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7 - 327. 길 (14)
"그럼 저희를 보고 있는 군인들도 좀 설명해주시죠. 아까부터 시선이 따가워서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네요."
나는 찌뿌둥한 몸을 살짝 풀며 연대장에게 말했다.
내가 최명철과 그의 부사수를 내리게 하고 대신 연대장을 태운 이유는 정말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사실상 좀 더 높은 가치를 지닌 인질로 교환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벙커가 믿을 만하게 바뀌고 있긴 했으나, 아직 마음을 놓을 단계는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누군가를 잃은 것이 바로 어제인데, 괜한 방심으로 누군가를 또 잃을 위기에 처하는 건 사절이었다.
그래서 최명철과 그의 부사수를 조금 너무하다시피 제압한 것이기도 했다. 나중에 사과하는 일이 생길지언정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람이 진짜 연대장인지 아닌지는 이곳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정보. 이곳에서 지내지 않는 우리는 제대로 알 수 없는 정보였다. 그저 생김새와 입고 있는 군복을 보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
그래도 무슨 생각이었을까. 연대장이 차량에 망설임 없이 탔다는 것에 조금 놀라긴 했다.
무언가 신호를 보내는 낌새도 없었고 말이다.
"아, 이거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빌딩에 있는 저희 애들은 그냥 근무 서고 있는 겁니다. 제가 따로 지시를 내린 애들이 아니고, 원래부터 있던 애들이란 말입니다."
연대장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애들이 지금 이 차를 주목하는 건 당연하잖습니까. 예고도 없이 모르는 차량이 장벽 안으로 들어온 건데."
"그 부분은 저희도 이해합니다. 다만, 필요 이상으로 시선이 쏠린 것 같아서요. 대충 저 빌딩에서부터 저 빌딩까지 전부 여기 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아, 찾았다! 오빠, 저기 옥상! 옥상에서 누가 쌍안경으로 우리 보고 있어요! 어? 숨었다!"
주변을 훑은 나와 어느새 꺼내 든 쌍안경으로 경계병을 발견한 예린이 한 말에 연대장은 무의식적으로 품을 뒤적거렸다가 탄식했다. 무기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차량 안에 들어올 때 간단한 몸 수색 정도는 마쳤었으니까.
"······아이한테 바로 들킬 정도로 그렇게 대놓고 보고 있었다고요? 이현우씨가 말한 범위면 전부 여길 보고 있는 건데··· 이것들이 하라는 근무는 안 하고. 크흠! 아무튼 이걸로 빌딩에 있는 애들에게 신호 보내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무전기가 달렸던 부분을 더듬거린다며 투덜거린 연대장은 손전등 하나를 꺼내 들었다.
"무슨 신호인데요?"
"그냥 저는 별일 없고 안전하니까 그만 신경 끄라는 신호입니다."
"···갑자기 총 쏘는 건 아니죠?"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은 지수. 그녀는 귀를 쫑긋거리며 연대장을 주시했다.
"그렇게 되면 저도 죽는데 그러겠습니까? 저 할 일 많은 사람입니다."
"일단 해 봐요. 시선이 좀 많이 부담스러우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연대장은 창문을 열었다. 비바람이 차 안쪽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그는 군복이 젖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곱만큼 작은 푸른 수정이 박힌 손전등을 켰다. 딸깍 소리와 함께 빛을 쏘아내는 그것을 이리저리 돌리기도 하고, 깜빡깜빡 거리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느껴지던 압박감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빛을 인지한 군인들이 차량에게서 눈을 뗀 것이다. 현저히 줄어든 부담감에 무심코 안도의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진작에 이럴걸 그랬습니다. 차 타고 뭔가 신호를 보내면 더 오해할 것 같아서 안한 거였는데 말이죠. 그 대신 연대장인 제가 타면 긴장감을 줄여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이 부분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연대장은 한창 외부를 경계해야 할 시기에 한눈을 판 경계병들에게 한 소리 해야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결국 어르신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기술자인 난쟁이들에게 꽉 붙잡혀 사는 모양새였다.
"아뇨, 뭐···. 너무 저희 입장만 생각한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나는 지금 눈에 보이는 그의 태도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마치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는지 시험해 보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검은 입자에 오염된 자들이 격한 감정 변화를 보여 준다는 것을 이용한 건가?'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가 먼저 고개를 숙였으니 일단은 상황을 넘기는 게 맞을 듯했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답은 간단하고 말이다.
경계하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닌 여기 군인들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사실이었다.
"아닙니다. 낯선 곳에 오셨으니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특히 아기도 있으시고."
연대장은 이해한다며 괜찮다는 손짓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어디까지 들었어요?"
이번에는 한세아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진도 확인용에 가까웠다.
"당신들이 아니, 정확히는 이현우 당신이 졸린사 연구소 관련자라는 것. 이것만 압니다. 그 외 다른 정보는 전달받지 못했고요."
"그럼 그것만 듣고 이것저것 다 이야기해준 거예요?"
"결국 같은 배를 탄 사람들 아닙니까. 숨길 것도 없고, 무엇보다 당신들은 괴물이 아닌 사람이니까. 이 정도만 해도 서로 이야기를 듣기에는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연대장은 우리의 이야기가 궁금하긴 하면서도 자기 패를 먼저 까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
"······."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는 잠시 서로를 보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현우라고 합니다."
내 소개를 시작으로 일행은 각자 이름을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금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전에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었다.
서로 자신을 밝히는 것. 이것보다 더 기본적인 소통은 없었으니까.
일종의 대화의 물꼬를 터주는 방법인 마중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 편하게 하라는 우리의 말에 연대장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이제부터 말 편하게 하도록 하지. 아, 나는 그냥 연대장이라고 부르면 돼. 다른 이름은 없어."
자신을 그저 직책인 연대장이라 부르라는 그. 비록 연대장일뿐이지만 자신이 이 근처에 남은 최상급자라는 말과 함께 엄청나게 출세한 것 같지 않느냐며 허허 웃었다.
우리는 차를 정차한 상태로 끊어진 이야기를 이어 붙였다. 대부분은 우리의 이야기였다.
쏴아아아아아-
후두둑- 후두둑-
굵어졌다가 옅어지기를 반복하는 빗줄기를 맞고 있는 차량 내부에서는 도란도란 나누는 말소리가 가득했다.
***
"그렇게 해서 여기로 오게 된 겁니다."
"흠···."
"더 물어보실 것 있으세요?"
나는 긴 이야기에 마른 목을 축이며 물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연대장은 이야기를 중간에 끊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분명 중간중간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네.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것이 최선이고. 이 이상은 서로에게 부담이 될 거야. 그러니 나머지는 차차 하도록 하지. 서로를 위해서라도."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한 시간을 가졌던 연대장이 한 말이었다. 그는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마무리하자며 손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상황이 일단락되었다는 생각에 맥이 탁 풀린 나는 이제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가리킨 것은 아까부터 보였던 구조물이었다. 정확히는 벙커 주변을 둘러싼 금속 벽이었다. 최종적으로 벙커 입구를 막는 외벽인 모양이다.
바로 그때.
"군인 아저씨! 이거 먹을래요?"
예린이 뜬금없이 연대장에게 쿠크다스 하나를 내밀었다.
"허허, 이거 나 주는 거니? 고맙구나."
흡사 딸의 재롱을 보는 것처럼 웃는 연대장은 아이가 내민 과자를 받았다. 그는 바로 포장지를 깠지만, 포장은 열리지 않았다.
사각형이었던 포장지는 열리는 대신 팔각형이 되었을 뿐이었다.
'운도 없지···.'
미약하게 떨리는 쿠크다스를 보며 든 우리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허허···."
연대장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웃음의 느낌이 달라졌다. 쿠크다스도 부스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새 걸로 하나 다시 드릴게요···."
"아니, 괜찮단다. 예린이라고 했니? 아저씨는 마음만 받아도 충분해요."
연대장은 쿠크다스 사형 집행을 뒤로 미룬 건지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있는 팔각형의 포장지를 건빵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차 안에만 있었더니 몸이 뻣뻣해지는군. 자네들은 어떻게 하겠나? 나는 이제 내려서 업무 좀 보려고 하네만. 아, 짐은 따로 우리가 맡아둔다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그건 자네들 것이니까. 벙커에서 지내겠나. 아니면 이 근처 빌딩에서 지내겠나. 이것도 편한 대로 하시게."
"그럼 저희는 여기 좀 더 둘러보고 난 후에 결정하겠습니다."
우리의 대답에 연대장은 알았다며 손을 흔들었고, 여기서 주변을 보고 있으면 안내역을 맡아줄 사람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촤락-
차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우산을 펼친 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지."
여의도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말을 끝으로 벙커 계단을 내려가 사라졌다.
"후우···, 어찌 됐든 잘 끝난 것 같지?"
어느새 시간은 꽤 흘러 오후로 바뀌어 있었다.
"아마도? 뭐,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만 해도 잘 끝난 거지. 나는 한바탕 뒤집어 엎을 줄 알았어."
시트에 등을 기댄 내게 쓰러지며 지수가 답했다. 바싹 굳어 있던 그녀의 꼬리는 조금씩 살랑거리고 있었다.
"미소씨, 몸 이상하거나 그런 건 없죠?"
"네. 전 괜찮아요. 지안이도요."
"세아씨랑 예린이는?"
"둘 다 괜찮아요!"
다들 괜찮다고 했지만, 안색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어젯밤에 잠을 설친 데다가 오전부터 신경전에 시달렸던 흔적이었다.
"어디에서 지내는 게 나을 것 같습니까? 지하보다는 지상이 나을 것 같은데."
사실 지상이든 지하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여의도만큼은 거리에 나무 인간들이 없었으니까. 주변에 빙 둘러진 컨테이너 장벽이 있고, 군인들이 매일 같이 순찰하는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한 이미지를 가진 지하보다는 비가 오더라도 빛이 있는 지상이 낫지 않겠는가.
"일단 미소 언니! 저기 처마 있는 쪽으로 차 좀 세워줘요. 짐을 다 내리진 않을 테지만 정리하기는 해야 하니까요."
"알았어요."
최미소는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끼익
픽업 트럭은 가림막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위에서 퍼붓는 빗줄기도 더 이상 차량을 괴롭히지 못했다.
뚝- 뚝-
차체를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은 여전했지만.
"저는 나가서 필수로 챙겨야 하는 짐 좀 살피겠습니다. 바람도 좀 쐴 겸 해서요."
"저도! 저도 나갈래요!"
나와 예린이 바깥으로 나오자 습기가 가득한 비내음이 폐부를 채우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일행이 차를 세운 곳은 세마 벙커 앞 버스 정류장이었다. 정류장에는 비와 햇빛을 막아주는 용도인 지붕이 설치되어 있었다.
"예린아, 멀리 가지 말고 근처에 있어야 한다? 지수야, 예린이 좀 봐줘."
"응.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걱정 하지마셔."
나는 찰박거리는 물웅덩이를 피해 트렁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방수포는 험한 운전에 의해 조금 풀려 있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빛을 발하는 푸른 수정의 상태를 제대로 살피기 위해 방수포를 걷었다. 칼카타가 잘 돌봐달라고 했으니 틈틈이 상태를 확인해야만 했으니까.
펄럭- 후두둑-
표면에 달라붙어 있던 물방울이 아래로 떨어지며 트렁크의 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윽-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흙 알갱이따위들을 손으로 밀어내며 상태를 확인해 보니 수정은 멀쩡했다. 여전히 매끄러운 표면과 단단한 질감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어?"
나는 수정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손을 보며 당혹성을 내뱉었다. 수정을 쓸던 손이 안 떨어졌던 것이다.
재차 손을 뒤로 물렸지만, 손은 접착제가 붙은 것처럼 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뭐야.
왜 안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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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호 지수가 건네는 성냥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