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34화 (335/497)

Chapter 334 - 334. 길 (21)

"당시에는 우리 모두가 혼란스러웠던 시기라 다들 칸, 그 친구를 챙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 그때 네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칸에게도, 우리에게도."

난쟁이 조이는 다른 연구원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오직 자신들이 익히고 있는 기술과 입자로 행할 수 있는 이적뿐이었다고.

"현우 네가 칸을 혼자 두지 않아서, 네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어서, 혼잣말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아서. 칸은 지금까지도 삶의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네."

"······."

"그 덕분일까. 세계수가 폭주하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을 때, 칸은 다시 주저앉을 뻔했지만 끝내 다시 일어섰지. 네가 죽지 않았을 거란 믿음 그 하나만으로. 내가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칸은 널 아들로 보고 있는 모양이야."

조이의 이야기에 나는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당황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도 그럴게, 나는 과거의 기억이 사라진 상태였으니까.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난 이야기였으니까.

아무리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써봐도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은 없었다. 원래도 그러했지만, 오늘처럼 답답한 적은 처음이었다.

뭐라도, 단서 하나라도 떠오르면 좋으련만.

"···오히려 제가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드시지 않았어요?"

과거의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들을 대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낯선 상황에서 역할이 나누어져 있는 듯이 대하는 우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속마음은 알 수 없어도 당장 겉으로 보기에는 흔한 협상 기술인 당근과 채찍 혹은 굿 캅 배드 캅이라 불리는 것을 졸린사가 이용한 모양새이기도 했고.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 알고 있는가?"

난쟁이 조이는 내 말을 듣고서 허허 웃었다. 예나 그때나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서.

"네, 알고 있어요."

'눈은 마음의 창이다'라는 말. 인간은 눈빛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특징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예로부터 눈은 마음이 머무는 곳, 영혼의 창이라는 말로 불리어 왔다.

유일하게 위장할 수 없는 것이 눈빛, 다른 모든 부위가 거짓을 말해도 유일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눈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보는 너의 눈은 언제나 맑았지. 비록 어머니의 씨앗과 동기화를 하는 날이면 조금 흐려졌지만 말일세. 그래도 항상 투명한 눈빛을 보내는 너였기에 우리는 너를 믿었다. 우리를 미래로 이끌 것이라는 걸."

"······."

"그리고 그 믿음은 항상 네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기도 했고. 별에 대한 이야기도 했던 것 같은데, 이건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잘 기억나지 않는군."

난쟁이 조이는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라며, 더 말해줄 것도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름 진 손이 테이블을 툭툭 두드린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도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하루의 마지막 인사를 하지. 잘 돌아왔다. 푹 쉬거라."

처음 만났을 때도 했던 말이지만, 계속 말해주고 싶었다며 중얼거린 난쟁이 조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면서 돌로 된 의자가 바닥을 끌었다.

그렇게 조이가 방을 나선 것이 그때였고,

"아저씨, 이야기 다 끝났어?"

매트리스를 가지고 돌아온 지수와 한세아가 문밖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것이 그때였다. 이야기의 흐름을 끊을까 싶어 일부러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어, 미안. 많이 무거웠지? 내가 도와줬어야 했는데."

"아냐, 그냥 뭔가 더 듣고 싶은 이야기 있는 것 같아서 언니랑 나랑 이렇게 둘이서 다녀온 거야. 무엇보다 그다지 무겁지도 않았고. 우리 힘도 세졌거든?"

지수는 팔을 굽히며 근육이 모이는 자세를 만들었다. 허나, 두드러지는 근육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피식 웃다가 시선을 돌려 방 앞에 쌓인 매트리스를 바라보았다. 매트리스는 바닥에 깔린 질긴 비닐 위에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인원 수가 꽤 되는지라 바닥에 질질 끌어서 온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매트리스는 들어 올리니 어두컴컴한 곳에서 보관되고 있던 물건 특유의 퀴퀴함이 맡아진다. 어쩔 수 없는 냄새였고, 곰팡이가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었다.

'나중에 비 그치면 일광건조 싹 시켜야겠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매트리스를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지수와 한세아가 힘들게 끌고 왔으니 정리하는 건 내 몫이었다.

이윽고.

"와! 푹신푹신해!"

각 침대 위에 매트리스를 올린 다음 담요를 넓게 펼치고, 두께감이 있는 이불까지 덮자 예린이 침대에서 방방 뛰었다. 꺌꺌 웃으면서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기는 했으나, 먼지가 휘날리는 탓에 금방 말릴 수밖에 없었다.

"자자, 그만 뛰고 이제 잘 준비하자. 샤워실 잠깐 가 봤는데 시간이 늦어서 그런가 지금 아무도 없더라. 후딱 가서 씻고 오면 될 것 같아."

지수가 예린을 제지하며 한 말이었다. 그녀는 습기를 머금어 꿉꿉하고 끈적해진 피부를 만지작거렸다.

마침 나도 깔끔하게 씻고 싶은 참이었기에 곧장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 뒤로,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는 여분의 옷가지를 챙기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어색한 발걸음으로 아직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가 순찰하는 군인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길을 헤매고 있느냐 물었으나 그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호의는 감사했지만, 아직은 부담스러웠다. 그들도 우리가 낯선지 가끔 보안등이 켜지지 않는 곳이 있으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는 당부의 말을 남긴 채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저벅- 저벅-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팟하고 켜지는 보안등. 그것이 밝혀주는 길을 따라 샤워실이 있는 곳에 무사히 도착하니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먼저 씻고 나와도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 어서 들어가."

나는 꼭 자기 말대로 하라며 했던 말을 반복하는 지수를 샤워실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를 따라 예린, 한세아, 최미소가 우르르 들어갔다.

***

체감상 30분 정도 흘렀을 때.

"······."

"······."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는 샤워실 앞에서 다시 만났다. 서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채로.

생각보다 금방 만나게 된 우리였다.

샤워실 수온이 생각보다 더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밤이라서 그런 것일까. 사람들이 지금 샤워실을 쓰지 않은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인원이 여러 명인 그녀들이 금방 나온 것을 보면 말 다 했지 않은가. 그래도 물로 깔끔하게 몸을 씻은 덕분에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깔끔해진 상태였다.

"가, 가자. 빨리 이불 좀 덮어야겠어."

"저도 동의···!"

지수의 말에 곧장 꼬리를 흔든 예린은 앞장서서 일행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방을 나섰을 때만 해도 느껴졌던 어색함은 싹 날아간 후였다. 어색함보다는 몸에 내려앉은 한기가 더 신경 쓰였다.

그 한기 때문에 다들 모여서 몸을 서로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꼬리가 다리 사이로 말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누가 동물 아니랄까봐 뭉쳐서 체온을 보호하기 위함인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머리에 묻은 물기를 마저 말리고 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흐아···."

딱딱했던 바닥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했던 것이 어제였고, 단 하루에 불과했으나 등으로 느껴지는 매트 특유의 감촉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빨래는 한곳에 모아두셨죠? 내일 세탁실에서 빨 거니까 아직 가지고 있는 사람 있으면 지금이라도 세탁망에 넣어둬요."

침대에 누운 한세아가 손을 들어 방구석을 가리켰다.

"······."

다들 말이 없는걸 보니 전부 다 내놓은 모양이다. 말할 기운이 없는 것 같기도 했고.

대신 움직이는 사람은 있었다.

탁!

순간 벌떡 일어난 지수가 전등 불을 끄는 스위치를 누르고 돌아온 것이었다. 방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말없이 이어진 자자는 신호에 각 침대에서는 킥킥 웃는 웃음소리가 이어졌고, 이내 곤히 잠든 소리만이 들리기 시작했다.

방문이 제대로 잠긴 것을 확인했으니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환경인 까닭에 긴장이 빠르게 풀린 덕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잠에 빠져 들지 않았다.

그리고 최미소 또한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자요?"

하루의 대부분을 자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지안이를 곁에 둔 최미소가 나를 불렀다. 혹여 다른 일행이 깰까 작은 목소리였다. 그래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내가 듣기에는 충분한 소리였다.

"안 잡니다."

"그럼···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요? 지금이 아니면 또 한동안 바쁘실 것 같아서요···."

"······."

나는 최미소가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제 비바람이 몰아치는 천막에서 밤을 보낼 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그녀가 내게 시간을 내달라는 건 단 하나만을 의미했으니까.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건만.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했던 시간일까.

"테이블로 오십쇼. 복도로 나가서 대화하기에는 너무 춥잖습니까. 지안이도 보이는 곳에 있는 게 나을 것이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내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애써 억눌러 둔 감정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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