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22화 (323/497)

Chapter 322 - 322. 길 (9)

다음날 아침.

쏴아아아아아-

비는 여전히 거세게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굵은 빗소리 사이사이에 다른 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윽···. 혀, 현우씨. 저 허리가 안 펴져요···."

"오빠···, 살려주세요···."

한세아와 예린이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녀들은 다 죽어 가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리 방수포를 덧대었다 하더라도 찬 바람이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체온을 덜 빼앗기기 위해 몸을 잔뜩 웅크렸으니 몸이 굳은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새벽에 핫팩을 급하게 나눠 주고 천막 내부 공간이 좁은 덕분에 이 정도에 그친 것이지, 아니었다면 우리는 체온 유지에 실패했으리라.

"미소씨, 살아 있습니까···?"

"네, 네···. 어떻게든···?"

최미소는 지안이의 등을 멍한 얼굴로 두드리면서 답했다. 그녀 또한 얼굴이 핼쑥한 것이 밤을 보내는 것이 만만치 않았던 것 같았다.

"꺄아!"

그래도 지안이만큼은 혈색이 좋았다. 핫팩을 몰아준 덕분일까.

"······."

"······."

군인들은 미동도 없었다. 이미 죽은 모양이다.

"다들 왜 이렇게 약해졌어? 뭐, 여기서 오래 지낸 것도 아니고 겨우 하룻밤만 보낸 거구만."

지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의 꼬리도 좌우로 흔들렸다. 지수도 상태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들보다는 확연하게 나았다.

"끄응···. 지수야, 몸 어디 아픈 곳은 없지?"

어깨를 이리저리 돌려보니 느껴지는 근육통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나는 지수의 몸 상태를 확인하며 물었다.

"어, 나는 멀쩡해! 어제 변종에게 물린 곳도 거의 다 나았고. 흉 남으면 어쩌지 했는데 다행히 흉은 안 질 것 같더라고."

"그래, 다행이다. 그럼 잠깐만 옆으로 가 봐. 세아씨랑 예린이한테 마사지 좀 해주게."

"···마사지? 나는?"

"너는 멀쩡하다면서."

그리 말하며 비키라는 손짓하자,

"어어···. 아악···! 갑자기 팔이! 어깨가! 다리가! 목이!"

빠르게 주변을 살핀 지수가 낑낑대며 드러누웠다. 그러나 꼬리만큼은 다리 사이에서 살랑거리며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휴, 알았어. 가만히 있어. 조금 주물러줄 테니까."

지수는 대답 대신 꼬리를 까딱거렸다.

꽈악-

그런 지수의 모습에 피식 웃은 나는 근육이 뭉칠 수 있는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한번 뭉치면 제대로 풀어 주기 전까지는 지속적으로 통증을 주는 어깨와 목 사이나 종아리 같은 부위 말이다.

"아흐···."

그렇게 꾹꾹 눌러가며 힘을 줄 때마다 지수는 녹아내려 흐물흐물해졌다. 약간 빳빳한 감이 있던 꼬리도 부드럽게 풀리고 있었다.

"자, 끝. 이제 나와."

나는 지수가 완전히 녹아 사라지기 전에 손을 떼어냈다. 그녀가 만족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만져 주었으니까.

"벌써? 5분도 안 해줬잖아!"

"나중에 시간 나면 또 해 줄게. 너는 이제 미소씨 돌봐드리고 있어."

"칫, 알았어. 약속한 거다?"

지수는 아직 비몽사몽의 경계에 있는 최미소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최미소는 지수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인 후, 얌전히 몸을 맡겼다.

그 뒤로, 나는 한세아와 예린에게 다가가 지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근육이 뭉친 곳을 풀어 주었다. 몸이 얼마나 굳어 있는지 단단하게 뭉친 근육이 만져질 정도였다.

"세아씨는 그렇다 쳐도 예린이 너는 아직 어리면서 벌써 이렇게 골골대면 어떡해?"

"저는 성장통이예요···! 많이 크기 위해 느낄 수밖에 없는 고통! 그리고 세아 언니 나이가 어때서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에휴. 됐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얌전히 마사지나 받아."

나는 예린의 말에 서럽다는 시선을 보내는 한세아를 애써 외면하며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말랑한 피부가 잡히는 것과 동시에 손을 움켜쥐었다.

"끄엑!"

예린은 내가 가하는 힘이 살짝 더 강해지자 몸을 뒤틀었다. 그래도 착실히 굳은 몸이 풀려가고 있다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이고 있었기에 그만두지는 않았다. 원래 뭉친 근육을 푸는 건 아픈 법이다.

이윽고.

"끝. 너도 이제 뒤로 가 있어."

얼추 마사지가 끝났다고 판단한 나는 예린의 목 뒷덜미를 잡았다. 발버둥 치는 자세 그대로 굳은 아이는 이내 얌전히 들어 올려져 지수가 있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

마사지를 당하는 일련의 과정을 본 한세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그녀가 도망갈 곳은 애초부터 없었다.

"······현우씨, 생각해 보니까 저는 안 해도 될- 아악!"

지금 풀고 가지 않으면 내일까지 고생할 수도 있어서 나는 한세아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누가 보면 제가 세아씨 죽이는 줄 알겠습니다. 얌전히 있어요. 최대한 안 아프게 할 테니."

그리고 도망가지 못하게 곧장 눌러서 근육을 풀었다.

몸이 찌뿌둥한 건 나도 마찬가지. 그래도 이렇게라도 몸을 억지로 움직이다 보니 풀리는 느낌이었다.

"헤윽···."

아프지 않게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자 한세아의 몸에 가득 들어찬 긴장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 틈을 노려 강도를 올려나갔다.

그와 동시에 밑에서 점차 올라가는 강도에 이상함을 느낀 한세아가 곧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고 발버둥 치는 일이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한세아는 결국 벗어나지 못한 채 축 늘어졌으니까.

***

보글보글···

가스 버너 위에 올려진 냄비의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현재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 군인들은 아침 식사 준비를 마친 상태.

간단하게 식은 몸을 덥힐 겸 해서 통조림을 데워 먹고, 체온을 유지시키기 위해 따뜻한 물을 마실 예정이었다.

"우린 이제 군인들이 말한 벙커로 갈 겁니다."

나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물을 보며 말했다. 새벽에 불침번을 서는 내내 고민했던 내용이었다. 지수와 한세아도 그게 제일 낫다고 판단한 내용이기도 했다.

최미소의 거처 문제도 있지만, 난쟁이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엘트라, 칼카타에 이어 지구 바깥에서 온 사람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하니까.

"아, 잘 생각하셨습니다!"

최명철은 내 말에 반색했다. 코를 훌쩍이는 부사수도 사수의 반응에 대충 박수를 쳐서 호응했다.

"가는 건 괜찮은데 지금 갈 수 있을까? 비가 어제보다 더 심하게 오는 게 마음에 좀 걸리네."

비가 거세게 내리는 바깥을 보며 말한 지수. 그녀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외부를 보며 꼬리를 부르르 떨었다.

"걸어가야 한다면 비가 그칠 때까지 여기서 대기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차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좋기도 하고."

다들 여기에서 더 대기하는 건 싫지 않느냐며 묻자, 일행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에 느꼈던 추위와 몸을 꿉꿉하게 만드는 습기를 떠올린 모양이다.

"혹시 악성 변이자들을 걱정하시는 거라면 그건 덜어도 좋습니다. 이 근처에는 괴물들이 별로 없거든요. 초기에 이 근방만큼은 확실하게 정리해 두기도 했고, 대부분의 변종들은 한강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강 너머요?"

"네, 그건 나중에 위로 올라가셔서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제가 지금 뭐라 말해도 믿기 힘드실 거라서요."

최명철은 한세아가 건넨 통조림을 조심스럽게 받아 부사수에게 넘겼다. 흐리멍덩한 부사수의 눈은 자기 앞에 통조림이 도착하자 빛을 되찾았다.

"일단 알겠습니다."

나는 밥부터 먹자며 일행에게 말했고, 일행은 뜨거운 통조림을 후후 불며 먹기 시작했다. 뜨거운 꿀물이 담긴 컵을 잡아서 손을 녹이는 건 덤이었다.

여름인 건 확실한데, 비가 이렇게 오니 흡사 겨울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한기가 느껴지고 있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나서 보온병에 남은 꿀차까지 챙기고, 뒷정리까지 마쳤을 때.

"세아씨, 최명철씨랑 미소씨랑 같이 내려가서 미리 차에 타고 있어요. 저는 지수랑 천막 정리하고 따라가겠습니다. 아, 예린이 너도."

"알았어요. 바닥 미끄러우니까 조심해요."

접어둔 사다리를 길게 늘려 바닥으로 내린 한세아는 최미소를 부축하면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 뒤를 군인들이 따랐다. 사탕 하나를 입에 우물거리는 예린은 마지막으로 내려갔다.

"지수야, 내가 위에 고정한 로프 풀 테니까 너는 방수포 좀 받아줘. 고정핀은 다 풀었지?"

"어, 다 빼 놨어. 위에 있는 것만 풀면 돼."

훅 떨어질 방수포를 받을 준비를 마친 지수를 본 나는 팔을 쭉 뻗어 삼각형의 형태를 유지시켜 주고 있던 매듭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철썩!

물방울이 맺혀 있던 방수포가 떨어지면서 사방으로 물기를 휘날렸다.

"으앗!"

물을 고스란히 맞은 지수가 어푸푸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투명한 물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많이 맞았어?"

"조금. ···아니, 많이. 근데 뭐 괜찮아. 어차피 옷은 이미 젖어 있어서."

지수는 여기서 더 젖기 싫으니 빨리 정리하고 내려가자고 재촉했다.

쏴아아아아-

분명 우리 위에는 영등포역고가가 있건만. 고가는 비를 막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바람이 워낙 거세서 빗줄기가 옆으로 휘어진 까닭이었다.

돌돌돌-

나도 비를 더 맞기는 싫었기에 좀 더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체한 방수포를 돌돌 말아 고정하고, 녹이 묻은 매트를 접어 크기를 줄였다.

방수포 겉면에는 비바람과 함께 날아온 흙 알갱이나 풀 쪼가리가 붙어 있었으나 굳이 지금 떼어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됐다. 이제 내려가자."

정리를 모두 마친 나와 지수는 밑에서 대기하는 한세아에게 짐을 건넨 다음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먼저 차에 타, 지수야. 사다리는 내가 싣고 올게."

"고마워, 아저씨!"

지수는 잽싸게 문을 열어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행동이 어찌나 빠르던지. 한순간 비가 밀려날 정도였다. 옷이 더 젖는 것이 많이 싫었던 모양이다.

킥킥 웃은 나는 사다리를 접어트렁크에 실으면서 푸른 수정에게 무슨 이상이 생겼는지 확인도 해 보았다.

방수포에 잡다한 것이 묻은 것처럼 푸른 수정에게도 흙이나 풀이 달라붙어 있었다. 분명 트렁크의 짐을 보호하기 위해 방수포를 씌워둔 상태였건만, 안쪽에 어떻게 흙이 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조금 더러워지긴 했어도 멀쩡하네.'

그래도 수정 자체는 멀쩡하니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했다. 이상하게도 수정이 서운한 티를 내는 것 같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중요한 건 알맹이인데 말이다.

다시 방수포를 덮고, 마지막으로 로프를 더 꽉 조여 가림막이 날아가지 않게 만든 나는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차량으로 탑승했다.

"최명철씨, 옆으로 좀 더 가보십쇼. 저 좀 타게."

"여기서 더 어떻게 갑니까···."

"안 되면 되게 하라 이게 군인 정신이잖아요. 잔말 말고 조금만 더 가 봐요."

"어어? 최 상병님, 너무 밀지 마십쇼! 저 습관성 탈구가···!"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 자식아!"

인원이 둘이나 늘어난 지라 앉을 자리가 비좁았으나,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내서 앉았다.

그와 동시에.

부르르릉-

시동이 걸린 픽업 트럭은 앞으로 나아갔다.

차체를 시끄럽게 두들기는 빗줄기를 뚫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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