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37화 (338/497)

Chapter 337 - 337. 방향 (1)

후각은 가장 많은 기억을 가진 감각이다. 과거에 느꼈던 냄새를 맡게 된 순간, 시간이 아무리 지났어도 당시의 순간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향수가 증발해도 계속 남아 있는 잔향처럼, 그렇게 몸에 배어 오래도록 아른거리는 것처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난 순간부터 앞으로의 기억을 잊지 못할 거다.

쏴아아아···

비내음과 함께 퍼지는 짙은 나무의 향기가 내 곁에서 빠진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빠질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어디를 가더라도, 나이를 얼마나 먹더라도,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지금의 풍경을, 칼카타의 죽음을, 최미소와의 대화를 떠올릴 것이고. 죽을 때까지 어제의 기억을, 오늘의 기억을, 내일의 기억을 간직하겠지.

과거의 기억은 대부분 잊은 주제에 말이다. 그 기억들은 무슨 냄새를 맡아야 떠올릴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찰박-

대신 나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 형성된 물웅덩이를 괜스레 한번 밟아보았다. 밟는 순간 팍, 하고 비산하는 물방울들이 나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있는 우리를 왜 건드렸냐는 듯이.

"······."

이번에는 녹슨 금속 기둥이 있는 버스 정류장을 바라보았다. 칭칭 감고 있던 넝쿨이 금속을 부식시킨 흔적이 있는 장소. 기둥 하단에는 칙칙한 주변과 맞지 않는 싱그러운 녹색이 있었다.

금이 간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똑, 똑 맞을 때마다 떡잎을 활짝 펼친 새싹은 몸을 흔들었다. 이렇게 험한 환경에서도 기어코 싹을 틔워 낸 모습에 무심코 실소가 나왔다. 꼭 우리를 보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면서 빈틈을 만들어 내는 광경이 보인다. 먹구름 사이를 뚫고 나오는 아침 햇빛이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슥-

시야를 가리는 우산이 있었다. 정확히는 눈을 덜 부시게 만드는 투명 우산이었다.

"오빠, 여기서 이렇게 비 맞고 있으면 감기 걸려요. 어서 들어와요. 언니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조용히 다가온 예린이 한 말이었다. 아이는 괜스레 내가 서 있는 자세를 따라 하며 살짝 웃었다. 애써 유지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빨리 일어났네?"

"주변이 워낙 시끄러워서 말이죠!"

무슨 말인지 내가 되묻기 전에, 예린은 유리병을 꺼내 그 안에 담긴 가루를 살짝 뿌렸다. 주변으로 퍼지는 푸른 가루는 빗줄기 사이에서 반짝거렸다.

그와 동시에.

[냐아-]

짙은 회색의 털을 가지고 있는 동물 형상의 요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칙칙한 자기 색과 다르게 빛나는 햇빛의 파편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고양이 주변에는 여러 동물 형상의 요정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것들은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 위에서 물장구를 치기도하고, 금속 기둥이나 천장에 앉아 톡톡 튀는 빗줄기를 보기도 했다.

몽환적인 풍경이었다. 현실과 동화의 경계가 무너진 것처럼.

"자꾸 옆에서 따라오라고 울어 대더라구요. 방에 오빠도 안 보이고, 뭔가 이 고양이가 오빠가 있는 곳을 알려줄 것 같아서 같이 움직였어요. 그러다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군인 아저씨를 만났고, 밖에 비 온다고 해서 잽싸게 우산도 두 개 챙겨 왔죠. 혹시 오빠가 비 맞고 있을까 봐."

"······."

"그리고 짜잔! 제 생각대로 바보같이 비를 맞고 있는 오빠를 봤어요!"

여분의 우산을 챙기길 잘했다며 히히 웃은 예린은 우산 손잡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렸다.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우산을 따라 그 위에 떨어지고 있는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애옹···!]

난데없이 그 물에 얻어맞은 짙은 회색빛 고양이는 한차례 울음을 토해내더니 버스 정류장 처마 밑으로 호다닥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서 몸에 묻은 물기를 혀로 닦아냈다.

"···오빠."

어느새 표정이 가라앉은 예린이 나를 불렀다. 아이는 한숨을 천천히, 길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사실, 다 들었어요. 미소 언니랑 오빠가 새벽에 나누는 이야기요. 지수 언니랑 세아 언니도 들었을 거예요."

"···그렇구나."

어쩐지 새벽 내내 이상할 정도로 미동도 없더라니. 깊게 잠이 든 것이 아닌 자는 척이라 그랬던 모양이다. 내가 잠을 자지 못하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요. 아마 오빠나 언니들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거예요. 아니, 죽었겠죠. 그도 그럴게, 저는 아직 어려서 할 수 있는 게 솔직히 많지 않잖아요?"

"뭐? 누가 그래?"

나는 절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네가 있어 준 덕분이었다, 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예린은 몸을 휙 돌려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누가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제 생각이에요."

그리 말한 예린은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갔다. 지붕 아래에 있는 고양이를 달래면서.

무언가 고민이 가득한 얼굴에 나는 아이가 말하는 것을 기다려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찰박- 찰박-

예린은 귀를 작게 쫑긋거리면서 반투명한 고양이 형상의 요정과 함께 도로 위를 걷기 시작했다. 아이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물웅덩이가 부서지고, 고양이가 움직일 때마다 몸에 둘러진 햇빛이 부서진다.

천천히 걷다가 잠시 멈춰 선 예린의 옷과 반지가 비바람에 나부낀다. 아이는 고개를 잠시 뒤로 돌려, 고양이가 잘 따라오고 있나 확인한 후에 입을 열었다.

"제 자신을 탓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오빠에게, 언니들에게. 제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던 건 오빠랑 언니들 덕분이니까요."

아이는 우리가 두고 온, 우리를 앞으로 밀어낸 칼카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눈앞을 가로막는 건 흉물로 변한 고층 빌딩이었지만, 어느새 묘안으로 변한 아이의 눈은 그 너머에 있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예린 곁에 있던 고양이도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빠, 이거 줄게요. 저는 이제 이거 없어도 돼요. ···아니, 그렇다고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저보다는 이제 오빠한테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푸른 가루도 이제 거의 다 써가기도 하고, 무엇보다 반지는 소중한 사람에게, 소중해진 사람에게 주는 거라고 하니까."

찰박찰박 물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온 예린이 목걸이에 걸려 있는 반지 하나를 분리해서 내게 내밀었다. 아이의 손에는 주머니에 꺼낸 줄이 들려 있었고, 반지는 새로운 줄에 걸리게 되었다.

"···이거 네 부모님 유품이잖아. 그걸 나한테 줘도 돼?"

단순히 주변에 있는 요정들과 소통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장신구가 아닌, 예린이 내민 반지는 아이의 부모가 남긴 유품이었다. 내가 받기에는 너무 무거운 의미가 담긴 반지였다.

"말했잖아요. 소중해진 사람에게 주는 거라구."

마음을 정했다는 표정을 지은 예린은 작은 손으로 내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자기가 걸어 줄 테니 몸 좀 낮추라는 신호인 듯했다.

내가 얼떨결에 몸을 숙이자,

"꼭 걸고 있어요. 많이는 못해도 한번. 어쩌면 두 번까지 친구들이 오빠를 도와줄 거예요. 그걸로 오빠가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오빠가 저를 살려 줬으니까 이제 제 차례예요."

아이는 조막만 한 손으로 내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조금 낑낑대긴 했으나, 목걸이는 목에 제대로 걸렸다.

예린은 애써 밝은 표정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분명 아이도 우리 못지 않게 슬플 텐데 말이다. 칼카타와 친하게 지냈던 건 우리만이 아니었으니까.

장난기가 많은 칼카타와 예린은 서로 죽이 잘 맞는 편이었었다.

"······안아주세요."

바람에 흔들리는 반지를 본 예린은 무언가를 꾹 참는 표정으로 내게 팔을 뻗었다.

"···그래."

나는 그런 아이를 품에 넣었다. 작은 체구는 내 품을 다 채우지도 못했다. 그만큼 더욱 강하게 안아 빈 공간을 없앴다.

"오빠, 저는 살고 싶어요. 살아야 하구요···. 엄마랑 아빠가 그걸 바랐으니까. 제가 그걸 바라니까. ······오빠는 어때요?"

내 목에 팔을 꽉 두른 아이의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삶의 의지를 표출하는 몸의 체온이 따스하다.

"나도. 나도 살고 싶지. 그리고 살아야 해. 너희가, 칼카타가 그걸 바랐으니까. 내가 그걸 바라니까."

나는 그 생명력 가득한 체온에 기대며 말했다.

"그럼 제가 오빠에게 준 반지가 다시는 제 손에 돌아오는 일이 없게 해주세요. 저는 그걸 보고 싶지 않아요. 약속해 줄 수 있어요···?"

자기 부모처럼, 수리산의 부모처럼, 소방서의 칼카타처럼 죽으면 안 된다는 아이의 말.

"응. 약속할게."

절대로 죽지 말라는 아이의 말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딱 하나.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을 들려주는 것뿐이었다. 아이가 불안에 떨지 않게 떨리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로.

찰박!

나는 예린을 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비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햇빛은 비구름 사이로 어느 한 구역을 비추고 있었다. 고층 빌딩 사이의 풍경을 메꾸는 거대한 나무가 눈에 담긴다.

그것은,

우리의 터전인 지구를 엉망으로 만든 거목인 세계수였다.

그리고 우리 여정의 끝이자 다음 목적지인 연구소였다.

그래, 우리 인간은 죽지 않을 거야.

태양이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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