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3 - 323. 길 (10)
쏴아아아아-
거세게 내리는 비.
후두둑- 후두둑-
차체와 창문을 강타하는 빗줄기.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 군인들이 탄 픽업 트럭은 주저앉기 일보 직전인 역사 아래를 지나 바깥으로 빠져나온 참이었다.
하늘을 가려주는 천장이 없어지는 것과 동시에 폭우가 차량을 강타하기 시작한 상황.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빗물을 걷어내는 중이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워낙 많은 터라 와이퍼가 빗물을 밀어내기가 무섭게 바로 빈자리가 채워진 까닭이었다.
여러모로 시야가 제한되는 상태에서 귓가를 웅웅 맴도는 빗소리까지 합쳐지니 총체적 난국이었다.
촤자자작-
곳곳에 물웅덩이가 형성된 철도 자갈밭을 조심스럽게 헤쳐 나가는 차량.
"미소씨, 속도는 느려도 되니까 안전하게 부탁하겠습니다."
나는 운전석에 앉은 최미소에게 말하는 한편, 미간을 찌푸리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군인들의 말처럼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근처를 돌아다니는 나무 인간들이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온 지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에 이쯤 되면 길거리를 배회하는 괴물들이 있을 만도 한데 말이다.
콰콰콰콰콰-
나무 인간들 대신에 보이는 건 흉하게 드러난 철골을 타고 흐르는 폭포와 깨진 유리창 사이에 형성된 물무리. 그리고 저 멀리 빌딩 사이로 보이는 세계수였다.
나무가 어찌나 큰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 원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가까워지니 오히려 체감이 안 되는 느낌이었다.
그것의 그림자만으로도 지역을 다 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막 대단한 건 아니지만 운전은 자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최미소는 두리번거리며 전방을 살폈고, 가속 페달을 조심스럽게 밟았다. 그러다가 쿵, 소리와 함께 차량이 한번 흔들렸다. 바닥에 깔린 선로를 밟은 모양이다.
"저기요, 여기 서울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예린을 무릎 위에 올려 둔 지수가 군인들을 보며 물었다. 그녀의 금안에는 몰락한 도시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전쟁이 일어났었습니다. 사방에서 총성이 울리고, 하늘에서는 포탄이 떨어지고, 고막을 날카롭게 찢는 전투기가 미사일을 쏘고···. 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죠."
우리는 최명철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 사이에 최명철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다른 지역에 가보지는 못해서 타 지역 사정은 잘 모르지만, 여기는 다양한 괴물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악성 변이자들부터 시작해서 유난히 두꺼운 껍질을 가진 놈들이나 기괴한 외형을 가진 변종들. 그리고 전차를 부수는 빌딩 크기만 한 나무까지."
"······."
"아, 밑에서 올라온 전우들의 말에 의하면 엄청나게 큰 애벌레 같은 것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건 당신들이 말해주기도 했지만요."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뚫고 연구소 정문에 도착했지만, 끝내 문을 돌파하지는 못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뭐라 말하기 힘든 복잡한 표정과 함께.
"···애벌레 따위가 아닙니다."
나는 그가 말한 이야기 중 한 가지를 정정했다.
"예?"
"뱀이예요. 칠흑 같은 비늘을 가진 뱀. 탈피를 했는지 외형이 바뀌었습니다. 두께는 좀 더 얇아졌지만, 힘은 더 늘어난 것 같았습니다. 거기서 제가- ···아니, 아닙니다."
뭐라 말을 더 이으려던 나는 황급히 말을 정리했다. 대신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딱 전달해야 할 정보만. 그 이상은 아직 입에 담기가 힘들었다.
내 표정을 보고 무언가를 짐작한 최명철 또한 더 묻지 않고 말을 줄였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해요?"
그런 최명철을 부른 건 최미소였다. 그녀는 이대로 앞으로 가야 하는지 아니면 옆으로 틀어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직진하시면 됩니다. 굳이 다른 길로 틀 필요는 없습니다. 여의도로 이어지는 다리는 대부분 다 끊어졌거든요. 그래도 저희가 바깥으로 나올 때 이용한 다리는 아직 남아 있으니 그쪽으로 가시면 될 겁니다."
최명철은 다리의 폭을 생각하는지 차체 크기를 가늠한 다음에 답했다.
"쓰읍···, 이거 다리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슬아슬할 것 같은데···."
"왜요? 다리가 그렇게 작아요?"
지금 초코바를 하나 먹을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예린.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크기보다는 무게가 걸리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불안정하거든. 철선이 일부 끊어져 있는 상태라 좀 아니, 많이 흔들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다가 잘못되면 다리가 끊어질 수도 있고."
"······뭐 다른 길은 아예 없어요? 하나도? 진짜로?"
그의 말에 멈칫한 지수는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그녀였으니 떨어진다는 상상만 해도 거부감을 느낀 모양이다.
"예, 서울대교나 여의교 같은 큰 다리는 다 끊어졌습니다."
"왜요?"
"아니, 이게 저희가 일부러 끊은 게 아니고··· 폭격을 하도 하다 보니까 어쩌다 보니···? 그리고 아까 말했던 빌딩만한 나무 거인이 움직여서 다리를 깔아뭉갠 탓도 있고요. 지금은 어떻게든 처리해서 없습니다만···."
이번에 멈칫한 것은 최명철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가리면서 지수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아, 미소씨. 저기 위로 올라가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꼬리가 축 늘어진 지수를 달래면서 전방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쩍쩍 갈라진 신길고가의 아스팔트 도로판이 경사를 형성하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더 이상 앞으로는 못 가.'
신길고가가 선로를 막고 있어서 어차피 더 나아갈 수가 없게 된 상황. 남은 길은 위로 올라가는 것뿐이었다.
"현우씨, 트렁크에 실린 짐에 밧줄 단단히 묶었죠?"
"네, 혹시 몰라서 아침에 한 번 더 묶었었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손잡이 잡고 있어요. 저기 경사 올라가려면 속도 좀 내야 할 것 같으니까."
최미소는 나, 지수, 예린, 한세아, 군인들의 표정이 어떤지도 확인하지 않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부아아앙-!
촤자자작!
순간적으로 눌린 가속 페달에 의해 바퀴가 헛돌다가 이내 자갈밭이 파헤쳐지면서 차량이 앞으로 쏘아졌다. 과격한 급발진에 안에 타고 있던 우리의 몸이 뒤로 확 쏠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윽고.
쿵! 쿵!
덜컹!
픽업트럭은 울퉁불퉁한 바위나 다름없는 고가교의 잔해물을 밟으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눈으로 볼 때는 낙차가 그리 크지 않아 보였건만. 막상 직접 몸으로 겪게 되니 흔들림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쿵!
"악!"
특히 뒷좌석이 그러했다. 차량이 한차례 크게 흔들릴 때마다 나와 지수, 군인들은 천장에 머리를 박았으니 말이다. 보조 손잡이를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몸 이곳저곳을 부딪혔다.
하필이면 뒷좌석 안전 벨트가 고장난 차량이었기 때문에 몸이 마구 흔들렸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일까.
"끝! 다 올라왔어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다. 빠르게 속도를 올린 만큼 금방 위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요?"
난장판이 된 뒷좌석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최미소는 빨리 말하라는 듯 핸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답을 재촉했다.
그 와중에도 한세아가 품에 안고 있는 지안이는 멀쩡했다. 그저 꺄르륵거리며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품이 포근할까.
영등포로터리
↑→ 종합 운동장
"······저기 표지판 너머에 있는 문화다리로 가시면 됩니다. 그럼 이제 거기에 계단이 있···는데······."
멀미를 하는 부사수의 입을 틀어막은 최명철이 표지판을 한 손으로 가키리며 한 말이었다. 그는 뒤로 갈수록 말을 흐렸다. 표정도 같이 흐려졌다.
"···계단? 이 차로 계단을?"
무심코 그의 말을 따라 중얼거린 예린의 표정 또한 흐려졌다.
그리고 그건 나와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잔해물을 밟고 올라가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뒷좌석에서 난리가 한바탕 더 일어날 것이라는 건 동일했으니까.
"출발하십쇼, 미소씨. 우리는 괜찮습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우리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바깥에서 비만 오지 않았더라면 차량이 먼저 올라가고 난 뒤에 다시 탑승할 텐데. 괜히 차량이 좀 흔들린다고 요란떠는 것 같기도 하고, 폭우가 내리니 차량에서 내릴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러니 폭우를 맞는 것보다는 머리가 조금 아픈 편이 나으리라고 애써 믿었다.
"이번에는 좀 덜 흔들리게 가 볼 테니까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세아야, 출발해도 되니?"
"네, 네! 지안이는 걱정 하지마시고 출발하셔요, 언니!"
뒤에서 보내는 시선에 멋쩍은 표정을 지은 최미소는 조수석에 있는 한세아와 지안이의 상태를 확인한 뒤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부르르릉-
그렇게 도로 위에 방치된 차량 몇 대와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싱그러운 빛을 내뿜고 있는 넝쿨을 지나치니 최명철이 말한 문화다리가 바로 보였다.
'계단이 생각보다 짧아서 다행이네.'
분명 그리 생각했는데.
쿵! 쿵!
덜컹! 덜컹! 덜컹!
요란하게 흔들리는 차량에 의해 그 생각이 바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언니! 미소 언니!! 천, 천히 간다면, 서요···! 천천히 간다, 고! 했잖아, 요! 악!"
한순간 몸이 붕 뜨며 머리를 천장에 부딪힌 지수가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지만, 그뿐이었다.
"생각, 해 보니까! 그냥 빨리 올라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최미소는 차량을 세우지 않고 오히려 더 빠르게 다리 위로 올라가려고 했으니까.
"끄엑!"
그 과정에서 뒷좌석에 앉은 나, 지수, 예린, 군인들만 죽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