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5 - 325. 길 (12)
부르릉-
속도를 확 줄인 채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던 차량은,
"여기서 멈추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먼저 다가가는 것보다는 저쪽에서 다가오게 하는 편이 경계심을 덜 사거든요. 저기 움직이는 거 보니까 앞에 있는 우리 애들도 저희를 본 것 같고요."
최명철의 신호를 받아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그는 경계병들이 근처까지 오면 창문을 내려 얼굴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끼익
삼거리를 기점으로 쭉 세워진 컨테이너 장벽 앞에 도착했고, 차량은 장벽으로부터 살짝 떨어진 지점에서 완전히 멈췄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정문 경계병들이 무어라 외치며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 그때였다. 빗소리에 섞인 차량 이동음을 들은 그들은 곧장 뛰쳐나왔고, 우리에게 총구를 겨눴다.
"걱정 마십쇼. 안 쏩니다. 정확히는 못 쏜다고 해야겠네요. 괜한 이목을 끄는 건 저희 쪽에서 사절이거든요. 야! 거기 지금 근무 서는 사람 누구야!"
최명철은 총구가 차량을 향하자 차오른 긴장감을 환기시켰다. 그는 이내 창문을 내려 고개를 내밀며 외쳤다.
쏴아아아아아-
지면을 강타하는 빗소리가 그의 외침을 대부분 잡아먹긴 했어도,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경계병들에게 닿기에는 충분한 소리였다.
"최 상병님?! 살아계셨슴까! 저 대식입니다!"
최명철의 외침을 들은 군인들 중 선두에 있던 간부 우의 군인이 총구를 내렸다. 아직 총구를 겨누고 있던 판초 우의 군인도 눈치를 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총구를 슬그머니 내렸다.
"그럼 내가 죽길 바랐냐? 이 자식 이거 무서운 놈이었네···."
"···하루가 지나도 오질 않아서 다들 죽은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근데 지금 누구랑 같이 계신 겁니까? 수정도 안 가지고 가셨으면서 차량은 또 어떻게 움직이셨고요? 그리고 또 왜 묶여 계십니까? 막 강제로 잡혀 있는 거라면 몰래 윙크하십쇼."
대화의 양상을 잠자코 들어 보니 최명철의 계급이 더 높은 모양이다. 경계병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일단 그의 말에 따랐으니 말이다.
"대식아, 걱정하는 건 좋은데 그걸 말하더라도 다 들리게 말하는 게 맞아? 아무튼 너희 몽타주 가지고 있는 거 있어? 그것부터 줘 봐. 나중에 다 말해 줄 테니까."
"아, 예. 있습니다."
대식이라 불린 군인은 품을 잠시 뒤적거리더니 작게 잘라 코팅된 종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방탄모를 강타하는 빗물이 둥근 곡선을 따라가다가 떨어졌고, 그렇게 떨어진 물방울들은 코팅된 종이 위를 타고 지면으로 미끄러졌다.
"그래, 당연히 있어야지. 잠깐 기다려. 설명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게 있으니까."
종이를 받은 최명철은 바깥에서 대기하는 경계병들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하는 한편, 부사수를 보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부사수는 눈만 멀뚱멀뚱 뜨고 멍만 때리고 있었다.
"이거 보십쇼. 저희가 몽타주 들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번 확인해 보십쇼."
"···진짜네요."
"조금 어리다고 해야 하나, 미화가 되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아저씨는 맞는 것 같은데?"
"여기! 여기 눈이 똑같이 생겼어요!"
내가 그려진 그림을 받은 한세아, 지수, 예린이 한 말이었다. 곁눈질로 보고 있던 최미소도 일행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아무튼 전 거짓말 안한 겁니다? 솔직하게 다 말했다 이 말입니다."
이제 자신들을 좀 더 믿을 수 있게 되지 않았냐며 어깨를 으쓱거린 최명철. 그는 다시 종이를 경계병들에게 건넸다.
"자, 너희도 봐봐. 내가 누구를 데려왔는지. 옆에는 김현민이냐? 너도 이리 와서 들어. 그러니까 간단하게 설명해주자면, 안개를 없앤 사람들이 이 사람들━"
그는 간부 우의를 입고 있는 군인에게 무어라 설명을 하려고 했으나, 그의 말은 중간에 뚝 끊기고 말았다.
"어? 어어?"
설명을 다 듣지도 않은 경계병이 몽타주와 나를 비교하더니 말릴 새도 없이 몸을 돌려 냅다 뛰어갔기 때문이었다.
"비상!! 비사앙-!!"
그는 목이 터져라 외치며 벙커로 뛰어갔다. 부사수를 홀로 내버려 둔 채.
"-이고···. 내 말 다 안 끝났는데 그냥 가 버리네."
최명철의 설명은 허망하게 흩어져 버렸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멀어지고 있는 경계병을 보고 있었으나, 나는 저게 정상에 가까운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요란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도 그럴게,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사람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지 않은가?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컨테이너 벽에 적힌 문구를 다시 한번 보거나 어색하게 서 있는 경계병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기요."
"예?"
조수석에 앉은 한세아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는 군인.
"안 추워요? 여기 잠깐 탈래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 제가 여기 서 있는 게 제 임무라서···."
방금 김현민이라 불렸던 그는 한세아의 제안에 순간 혹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우물쭈물하며 거절했다.
"그럼 우산이랑 이거라도 받아요. 춥겠다."
한세아는 접이식 우산과 꿀차가 담긴 보온병을 내밀었다. 그녀는 컨테이너의 문구와 주변 상황을 살핀 순간부터 판초 우의 군인을 연민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불쌍하게 보이기도 했다. 입고 있는 판초 우의의 상태는 멀쩡했지만 조금 짧아서 바지 밑단을 일부 드러내고 있었고, 그 탓에 군복과 군화가 비에 푹 젖어 있는 상태였으니까.
똑- 똑- 똑-
계속해서 방탄을 타고 줄줄 흐르는 물줄기도 그렇게 보이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
팍- 소리와 함께 펴지는 우산과 따뜻한 꿀차가 담긴 보온병을 얼떨결에 받은 김현민은 이전보다 더욱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허나, 표정만 그러할 뿐 온기를 느낀 손은 보온병을 놓아주지 않았다.
폭우를 맞아 차갑게 식은 손은 천천히 온기를 받아 덥혀지고 있는 중이었고, 그에 따라 굳어 있던 표정도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가, 감사합니다."
눈치를 보며 컵에 꿀차를 따른 그는 이내 호록 마시더니 이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산전수전 다 겪게 된 군인답지 않게 어수룩한 면이 있었지만, 심성이 나빠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었다.
"원래는 충분히 설명해준 다음에 보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여기서 대기하는 수밖에요. 금방 올 겁니다. 저렇게 난리를 치면서 갔으니."
빠르게 멀어진 후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최명철이 한 말이었다.
"갑자기 총 들고 무더기로 나오는 건 아니겠죠?"
이건 쉴 새 없이 귀를 쫑긋거리는 지수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언제든지 대처할 수 있게 도끼 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
"에이, 저희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들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저희는 살고 싶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당신들이 필요하고요. 이건 장담할 수 있습니다."
"장담한다고요?"
"네, 그렇다니까요. 어제부터 내내 설명해드리지 않았습니까."
"···안 믿기는데."
"아니, 그럴 거면 왜 물어보신 겁니까."
최명철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겨를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다.
탁탁탁탁-!
군화가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는 습기로 흐릿해진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대략 다섯 명 남짓의 사람들이 우리가 타고 있는 차량으로 향해 뛰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당신 말대로 총을 든 사람은 없네요. 아니, 한 명 있네요. 아까 뛰어간 그 사람 같아요."
군복을 입은 사람 3명, 유난히 키가 작은 사람 2명. 그렇게 다섯 명.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우리가 파악한 수였다.
그 뒤로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추가 인원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서히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문을 활짝 열어 맞이한다던가, 자기소개를 한다던가 그런 건 아니었다.
꽈악-
흘러가는 상황이 얼추 파악될 때까지 시간을 벌 준비였다. 접근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별다른 무기가 보이지는 않고 있지만, 무기 정도야 얼마든지 숨길 수 있지 않은가.
"으음···, 검은빛은 안 보이는데 혹시 모르니까···."
예린은 최미소를 조용히 톡톡 건드리는 것으로 신호를 보냈다. 아직 시동은 끄지 말라는 신호였다.
바로 그때.
"어?! 연대장님?!"
최명철이 선두에 있는 중년의 군인을 보며 당혹성을 토해내자, 우리의 시선도 순간 중년의 군인에게 향했다. 그저 소식을 전한 군인이 나올 줄 알았건만. 벙커의 책임자인 연대장이 직접 나왔다는 말에 놀란 것이었다.
"저 사람이 연대장?"
지수와 예린은 연대장이라 불린 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이윽고.
"······."
"······."
차량에 탄 우리와 바깥의 군인들은 대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서로의 사이에 빙빙 맴도는 건 침묵이었다.
연대장은 서둘러 온 것에 비해 지금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상황을 관망하는 중이었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 군인들을 신중히 관찰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상황인건지 파악하려고 하는 것일까.
쏴아아아아-
빗줄기가 빈 공간을 채우겠다는 것처럼 쏟아붓는다. 지면을 강타한 빗방울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비산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
침묵을 참다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려고 했지만,
"욘석아! 현우! 현우가 맞구나! 괜찮으냐? 어디 아픈 곳은! 어디 아픈 곳은 없는 게야!"
착, 소리가 나게 내 얼굴을 붙잡은 난쟁이가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는 것으로 내 말을 가로막았다.
대체 어느 틈에 다가온 것인지 모르겠다.
키가 작아서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