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3 - 333. 길 (20)
꿀차를 마시려다 말고 나를 바라보는 난쟁이 칸과 조이의 모습에 나는 칼카타의 이야기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뿐만이 아닌 의왕시에서 만났던 엘트라의 이야기까지도.
"칸, 조이. 두 분 다 아시죠? 칼카타요."
예전에 칼카타가 보여 주었던 사진 속 중심에 서 있었던 칼카타, 나, 난쟁이 칸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친우의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오자 그들은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단박에 이해했다.
"지안이는 제 아이가 아닌 칼카타의 자식이에요."
"······그놈을 만났었구나. 하지만 결국은···. 하, 이제 보니 머리칼이 그놈이랑 아주 똑 닮았군."
칸은 아기의 회색 머리칼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활로를 찾기 위해 나갔었다느니, 부족원들과 같이 살아서 돌아오겠다고 하더라니, 답지않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느니 같은 중얼거림과 함께.
그 뒤로, 우리는 의왕시에서 처음으로 만난 지구 바깥의 존재인 엘트라부터 시작해서 안개의 도시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인 칼카타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하나 둘씩 꺼내놓았다.
군인들에게 필요한 정보만 전달했던 것과 달리 내가,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난쟁이들이 우리를 챙겨 준 만큼 마땅히 돌려줘야 할 호의였고, 최선이었으니까.
이걸 호의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은 맞았다. 무엇보다 같은 별에서 온 친우들이 어떻게 죽었고, 무엇을 바랐는지 알려 줘야 하니 말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렇군. 그랬단 말이지···."
이야기를 다 들은 난쟁이들이 머뭇거리다 겨우 내놓은 답이었다. 그들은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새 컵에 담긴 꿀차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너희들이 보기에 그들의 마지막은 어땠는가? ···후회하던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고 여기에 남은 우리를 원망하던가?"
난쟁이 조이가 찰랑거리는 컵의 수면을 보며 물었다. 이리저리 일렁이는 수면에는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담겼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나는 끝내 입에 자물쇠가 채워진 것처럼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 대신 대화를 이은 것은 최미소였다.
"아니요. 제 남편인 칼카타는 후회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니, 후회하지 않았어요. 마찬가지로 당신들을 원망하지도 않았구요.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 그놈은 원래 그런 놈이지···. 고집 하나만큼은 절대 꺾지 않는 놈이었으니. 아, 자꾸 놈이라고 해서 미안하네. 마음이 상했다면 내 사과하지."
"괜찮아요."
최미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살살 흔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손을 뻗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기 이름이 지안이라고 했던가. 다른 성은 없고 이름만 지안인 것이야?"
난쟁이 칸이 수염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는 자기는 여기 모인 사람들이 전부 한 가족인 줄 알았다며 말했고, 이어서 최미소에게 방이 따로 필요 하느냐라고 물었으나 최미소는 괜찮다며 사양했다. 여기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다는 말과 함께.
"네, 그이는 자기 성은 여자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성을 따로 남기진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지안. 세상을 눈으로 새기다. 그렇게 지은 이름이에요."
"아기가 입을 옷이 필요하겠군. 지금 보니 신발도 만들어 줘야겠어."
지안이가 입고 있는 천 뭉치를 본 칸과 조이는 손으로 치수를 재는 시늉을 했다.
"아, 감사합니다···."
순간 고개를 휙 든 최미소가 감사를 표했다.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지안이를 위한 용품이 필요한 참이었는데, 난쟁이들이 아기 용품을 만들어 준다니 정말 잘된 일이지 않은가.
"무얼. 내 친우의 자식이라면 우리가 챙겨줘야지. 그러니 힘내서 살아가게나. 이게 우리가 해주고 싶은 말일세. 늙은이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저는 포기 안 해요. 그이가 그걸 바랐으니까."
최미소는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미약하지만 확실하게 존재하는 미소가 아기를 향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럼 편히 쉬어라. 이거 우리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 매트리스는 아까 봤던 그 창고에서 받아오면 된다. 내가 따로 말해 둘 테니 귀찮게 딴지를 거는 사람들은 없을 거다."
그녀의 감사 인사에 난쟁이 칸은 낯간지럽다는 표정을 헛기침을 하는 표정으로 감췄고, 식은 꿀차를 한 번에 들이킨 후에 곧장 방을 나섰다.
"칸! 이런···."
말릴 새도 없이 호다닥 나가는 모양새에 나는 뻗은 손을 슬그머니 내려야만 했다.
"허, 이 친구 성질 급한 것하고는. 현우야, 칸이 말했던 것처럼 많이 힘들었을 텐데 오늘은 푹 쉬어라. 너희 차에 실려 있던 수정의 봉인은 내일 풀어보도록 하자. 시간을 더 늦췄다가는 삐져서 변덕을 부릴 거다. 안 그래도 이미 한 차례 소동을 일으킬 뻔했다지?"
난쟁이 조이는 허허 웃으면서 자리를 정리했다. 대체 어느 틈에 들은 건지. 수정이 나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는 조이였다.
"아, 조이. 혹시 제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으세요? 어려운 부탁은 아니에요."
민망한 표정을 지은 나는 난쟁이 조이를 보며 말했다. 원래는 칸에게 부탁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그가 방을 나가 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목표를 변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말해 보게."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난쟁이 조이.
"다름이 아니고 손목 시계 좀 구해다 주셨으면 해서요. 저희가 본 창고에는 그런 장비가 보이지 않더라고요. 따로 보관되고 있는 건가요?"
"아, 손목 시계. 알겠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내가 시간 날 때 챙겨서 가져다주지. 근데 여기까지 오면서 시계도 없이 왔나?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놀랍구만."
"하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토해냈다.
시계.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장비.
내가 시계를 구하는 것에 힘을 쓰지 않은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구태여 이유를 들먹여 보자면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하루가 길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이 느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순식간에 지나가 있는 것이 시간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익사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시계를 구하지 않은 면이 있었다. 손목을 죄어 오는 시계는 내게 계속 흐르는 시간의 압박감을 부여할 테니까.
그러나 이제는 초읽기를 시작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따라서 나는 이제 시계를 찰 준비되었다고,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인식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어요."
"······?"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수염을 꿈틀거리는 난쟁이 조이의 모습에 나는 답을 바로 주는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조이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한세아와 지수는 매트리스를 받아오겠다며 나간 상태였고, 방 안에는 최미소와 예린이 남아 지안이를 돌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것도 별건 아니고···. 그냥 저하고 칸이 예전에 어땠는가 알고 싶어서요. 한번 떠봤는데 저한테 그닥 말해주고 싶어 하는 기색이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가지고 물어보는 거예요. 조이가 판단하기에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 저도 그냥 넘어갈게요."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게 물어보는 건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듣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두었다가는 앞으로 들을 기회가 없을 것 같기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내 약은 수작이었다.
"···흠. 나도 자세히는 모르네만, 이거라도 듣고 싶다면 들려주지. 그 친구에게는 내가 말했다는 이야기하지 말게. 노발대발 화내면 온종일 골치가 아프니."
난쟁이 조이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 직감했는지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나도 의자에 앉아 경청할 준비가 되었을 때.
"뿌리를 타고 넘어온 우리가 지구에 도착했을 당시의 일이네."
조이는 물로 입을 헹구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회상하는 듯 시선이 위로 올라가 있었다.
고향, 가족, 형제. 모든 것을 잃고 넘어온 난쟁이들을 받아 준 졸린사. 제 1연구소 지하에서 눈을 뜬 그들이 마주한 것은 한창 씨앗과 관련된 실험을 받고 있던 나였다고.
나는 자진해서 상태가 좋지 않은 난쟁이들을 케어했고, 그중 가장 많이 신경을 쓴 난쟁이는 바로 칸이었다고 했다.
넘어오기 직전, 눈앞에서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졌던 칸 말이다.
"단순한 이야기다. 우리 모두에게 통용되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살리기 위해 내보낸 가족은 죽고, 짐이 되기 전에 죽기 위해 남은 자신만이 살았다는 이야기에 조심스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최미소와 예린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특히 칸을 신경 쓰는 편이었지.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칸 그 친구는 천천히 기운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어."
힘없이 놓으려던 삶의 의지를 다시 붙잡게 만든 것이 나였다는 소리에 나는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입으로 단어를 분해하고 조립해도 완성품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형태가 잡히지 않는 말은 그저 입술을 달싹거리게 만들 뿐이었다.
"아, 예전에 내가 너한테 들은 말이 하나 기억나는구나. 우리를 왜 챙겨 주느냐는 말에 너는 내게 예전에 읽었던 책의 문구를 들먹이면서 이렇게 말했었지."
이것 하나만큼은 제대로 기억난다며 한 말.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이 뭔지 아세요? 바로 혼잣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는 거예요. 저는 칸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칸뿐만이 아닌 당신들도요.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걸 보는 건 지긋지긋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고작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남는 장사잖아요? 그럼 살려야죠.'
"···라고 말일세.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사람을 살리고 있는 것이라네."
-고작 우리가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남는 장사이지 않은가? 그럼 살려야지.
내가 한 말을 흉내 낸 조이가 긴 수염을 쓸어내리고, 허허 웃으면서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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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린이 일러스트 라이브 투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