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9 - 329. 길 (16)
여의도 세마 벙커.
과거 공개되었을 때, 벙커의 총 면적이 871㎡로 상당한 공간을 자랑했던 곳.
허나 지금은 난쟁이들이 더 많은 사람과 물자를 수용하기 위해 넓혔고, 그로 인해 전보다 훨씬 더 커진 면적을 자랑하고 있는 곳.
그리고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 지안이는 그 벙커에 들어와 있었다.
"진짜 외부인이잖아···."
"그럼 안개가 진짜 사라진 건가? 비만 그치면 나가보는 건데."
출입구 앞, 넓은 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듣고 있는 채로.
오전부터 일어났던 소란에 이목이 끌려 있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새로 입주한 사람들을 보기 위해 모여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우리를 보며 작게 소곤소곤 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중 그들의 대화를 제대로 들은 것은 지수뿐, 그녀는 이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낯선 공간, 낯선 이들이 익숙하지 않은 까닭이다.
"제기능을 하고 있는 다른 캠프가 남아 있었단 말입니까?!"
"그래, 그렇다고 하더라니까."
그 와중에 최명철은 아직도 군인들에게 붙들려 있었고, 그가 들은 이야기를 전우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군인들은 각자 맡았었던 구역의 캠프 이야기를 꺼내며 앞다투어 입을 열었지만, 최명철도 자세한 이야기를 아는 것은 아니었기에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친 그는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 있는 다른 군인들도 우리를 발견하긴 했으나 최명철의 만류로 다가오지는 못했다.
대신 최명철을 본 한세아가 그에게 다가갔다. 강탈했던 총기를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씨익 웃으며 어깨에 메고 있던 총기 두 정을 최명철에게 척 내밀었다. 그와 군인들이 어어하는 사이에 총기는 최명철의 품에 들어가게 되었다.
"간수 잘해요. 원래 안 돌려주려다가 주는 거니까."
"네, 네!"
다시 받게 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인 최명철.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황급히 끄덕였다.
"현우씨! 이제 가요!"
그에 반해 짐이 사라져서 가벼운 표정을 지은 한세아는 다시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내 팔을 붙잡았다. 팔이 가슴 사이에 파묻히자 말랑함의 압박이 느껴졌다.
"외부에서 사람이 들어온 건 너무 오랜만이라 다들 놀란 거다. 그러니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말아라. 욘석들! 여기서 땡땡이치지 말고 어서 할일하러 가거라!"
난쟁이 칸은 신기한 듯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러자 생존자들은 움찔하며 우르르 흩어졌다.
"칸, 저흰 괜찮습니다. 기분 나빠서 본 게 아니고 그냥 뭔가 신기해서요."
한세아의 손을 맞잡아 준 내가 주변을 둘러본 이유는 시선이 신경쓰여서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안색이나 입고 있는 옷의 상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벙커 구성원들이 정확히 어떻게 된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우리가 본 사람들은 대체로 젊은 편에 속했다. 간혹 아이들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내 예상보다 상태가 더 좋았다. 입고 있는 옷이 조금 낡긴 했어도, 씻지 못해 꾀죄죄하거나 먹지 못해 삐쩍 마른 사람들이 없었다는 말이었다.
비록 우리가 바깥에서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을 허비하긴 했지만,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으니 벙커가 따로 이런 모습을 준비할 시간은 없었을 터다.
그러니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이 진실된 모습이리라.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판단하게 만든 데에는 사람들에게서 어색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한몫했다.
그저 바깥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들어왔다는 생각에 드는 신기함, 소란이 별것 아니었다는 생각에 드는 안도감, 복도를 우다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생기는 피곤함이 있을 뿐이었다.
적대감이나 공포감 같은 부정적인 기색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무엇이 신기하느냐? 내 말에 우르르 흩어진 사람들이 신기하느냐?"
"아뇨, 그건 신기하기보다는 좀 웃긴 모습이었죠. 제가 말한 건 사람들 표정이 괜찮아 보여서 신기하다는 거였어요. 대단하기도 하고."
나는 내 주위에 선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를 살피는 한편, 벙커를 둘러보았다.
작은 사각형의 타일이 남김없이 깔려 있는 바닥, 흰색의 페인트칠이 된 벽면, 구역을 나누기 위해 세워진 가벽, 어렴풋이 보이는 여러 물자가 담긴 방들, 벽면에 돌출된 안전 손잡이, 천장을 따라 설치된 각종 배관들과 환기구.
그리고 주변을 밝히고 있는 자동 보안등.
한때 전시관으로 이용되었던 벙커는 이제는 진짜 벙커로 바뀌어 있었다. 그중에서 우리의 시선을 가장 이끄는 것은 벽면을 따라 주르륵 부착된 보안등이었다.
팟- 팟-
움직임을 감지한 보안등은 불을 밝혔고, 움직임이 사라지면 곧장 빛을 없애고 있는 중이었다. 전기가 돌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깜빡임이었다.
"칸, 불을 켜둘 수 있을 정도로 전기를 만들어내는 겁니까?"
"그래,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수정으로 벙커의 장비를 가동하는 거다. 최소한으로 에너지를 소모해서 최대한 오랫동안 가동할 수 있게 손 좀 보았지."
"발전실 같은 공간이 따로 있는 모양이네요?"
"그건 마지막에 보여주마. 어차피 여기 한 바퀴 다 돌 예정이니 실망하지 말고."
난쟁이 칸은 앞장서서 걸었다.
"······."
"어서 따라가요."
"예린아, 바닥 잘 봐.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응!"
우리는 칸에게 서둘러 따라붙었다.
***
"여기가 세탁실이다."
난쟁이 칸이 처음으로 소개한 시설은 수도꼭지가 설치된 장소였다.
찰박- 찰박-
반질반질한 돌로 이루어진 싱크대에서는 몇 명의 사람이 옷을 오돌토돌한 빨래판에 비벼 세탁하는 중이었다. 수도꼭지에서 틀어진 물은 적당한 수압으로 내뿜어지고 있었다.
비록 온도 조절은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물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벙커 상황이 그리 나쁘진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물기가 있는 곳이다 보니 넝쿨이 벽면에 붙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칸에게 듣기로는 넝쿨을 뜯어도 다시 자라서 그냥 더 번지지 않게만 관리하고 있다고.
"위생은 중요하니 말이다. 물은 한강에서 끌어다 쓰고 있지. 강이 바싹 마르지 않는 이상 물이 부족해지진 않을 거다."
가장 먼저 만든 것이 세탁실을 비롯한 화장실, 샤워실을 사용하기 위해 수도관을 새로 설치하는 일이었다며 설명한 칸. 그는 바로 강물을 쓰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서 한번 이물질을 거르고 있어서 수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여기 저희도 써도 되는 건가요?"
"마음껏 써라.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친히 시설을 알려주고 있지 않으냐. 누가 너희에게 눈치를 주면 내게 말해라. 내가 호되게 혼내줄 테니."
"···아하하······. 그, 감사합니다···."
한세아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는 이내 팔짱을 낀 채 차 안에 두고 온 빨랫감들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자, 위치도 기억하고 충분히 구경했으면 다음으로 넘어가자."
우리는 칸의 인도에 따라 세탁실을 나섰다. 예린은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휙휙 돌렸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세탁실 옆에 붙어 있는 샤워실이었다. 남녀 공간이 분리된 공간이었다.
"아무래도 수도관을 복잡하게 연결하기는 힘들- 아니, 귀찮아서 말이야. 대체로 물을 쓰는 곳은 이 근처에 다 몰려 있다고 보면 된다. 건너편에는 화장실이 있다."
칸의 설명을 들은 우리는 간단하게 샤워실 주변을 살펴보았다. 코로 수분기와 샤워용품 특유의 인공적인 향기가 맡아진다.
샤워실 입구는 두꺼운 샤워 커튼이 여러 장 설치되어 있었다. 구역을 착각해서 들어가는 것을 막고, 누군가가 엿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 모양이다.
지금은 아무도 쓰고 있는 사람이 없는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억했느냐?"
"아, 네. 다음은 어디인가요?"
"어찌 보면 여기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곳."
"······?"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칸이 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르신, 무슨 일이십니까? 뭐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아니, 됐다. 너도 소식은 들어서 알 것 아니냐. 이번에 들어온 애들에게 시설 좀 알려주고 있는 중이다."
"아, 예. 편하게 보십쇼."
입구를 지키고 있는 군인과 난쟁이 칸이 대화를 나눈 장소는 바로 각종 물자가 보관되고 있는 창고였다.
"졸다가 또 혼나지 말고 경계나 제대로 하고 있어라."
"에이, 이젠 안 그럽니다."
군인은 가로막고 있던 길목을 비켜 주었다. 그와 동시에 안쪽으로 쭉 뻗어진 공동이 보였다. 상상 이상으로 커다란 홀이었다.
"한번 들어가볼 테냐? 너희들이 신기해할만한 건 없다만."
"어떡할래?"
나는 일행을 보며 물었다.
"전 들어가 보고 싶어요!"
손을 번쩍 들고 가장 먼저 외친 예린.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두 손 모아 부탁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은 것인지 아이의 얼굴을 본 일행은 피식 웃었다.
이윽고.
팟!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 칸이 창고 안쪽으로 발을 들이밀자 근처 보안등이 켜졌다. 어두웠던 창고가 환하게 밝혀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와···."
예린은 산처럼 쌓인 물자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이가 주로 보는 것은 담배같은 사치품이 있는 곳보다 각종 먹을거리가 보관되고 있는 곳이었다.
지수, 한세아, 최미소는 창고가 얼마나 큰지 가늠하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물자의 종류를 살폈다.
상온 보관을 해도 되는 물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부 온도 변화에 민감한 물자는 바닥에 파묻힌 상태로 보관되고 있기도 했다. 아무래도 지하인 덕분에 기온이 서늘해서 가능한 일인가 보다.
"칸,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나는 아이가 돌발 행동을 하지 않게 어깨를 살며시 잡은 채로 물었다. 아까부터 느껴지고 있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뭐냐. 말해 봐라."
"별건 아니고···. 그, 뭔가 되게 친절하시다고 해야 하나. 아니, 안 좋다는 건 아닌데, 좀 의외여서요."
난쟁이 칸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 그것이 의아했다. 남들과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하게 달랐으니 말이다. 정확히는 내게 설명을 할 때면 눈에 띄게 달라졌던 것이다.
마치 걸음마를 알려주는 아버지의 태도 같았다는 느낌은 내 착각일까. 내가 잃어 버린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 속이 답답했다.
"흥, 난 또 뭐라고. 신경 쓰지 마라. ······나는 받은 만큼 돌려주고 있는 것뿐이니까."
내 물음에 몸을 움찔거린 난쟁이 칸은 애써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