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0 - 330. 길 (17)
'받은 만큼 돌려 준다?'
무슨 의미로 말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으나, 그걸 해소할 시간은 없었다. 정확히는 난쟁이 칸이 자리를 피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답을 거부하는 움직임에 나는 안에 차오른 의문을 접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 진짜 엄청 크네요."
"원래는 이렇게 큰 곳은 아니었다. 크기는커녕 원래 여긴 흙으로 꽉 차 있는 공간이었어. 우리들의 힘으로 땅을 파서 넓힌 거지."
난쟁이 칸은 어두워서 면적 가늠이 제대로 되지 않는 공간을 보며 감탄하는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에게 말했다.
"힘? 칸 할아버지! 혹시 그거 한번 보여 줄 수 있어요?"
예린이 눈을 반짝이며 특수한 능력을 보고 싶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꼬리가 좌우로 휙휙 살랑거린다.
"보고 싶으냐?"
"네···!"
"그럼 못 보여 줄 것도 없지. 잘 봐라."
그리 말한 난쟁이 칸은 시범을 보여주려는 듯 바닥에 손을 대더니 바닥을 한움쿰 집었다.
우웅-
단단했던 바닥이 특수한 진동을 받고 흐물흐물해지더니 부드럽게 바뀌었고 흙을 퍼내는 것처럼 잡힌 것이다.
까드득-
단단한 바닥재는 이내 자유자재로 무너지거나 다시 결합되기를 반복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돌 조각들이 엉망으로 합쳐진 형상이었던 그것은 조각상으로 바뀌었다.
허리를 쭉 늘려 기지개를 제대로 키고 있는 고양이 조각상이었다.
"와!"
"받아라. 내가 주는 선물이다."
"감사합니다···!"
예린은 히히 웃으며 머리를 푹 숙였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아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저건.'
나도 그 모습을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단순히 돌이 귀여운 조각상으로 바뀌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칸이 운용한 푸른 입자가 내가 땅울림을 썼을 때의 움직임과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난쟁이의 능력인 땅울림은 기본적으로 대지를 흔든다. 그렇게 흔들어진 대지는 조각하기 쉽게 변하지. 그런 다음 형태를 원하는 대로 고정하면 지금과 같은 결과물이 만들어진다."
땅울림.
주민센터에서 위기에 빠졌던 그때 당시 사용했던 이적과 같은 이름이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이적의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닌 원래 이름이 땅울림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칸의 설명이 이어졌다.
"근데 이렇게 크게 지하를 파내도 되는 거예요? 위에 고층 건물들이 워낙 많아서 그 하중을 버텨 내 줄 지반이 필요할 것 같은데."
한세아는 가까이 가자 탁하고 켜진 보안등을 보며 물었다. 보안등은 규칙적인 간격으로 세워진 두꺼운 원기둥에 설치되어 있었다.
"다 계산 범위 내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아무 생각 없이 파낸 건 아니니까. 지금 네가 보는 것처럼 기둥도 세웠고, 쉽게 무너지지 않게 강도도 올려 둬서 괜찮다."
"지진이 일어나도요?"
"지반이 완전히 비틀리는 수준만 아니면 견딜 수 있다. 뭐, 애초에 그 정도 지진이라면 벙커가 무너지는 것보다 죽는 사람이 먼저 나올 테지만."
벙커 구역이 전부 연결된 것처럼 보여도 각 구역별로 칸이 나누어져 있어서 지반이 비틀려도 사람들이 밀집된 구역만큼은 지상으로 솟아나게 만들었다는 난쟁이 칸.
그는 벙커에 적용된 땅울림이라는 이적 덕분에 가능한 일이라며 말을 덧붙였다.
"···칸, 이거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나는 칸의 말이 멈춘 사이에 손을 들었다. 칸이 했던 것처럼 손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푸른 입자가 곧장 손가락 끝에서 뿜어졌다.
그동안은 적을 무너트리기 위한 강도를 얻기 위해 무기에 담아서 썼던 것이지 원래는 맨손으로도 쓸 수 있는 이적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푸른 불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까드득-
난쟁이 칸이 보여 주었던 실력에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미약한 땅울림이었으나, 그것은 내가 쓴 땅울림과 칸이 쓴 땅울림이 서로 같은 이적이라는 걸 부정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그 성질은 동일했으니까.
"허, 기억을 잃었다더니 그건 어째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나한테 그렇게 기술을 알려달라고 조르더니만."
"이거 덕분에 살았었습니다."
처음으로 내 의지대로 쓸 수 있었던 이적인 땅울림 덕분에 주민센터로 몰려들고 있는 나무 인간들을 저지할 수 있었었다. 만약 그렇지 못했더라면 그 후에 푸른 불로 적들을 휩쓸 수도 없었으리라.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깨우친 이적이 땅울림이었던 이유. 그건 내가 난쟁이 칸에게 처음으로 배운 이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우연인 줄로만 알았었건만. 이제 보니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몸이 익혔던 기술을 다시 깨우친 것뿐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가 보여 준 이적의 원래 용도와는 크게 달랐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균형을 무너트리는데나 썼을 뿐이지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해봤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칸과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역시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우리가 군인들에 비해 난쟁이들을 덜 경계하는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푸른 입자를 사용하지 못하는 군인들과 달리 난쟁이들은 이적을 사용할 줄 알았으니까.
'낯설기는 매한가지인데 몸이 받아들이는 인식이 달라.'
예전에 칼카타가 설명해주었던 것. 푸른 입자 보유자는 서로에게 본능적으로 최소치의 호감을 가지게 된다고 했으니 말이다.
조이와 칸을 제외하고 다른 난쟁이는 보지 못했지만, 그들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겠지.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리 크지 않을 것이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긴 했으나, 그동안 일행을 허무하게 잃어서는 안된다는 강박에 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여유가 없어서 이제서야 깨닫고 말았다.
"···그렇군. 다행이야."
내가 건넨 돌을 다시 바닥에 끼워 맞춘 난쟁이 칸이 한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려 준 땅울림을 사용한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구경 다 했으면 이게 나가자. 이만하면 충분히 보지 않았느냐?"
"아, 네! 예린아! 이제 돌아와!"
"알았어요···!"
우리는 먼저 창고 바깥으로 나간 칸의 뒤를 따랐다. 나가기 전에 예린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가십니까?"
"오냐."
"따로 뭘 가지고 나오신 건 없으시죠? 가져가셔도 되긴 하는데 제가 기록을 해야 해서 말입니다."
입구를 지키는 군인이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벽면에 걸려 있던 기록 장부를 가리켰다.
"저희가 손 댄 물자는 없어요. 근데 평소에도 사람들이 창고 물자를 마음대로 가지고 나오는 편인가요? 이 기록만 하면?"
한세아가 장부에 기록된 수많은 이름들을 보며 물었다. 창고 안으로 물자를 집어넣었다는 기록은 점점 줄어들고, 끝으로 갈수록 물자가 빠지고 있는 기록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예? 아, 그건 아니지만 당신들 편의를 봐주라는 연대장님 지시가 있었거든요. 평소에는 배급식으로 물자를 나눕니다. 기본적으로 양을 넉넉하게 주는 편이라서 사람들 불만은 적은 편이고요."
그래도 특정 물자가 부족해진 사람이 나오면 행정실에 먼저 요청을 하고, 지금 보는 장부에 기록을 한 다음에 물자를 가지고 간다는 군인의 설명.
"그렇구나···.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이게 제 할 일인 걸요."
"흥, 졸지나 말고 있어라."
대화에 끼어든 칸이 혀를 쯧쯧 차는 모습에 군인은 괜스레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가자. 아직 몇 군데 더 볼 것이 남았다."
우리는 칸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기다란 복도를 천천히 걷고 있자니,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보안등이 순차적으로 켜지며 길을 밝혀주었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가면서 보이는 것은 문이 굳게 닫힌 연대장실과 사람들이 서 있는 행정실이었다. 연대장은 조용했으나 사람들의 불만을 접수 받는 곳인 행정실은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은 진짜 별 건 없다만, 여기도 들어가 볼 테냐?"
난쟁이 칸의 말에 나는 어떻게 할 거냐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난 패스."
행정실 안쪽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에 지수는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어서 한세아, 최미소도 거절하는 뉘앙스의 말을 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에린이 너는?"
"저도 안 들어갈래요. 여기 재미없어요."
예린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흥미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음···."
나는 행정실 문 근처에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내부에는 서류 작성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별한 모습없이 그저 진지하게 일하고 있는 풍경. 간혹 시선을 끌고 있는 우리와 눈이 마주친 군인 혹은 직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금세 신경을 끄고 서류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컴퓨터와 인쇄기가 작동되지 않으니 하나같이 수기로 작성하는 모습이었다.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정체 모를 서류들은 하나씩 정리되고 있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죠."
지금 내가 본 광경이 전부일 것이다라고 판단한 나는 마찬가지로 몸을 뒤로 물렸다. 나중에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방문하면 될 듯했다.
방 안에 여러 매뉴얼들이 보였지만, 이것도 따로 구해 달라고 해서 보면 될 일. 굳이 눈가가 퀭한 사람들을 괴롭힐 필요는 없겠지.
저벅- 저벅-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긴 복도는 끝나고 작은 홀이 나왔다.
졸졸-
각종 배관이 보이고 그 안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거 보니 정수 시설이 설치된 장소인 모양이다.
"이제 갈 곳이 마지막이다. 정확히는 너희들이 방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볼 곳이지."
난쟁이 칸은 지나가면서 수도관을 툭툭 쳐 상태를 확인했다. 어디 녹이 생긴 부분은 없는지, 결합한 곳이 비틀리지는 않았는지, 계기판에 이상이 생긴 부위는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 있는 그였다.
이어서 그는 정수 장비는 군용 정수 차량에서 통째로 떼어왔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는 괜히 복잡해 보이는 배관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잘못 건드려서 수도관이 터지기라도 하면 대참사였으니까.
물론, 어깨로 툭 건드리는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섣불리 손대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은가.
습기가 있는 곳을 귀신 같이 눈치챈 넝쿨들은 정수 시설에도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벽면을 뚫고 나와 수도관을 빙 둘러싸고 있는 모습은 생명의 끈질김을 알려주었다.
"잠깐 여기 서 있어라. 문을 따로 만들어야 하니까."
칸은 어느 벽 앞에서 멈춰 섰고, 일행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가 앞을 가로막는 벽에 손을 올리자 한차례 진동한 벽이 좌우로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취급 주의,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절대금지라는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끼익-
"조심히 들어와라. 바닥에 깔린 전선은 최대한 밟지 말고. 선 끊어지면 나중에 교체하기 귀찮으니까."
망설임 없이 굳게 닫힌 문을 연 난쟁이 칸이 신신당부하는 말에 우리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고,
"···와."
안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과 푸른 수정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난쟁이 칸이 마지막으로 우리를 안내해 준 곳.
그곳은 바로 수정 발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