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6 - 336. 길 (23)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안 믿기는 게 제 심정입니다. 금방이라도 칼카타가 돌아올 것 같아요."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른 내가 한 말이었다. 한번 분출된 감정은 여전히 잔향처럼 남아 나를 괴롭혔다.
"···저라고 믿기겠어요?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이 목소리가 이렇게 생생하게 들리는데···, 당장에라도 저 문을 열고 킬킬 웃는 모습을 보여 줄 것만 같은데···."
나처럼 눈시울이 붉어진 최미소가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내 마음을 다잡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요. 생각을··· 좀 해봤거든요."
최미소의 말에 나는 말없이 시선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제 딸이 앞으로 나와 얼마나 함께 할까에 대한 생각. 그리고 우리 딸 인생에 제가 전부인 날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에 대한 생각이요."
"······."
"지금이야 제가 품에서 내려놓으면 곧장 울먹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에 제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고, 나중에는 혼자서 자겠다며 저를 밀어내겠죠."
···나는.
"굳이 제가 주는 밥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준 밥도 똑같은 밥이라는 걸 알게 될 테고···, 굳이 제가 놀아주지 않아도 언젠간 TV에서 나오는 귀여운 캐릭터를 보면서 놀 테고···, 제가 빨래를 개거나 옷장을 정리하는 걸 보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재밌다는 걸 알게 될 테고···."
나는 최미소가 무슨 말하고 있는 건지 곧장 이해했다.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좀 더 성장하면, 유치원에도 가겠죠. 그럼 더 많은 친구들이 생길 테고, 저는 모르는 친구들끼리만의 비밀도 생길 거예요. 다른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놀다 보면, 어쩌면 풋풋한 첫사랑을 할 수도 있을 거구요. 어느 날, 고민이 생겼다며 제게 다가와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울까요."
그녀는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언젠가, 우리가 만들어 낼 미래를.
반드시, 우리가 이뤄낼 세상을.
"더 나이를 먹게 되면, 제가 안아주는 것보다 그냥 침대가 편하다는 걸 알게 되겠죠. 그보다 더 빨리 알게 될 수도 있지만, 그럼 좀, 아쉬, 울 것 같아요.
······. ···후우······. 아이가 자란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인데, 이상하게도 조금 야속한 마음이 들어요. 세상의 전부가 엄마가 아니게 되고, 엄마보다 더 좋아하는 것들이 생길 거라는 느낌이 들어서일까요.
"
"······."
"저한테는 아이보다 더 좋은 것이 죽을 때까지 없을 텐데 말이죠···."
"죄송━"
"아뇨! 사과하지 마세요. 제가 고른 남편이에요. 현우씨가 잘못한 것도 없고, 남편도 당신의 사과를 바라지 않을 거예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최미소는 눈가를 거칠게 닦으며 내 말을 막았다.
"저는 언제가 제 품에서 벗어날 아이를 최선을 다해서 키울 거예요. 그리고 그 모습을 전부 하나하나 눈에 담아서 칼카타에게 말해 줄 거예요. 우리 딸이 이렇게 잘 컸다고···, 당신이 살린 생명이 벌써 훌륭한 어른이 되었다고···. 나 정말 많이 힘냈다고···."
"······."
"그러니까 저는 바보같이 울고만 있을 수 없어요. 괴로워할 시간도 없어요. 제게는 제 딸을 보는 시간도 부족하니까. 엄마는 강해야 하니까. 제 딸이 저를 어리석은 엄마가 아닌 좋은 엄마로 눈에 새겨 줬으면 하니까."
지안.
눈으로 새기다.
삶을,
인생을,
세상을,
가족을,
기억을.
"그리고 한 가지 개인적인 바람이 있거든요···. 제 딸이 다 컸을 때, 저한테 와락 안기면서 '그래도 우리 엄마가 최고다', '엄마를 제일 사랑해'라고 말해주는 걸 듣는 거예요. 저는 그거 하나면 족해요. 그 단순한 말 한마디만 들어도 저는 딸이 제 속을 썩인 일이 있었어도 다 풀어지겠죠. 아니, 풀어질 거예요. 그런 기억력 나쁜 엄마가 되고 싶어요."
"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될 수 있어요. 칼카타가 걸으라고 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멈추지 말고 끝까지 걸으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걸어서 그 길 끝에 있는 답을 확인하라고 했으니까."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최미소의 말에 답했다. 비록 그녀의 말은 물음이 아니었지만, 내게 묻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저도 주저앉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요?"
최미소는 내게 확답을 바라는 듯이 재차 물었다. 어느새 잔뜩 부은 눈가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연료 삼아 타오르는 불이었다.
감정은 본디 소모되어 희석되는 것. 하지만 그녀의 감정은 결코 바닥을 드러내는 일이 없으리라.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런 법이다.
"···저도. 저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래요. 그거면 됐어요."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나와 최미소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손가락만한 길이를 가진 초는 반쯤 녹아 있었다. 우리의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난 모양이다.
"피곤하실 텐데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지금이라도 어서 주무세요."
"음···. 아뇨, 저는 나가서 바람 좀 쐬려구요. 미소씨야말로 어서 주무십쇼. 지금 시간이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아침이 되기 전까진 시간이 있을 겁니다. 그냥 오늘 하루 푹 쉬시는 것도 좋고요. 적응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니까."
나는 빛이 없어 어두컴컴한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늘이 보이지 않으니 빛이 없고, 시간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지수, 예린, 한세아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건 볼 수 있었다.
"아···. 알겠어요. ···너무 무리하지 마요, 현우씨."
최미소에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잠긴 방문을 열고 조심스레 밀었다. 기름칠이 잘 된 덕분일까. 경첩은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휘이···
아무도 없는 복도는 한기가 제법 돌고 있었다. 환기가 되면서 벙커에 흐르는 바람 한줄기가 몸을 스쳐 지나간다.
바로 그때.
부스럭!
문고리가 색다른 소리를 냈다. 정확히는 문고리에 걸려 있던 검은 봉투가 낸 소리였다.
- 다음부터는 나한테 직접 물어봐라.
흐릿한 시야로 봉투 안을 보니, 손목시계들이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갈한 글씨체로 적힌 문구와 함께.
내가 난쟁이 조이에게 과거의 일을 물어본 걸 들켰고, 조이 대신 난쟁이 칸이 내가 부탁한 시계를 가져다준 모양이다. 그것도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말이다.
'···잠은 좀 주무셨을라나 모르겠네.'
어색하게 느껴지는 손목 시계의 무게감. 나는 괜스레 손목을 흔들었다.
-꾹
그리고 시계 버튼을 눌러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지금 시각은 오전 6시 24분. 바깥은 슬슬 해가 뜨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벙커 출입구가 있는 쪽으로 옮겼다. 내가 앞으로 향하는 방향마다 움직임을 감지한 보안등이 켜졌고, 내가 지나온 길마다 보안등이 꺼졌다.
이윽고.
"어? 어디 가십니까?"
입구 근처 홀에 도착한 것과 동시에 그곳을 지키고 있던 군인이 나를 불러세웠다. 묘하게 반가운 기색이 느껴져서 보니 나를 부른 것이 최명철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최명철씨. 차에서 뭐 좀 가져오려고요. 혹시 지금 나가면 안 되는 시간인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다른 분들이라면 제가 막았겠지만 당신은 그럴 이유가 없어서요.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네, 뭐···. 여기 시설 괜찮더라고요.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근데 부사수는 어디 가고 혼자 근무 서세요?"
나는 대강 인사치레를 한 뒤, 홀로 입구를 지키고 있는 최명철을 보았다. 그는 새벽 내내 여기 있었던 것 같았다. 안색이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하하···. 부사수 몫까지 합쳐서 벌 받는 겁니다. 불침번은 다들 하기 싫어하는 편이거든요. 아무튼 밖에 나가신다고 하셨죠? 위에 지금 비 많이 오는데 우산 없어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어차피 바로 앞이기도 하고요."
"계단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십쇼.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현우씨 당신에게 전달 사항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아침에 따로 찾아뵈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만난 김에 말해드리겠습니다."
"뭡니까?"
"별건 아니고··· 그냥 오전에 시간되실 때 연대장실로 가주시면 됩니다. 연대장님이 그 지시만 하시고 다른 말은 남기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신호를 받은 최명철은 입구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길을 터주었다.
계단을 한 칸씩 밟고 올라갈 때마다 빗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귀를 자극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육중한 철문을 열었고,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쏴아아아아···
빗줄기의 기세는 조금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지만, 하늘에서는 여전히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죽은 사람을 위로해 주는 비였다.
찰박!
앞으로 한걸음 내딛는 것과 동시에.
"후우···."
숨을 한차례 크게 들이키고 내쉬니 짙은 비내음이 맡아진다. 습기 가득한 그 내음에 주먹이 꽉 쥐여졌다.
이대로 내 목이 쉬어 버릴 때까지,
혹사당한 성대가 비명을 내지르지도 못할 때까지,
그렇게 소리를 내질러도 어차피 폭우 소리에 잡아먹혀 멀리 퍼지지도 못하겠지.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
그저 하염없이 바닥을 툭툭 두드리는 비를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현재의 풍경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그저 이 기억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킬 뿐이었다.
몸에 내려앉은 습기를, 눈을 자극하는 옅은 빛을, 여름비의 냄새를.
낭화.
굵은 빗방울들이 바닥에 부딪치며 물결을 만들어내었다. 그러한 물결은 서로 맞닿게 되면서 꽃망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필시 죽은 사람을 위한 꽃이리라.
비록 국화는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칼카타.
그의 죽음을 기리기에는 이 정도면 족했다.
그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난 후여야만 했으니까.
그래야 내가 그를 나중에라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볼 면목이라도 생기니까.
후두둑- 후두둑-
멍하니 서 있는 내게 빗줄기가 들이닥친다. 차가운 비가 옷을 적시고, 볼을 타고 흐른다. 그러나 내 몸을 잠식한 것은 한기가 아니었다.
나를 잠식한 것은 거센 비에도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였다.
"나는···."
그래, 나를 잠식한 것은 불씨였다. 칼카타가 내게 남긴 불씨였고, 언젠가 거대한 불길이 될 불씨이기도 했다.
세계수.
너를 불태울 거야.
조금 더,
아주 명확하게,
확고해진 결심이었다.
타협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찾은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