을 슬그머니 닫게 만들었다.
"그··· 예.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으니까요."
눈치를 보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부사수는 사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황급히 끄덕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건 덤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천막을 닫아주었다.
"후우···."
숨을 천천히 내쉬니 습기가 가득한 찬 공기가 폐부를 채운다. 오전부터 뜨겁게 달궈졌던 공기가 폐부를 채운 것과 매우 다른 느낌. 몸이 차갑게 식는 것과 동시에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후두둑- 후두둑-
굵은 빗줄기가 지상을 강타한다. 빗방울이 어찌나 굵던지. 바닥과 부딪힐 때 터지는 빗방울이 흡사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로 그때.
"현우씨, 정말 저희가 안 도와드려도 돼요?"
한세아가 천막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사람의 체온으로 조금이나마 덥혀진 내부와 다르게 훅 떨어진 기온이 곧장 얼굴을 향하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네, 금방 끝납니다. 추우니까 들어가 계십쇼, 세아씨."
"······알았어요. 바닥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
복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던 한세아는 이내 한숨을 작게 쉬며 천막 안쪽으로 다시 들어갔다.
촤르르륵-
그녀가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돌돌 말린 방수포를 펼쳤다. 방수포의 고정이 탁 풀리면서 표면에 묻어 있던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그건 빗줄기의 기세에 잡아 먹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꽈악-
허리춤에서 꺼낸 밧줄을 고리에 걸어 방수포가 천막 주위를 감쌀 수 있게 만들었다.
각 모서리와 중앙 부분에 위치한 고리마다 로프를 끼워 매듭지어 강한 바람에도 버틸 수 있게 고정시키니,
휘이이이잉-
천막이 바람을 견디면서 가르고 있는 느낌이 전해졌다. 방수포의 표면을 타고 달리는 바람이 손 위로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달달달달달-
비스듬히 박아 넣어 고정시킨 핀이 로프가 흔들릴 때마다 진동하고 있었다. 살짝 불안한 모습이었지만, 하루 정도는 버텨 내 주리라 믿었다.
이윽고.
꽈악- 꽉-
덧댄 방수포가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꼼꼼히 확인한 나는 내심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여기 수건! 아니다, 가만히 있어. 내가 닦아줄게."
마른 수건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지수가 꼬리를 흔들면서 나를 반겼다. 그녀는 손에 들린 수건으로 내게 묻은 물기를 닦아내 주었다.
조금 격하긴 했지만, 얌전히 있으라는 말에 가만히 있었다.
가림막을 하나 더 친 덕분일까. 천막 내부로 들어오는 바람이 줄어든 느낌이었다.
"이현우씨, 나머지 이야기는 여기 있는 분들에게 다 들었습니다. 연구소로 가신다고요."
나와 지수의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보던 최명철이 입을 열었다. 그는 아직도 입을 우물거리는 부사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게 더 해드릴 수 있는 이야기도 없고, 어차피 위로 올라가실 것 같은데 이참에 저희 벙커에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겸사겸사 저희 상관인 연대장님이랑도 말씀 나누시고요."
"그런 제안을 한 이유가 뭐예요? 우리가 가진 물자 때문에? 아니면 명령이 있어서?"
한세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했다. 군인들이 차에 실린 물자를 탐내는 건가 싶은 마음에 물어본 모양이다.
몇 년 동안 두고두고 쓸 양은 아니었으나, 당장 풍족하게 지내기에는 충분한 양이었으니까.
"물자 문제는 아닙니다. 물자는 저희도 충분히 보유하고 있어서 강탈할 생각도 없고요. 애초에 그럴 수나 있는지 의문이긴 합니다만."
최명철은 이걸 풍족하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물자를 사용할 인원이 별로 없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럼 군인 아저씨들 짐에는 왜 이것밖에 안 들었어요? ···저한테 열 배로 갚아줄 수 있는 거 맞죠?"
미심쩍은 기색을 풍기며 묻는 예린. 아이의 눈에는 현재도 계속 사라지고 있는 초코바가 담긴 상태였다.
"우리 짐이 적었던 건 필요한 만큼만 쓰자는 지침 때문이야. 열 배로 갚을 테니까 그건 걱정 하지마. ···야 임마, 부사수. 넌 이제 그만 먹어. 적당히 좀 먹어."
"이거까지만 먹겠습니다."
"······에휴, 아무튼 물자 문제는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명령 때문이기는 합니다. 남산으로 가신다고 해도 바로는 못 가잖습니까. 정확히는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드린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군인의 말이 맞았다. 내일 해가 뜨고 바로 남산으로 올라간다 하더라도, 일이 순순히 풀릴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리고 최미소를 어디서 보호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는 상황이기도 했는데, 여의도에 살아남은 시민들이 있는 벙커가 있다니 나름 안심이 되는 소식. 우리가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상황에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그 벙커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가정하에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래도.'
완전히 믿지 못하는 벙커라도 아무것도 없는 바깥보다는 안전할 것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특히 아기인 지안이에게 그렇다.
"무기가 필요하시다면- ···아니, 방금 한 말은 잊어 주십쇼. 이건 제 선에서 확답이 힘든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아까 제가 한 이야기의 연장선입니다만, 난쟁이분들이 당신을 보면 꼭 데려오라고 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당신 만큼은 죽었을 리가 없다고 했는데, 그분들 말이 맞았네요."
최명철은 그들이 나를 아는 눈치인 것을 넘어서 가족으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일단 알겠습니다."
나는 생각 좀 해 보고 말해주겠다며 답을 회피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은 벙커로 가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난쟁이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인연.
다른 무엇보다 그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나와 비슷한 생각에 다다랐는지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당장 급한 이야기가 일단락되었을 때.
"표정이 조금 풀리셨네요, 최명철씨. 여기 올라오기 전까지만 해도 금방 죽을 것처럼 얼굴이 거무죽죽했는데."
나는 긴장감이 한결 가신 군인들을 바라보았다.
"크흠! 우리가 같은 편인 걸 알았으니 마음이 좀 놓여서 그런가 봅니다. 이렇게 이야기도 나눴는데 갑자기 저흴 죽이시진 않을 거 아닙니까?"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두들겨 패서 입을 열 생각은 있으셨겠죠."
농담조인 최명철의 말에 답한 건 지수였다.
"그래서 뭐요. 맞고 싶다고요?"
그녀는 꼬리로 바닥을 탁탁지면서 서슬 퍼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뇨, 농담 한번 해 본 겁니다···. 때리지 마세요. 아직도 머리가 욱신거린단 말입니다."
최명철은 양손으로 방탄모를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군인들의 손은 여전히 묶여 있기는 하지만 그 방향이 이전과 달랐다. 뒤에서 앞으로 이동한 것이다.
줄이 잘 묶여 있나 확인하는 김에 움직임을 좀 더 편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조치였다.
감시 자체는 그만두지 않겠지만 군인들은 앞으로 묶어 준 것만 해도 고마워했다. 특히 부사수가 좋아했다.
"근데 생각보다 덤덤하시네요. 동요도 거의 안 하시고.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솔직히 저는 당신들이 화를 낼 줄 알았습니다."
나는 군인들이 화를 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도 그럴게, 당시의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고 해도 군인들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사람 마음이 어디 냉정하게만 돌아가던가. 사람은 감정을 품은 생물이다.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든 없는 간에 감정이 요동치는 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하루가 지날수록 옆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이기도 했으니 더욱 그랬겠지.
"화라···. 화는 안 납니다. 무작정 화를 내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화만 낸다고 해결될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요. 저나 당신이나 정말 화를 내야 하는 건 저곳에 있는 거대한 나무이겠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이거참, 말도 못하는 나무한테 화를 내야 한다니. 예전 같았으면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을 겁니다."
세상이 참 이상하게 변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최명철. 그는 어느새 곯아 떨어진 부사수를 바라보았다.
"밤도 늦었으니 이제 주무십쇼. 지수야, 불침번은 내가 먼저 서도 될까?"
"알았어! 오늘은 내가 중간에 설게. 세아 언니는 마지막에 서면 돼요."
"그렇게 할게요."
"저도! 저도 불침번 설 수 있어요!"
"예린이 너는 그냥 자. 나중에 키 안 컸다고 울지 말고."
호기롭게 손을 든 예린은 내 말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 군인들은 빠르게 잘 준비를 마쳤다. 그저 가지고 있는 담요를 몸에 꽁꽁 두르기만 하는 것이라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매우 힘든 오늘이었던 것만큼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곤히 잠에 빠졌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거센 빗소리 사이사이를 메운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났을 때.
"···현우씨."
최미소가 나를 불렀다.
"···네."
"우리 사이에 풀어야 할 이야기가 있죠? 하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고 싶어요.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줄 수 있을까요?"
그러니 오늘은 자신을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전한 최미소.
"저는 미소씨가 하자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다만 이거 하나만 알려주십쇼. 칼카타는··· 정말···."
"그이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칼카타를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전한 최미소. 그녀는 내가 왜 초번을 하겠다고 나섰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괜한 걸 물었네요. 편히 주무십쇼. 무슨 일이 생겨도 아니, 생기지 않게 막아드리겠습니다."
최미소가 내게 뭐라고 해도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생각을 정리한 최미소가 내게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뿐. 그게 최선이라 믿었다.
"고마워요."
슬픈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지안이를 품에 안고 불편한 잠을 청했다.
쏴아아아아-
그 모습을 보니 한숨을 참지 못하고 길게 내쉬었고, 그런 내게 비내음이 맡아졌다.
후각은 가장 많은 기억을 가진 감각이라고 하던데. 나는 비가 내릴 때마다, 비내음이 맡아질 때마다 칼카타를 잃은 오늘밤을 떠올리게 되는 걸까.
내 기억은 끝내 흐려져도 이 냄새만큼은 그대로일 테니까.
'······칼카타. 정말 안 오는 겁니까.'
만약 온다면 빨리 오라며, 지금이라도 돌아오라며 중얼거렸지만,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나는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되새기면서 눈을 감고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애써 잠을 청하는 모습이었다.
어깨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 날이다.
그런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