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8 - 338. 방향 (2)
나와 예린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아저씨! 어디 갔었어! ···뭐야, 뭘 하다 왔길래 홀딱 젖었어?"
의자에 앉아 있던 지수가 벌떡 일어나며 우리를 반겼다. 그녀는 이내 의아한 시선으로 나와 예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냥. 그냥 좀 씻었어. 근데 다 씻고 보니까 갈아입을 옷을 깜빡했더라고."
다 큰 어른이 청승맞게 비를 맞으면서 감정을 삭였다라는 말을 하기는 좀 그래서 나는 시선을 회피하며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우산을 씌워준 것이 예린이라는 건 더욱 말할 수 없었다. 창피하니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했던 행동이 얼마나 입에 담기 부끄러운 행동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래서 감정이 무섭다. 휘발성의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남은 건 이불킥뿐이니까.
"그나저나 봉투 안에 담긴 시계 봤어? 그거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씩 챙기면 돼. 새벽에 칸이 가져다준 거야."
나는 민망한 이야기에서 테이블 위 시계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이야기를 더 이어 나가기에는 내 낯짝이 두껍지가 못했다.
"안 그래도 갑자기 왠 시계인가 했는데, 아저씨가 부탁한 거였구나. 잘 됐네. 바깥을 볼 수가 없어서 시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거든. 일단 여기 수건."
나를 잠시 바라보던 지수는 순순히 바뀐 화제에 편승했다. 솔직히 다 알고 있는 눈치긴 했으나 별말없이 넘어가 주려는 듯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 내게 건넸다.
"고마워, 언니!"
예린도 수건을 받아 내게서 묻은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아이는 고개를 푸르르 털어 옷의 표면에 붙어 있던 물방울을 사방으로 떨어트렸다.
"근데 세아씨는?"
그렇게 서로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닦아내며 묻는 말에,
"언니는 배급 받으러 갔어. 금방 올- 아, 마침 말하니까 오네."
지수가 답하기가 무섭게 방문이 스륵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지수가 말했던 것처럼 한세아였다. 그녀의 손에는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그와 동시에.
"현우씨!"
나를 발견한 한세아가 묵직한 주머니를 내려놓고 곧장 뛰어왔다.
와락-
"말도 없이 나가면 어떡해요? 걱정했잖아요···."
"다들 깊게 자는 것 같아서 조용히 나갔다가 들어오려고 했습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한세아의 등을 토닥거렸다. 조용히 넘어가기에는 틀린 모양이다. 사실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들킨 것 같으니까.
"···다음부터는 메모라도 남기고 나가요."
한세아가 마음을 가라앉힌 것은 그녀가 만족할 만큼 나를 끌어안았을 때였다. 그녀는 강하게 안고 있던 팔을 풀면서 뒤로 물러났다.
눈가는 조금 붉었지만, 물기가 있지는 않았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내가 그렇게 불안해 보였던 것일까.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배급은 뭡니까?"
"아, 그 부사수라는 분이 아침에 찾아왔었어요. 지금 바로 가야 줄 오래 안 서고 물건 받을 수 있다면서요. 처음에는 굳이 배급을 받으러 가야 하나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굳이 안 받을 이유도 없어서 잽싸게 받아왔죠."
한세아는 바닥에 축 늘어진 주머니를 펼쳤다. 캔버스 원단으로 된 주머니 안에는 각종 식량이나 휴지 같은 생필품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안이 꽉 차 있는 초코바 상자 두 개까지.
"예린아, 이리 와 볼래? 너한테 줄 게 있거든."
"뭔데요···?"
물기를 다 닦은 예린이 말끔해진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무언가를 받는다는 생각에 기대감을 가진 듯 꼬리를 좌우로 살랑거렸다.
"자, 초코바 상자. 부사수씨가 너한테 돌려줘야 하는 거라면서 주더라. 참,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그 사람 이름도 모르네. 아무튼 예린이 네 거야."
"와! 초코바···! 열 배!"
무게감있는 상자를 받은 예린은 눈을 반짝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10배로 돌아온 초코바가 그렇게 기쁜 것인지 방방 뛰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였다.
예린은 투자 성공이라며 자축하는 기념으로 곧장 초코바 하나를 먹으려고 했으나,
"예린이 동작 그만. 스탑. 너 손에 든 거 초코바지? 지금 그거 먹지 마. 이제 밥 먹을 거니까."
뒤에서 킥킥 웃던 지수의 제지에 몸을 바싹 굳혔다. 웨이브치던 꼬리도 순간 멈췄다.
"하나만···! 이거 하나만!"
"안 돼. 도로 집어넣어. 안 그러면 저거 다 압수야."
"어째서···! 내가 번 초코바인데···! 왜 언니가! 나는 나보다 약한 자의 말을-."
아이는 소심하게 반항하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지만, 지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쓰읍!"
"······알았어. 약하니까 말 들을게."
결국 예린은 호기롭게 꺼내 든 초코바를 상자 안으로 얌전히 돌려놓는 수밖에 없었다. 귀와 꼬리를 힘없이 축 늘어트리면서.
"우리 빨리 아침 먹어요!"
언젠가 이 수모를 갚아주고 말겠다며 중얼거린 예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무룩한 기색을 집어던지고 외쳤다.
"그래, 밥 먹자. 의자에 앉아 있어."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리 외친 것인지 알 것 같은 나, 지수, 한세아는 피식 웃으면서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침이 간단하게 준비되었고 우리는 다 같이 의자에 앉았다.
최미소는 깊게 잠들어 있는 상태였기에 일부러 깨우지 않았다. 아침 정도야 넘어가도 되는 일이고, 무엇보다 그녀는 이제 막 잠든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나중에 일어나서 따로 챙겨 주면 될 일이다. 그러니 지금은 푹 자게 내버려 두는 것이 나으리라.
"세아씨."
나는 닭가슴살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한세아를 불렀다.
"넵?"
"세아씨도 시계 하나 챙기십쇼. 저랑 지수는 이미 챙겼습니다. 예린이랑 미소씨랑 세아씨만 챙기면 돼요."
"아아, 넵. 알겠어요."
한세아와 예린은 입을 우물거리면서 남은 시계를 구경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것을 서로 가진 그녀들은 희희낙락하며 손목에 시계를 찼다.
"오늘 하루는 푹 쉬는 걸로 합시다. 정확히는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 맞겠네요. 안 그래도 여기에 온 지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이니 적응 기간을 가질 겸 해서요. 어제보지 못한 시설을 같이 다니면서 봐도 좋겠네요."
비록 벙커 안에서 위험한 일이 생기진 않을 테지만, 혼자 다니는 것보단둘이 다니는 것이 맞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겨서 후회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조심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알았어! 그렇게 할게. 아저씨는? 우리랑 같이 안 다녀? 말하는 거 보니까 그런 것 같은데."
"어, 나는 오늘 따로 움직일 거야. 아까 최명철씨 만났었는데 나보고 오전 중에 시간 될 때 연대장실로 와달라고 하더라고. 밥 먹고 가면 시간 딱 맞을 것 같아."
연대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금방 오후가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난쟁이들이 찾아와 수정의 봉인을 풀러 갈 예정이었다. 봉인을 푸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도 오늘 하루가 바쁠 것이라는 건 알았다.
비록 오늘 잠을 자지 못해 조금 피곤하긴 했으나, 고작 하룻밤을 샌 것뿐이니 큰 문제는 아닐 듯했다. 실제로 몸에 큰 부담이 없기도 했고.
"아저씨만 오래? 우리도 그냥 따라갈까?"
"음···, 아니. 너는 세아씨랑 여기 마저 둘러보는 게 좋겠어. 아직 우리가 못 본 시설이 더 있는 것 같더라. 그런 곳 구경하고 나서 나중에 저녁에 만났을 때 뭐가 있었는지 말해주라."
지수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얼굴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아직 낯선 공간이기 때문일까. 나와 떨어진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다 같이 몰려다니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으니까. 최미소와 지안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가.
가뜩이나 마음고생이 심할 그녀 옆에 누군가라도 붙어 있어야 내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리고 세아씨. 혹시 오늘도······?"
나는 한세아의 눈치를 보며 말꼬리를 늘렸다. 내가 묻는 건 오늘도 알이 나오지 않았느냐는 거였다. 매일 낳던 알을 오늘도 낳지 않았다면 임신했을 가능성이 더 커지니 말이다.
"어, 그, ······네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한세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답했다. 그녀의 적색 단발이 아래로 미끄러진다.
그녀의 복부는 여전히 아무런 티가 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모두의 눈길을 끌었다.
한순간 집중된 시선에 얼굴이 더 붉어진 한세아는 꼼지락거리는 손으로 슬그머니 배를 가렸다.
"흐음···. 역시 공동 육아를······."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지수가 한세아가 가린 배의 틈을 찾아 손가락으로 찌르는 것과 동시에,
"힉! 하지 마요···!"
한세아가 격한 반응을 보이며 펄쩍 뛰었다. 소담한 가슴이 크게 흔들리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무리하지 말고 푹 쉬고 있으십쇼. 힘들다 싶으면 방에만 계시고요. 마침 제가 연대장실로 가니까 가는 김에 물어보겠습니다. 몸 상태를 진찰할 수 있는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네···."
한세아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 몸짓을 끝으로, 우리는 어지러워진 테이블 위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한동안, 혹은 오랫동안 이곳에서 지내야 하니 청결을 유지하는 건 필수이지 않은가.
그러다가 예린이 내게 준 반지가 튀어나와 이목을 끌었지만, 지수와 한세아는 별다른 말없이 그저 그렇게 됐구나 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누구보다 빨리 자리를 정리한 예린은 후식으로 초코바를 옴뇸뇸대며 박살 내고 있느라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잘 갔다 와."
"이따 저녁에 만나요, 현우씨."
꼬리를 흔드는 지수와 손을 흔드는 한세아의 배웅에 뭔가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은 나는 괜스레 헛기침하며 방을 나섰다.
이제 제대로 된 하루 일과를 시작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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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노는 예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