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40화 (341/497)

Chapter 340 - 340. 방향 (4)

연대장의 표정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다는 그의 말처럼.

"무기나 각종 장비는 지원 가능하네. 하지만 인적 지원은 아마 힘들- 아니, 불가능하겠지.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고, 남아 있는 사람들에겐 앞으로 달려갈 힘이 없어. 지원자는 받겠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게."

나는 연구소의 봉쇄를 뚫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최명철에게 듣기로는 현대 무기 체계로 문을 개방할 수가 없었다고.

"···연구소 문을 열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래, 패널에 손만 올리면 열리는 문을 권한이 없어 열지 못했지. 손만 대면 열리는 문을 말일세. 빌어먹을 그 문만 열면 되는 그런 쉬운 일을 못해서! 지금 우리는 이 모양 이 꼴이야. 우리들의 무기 체계가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건 염두해 두지도 않았었어. 지금까지 온갖 괴물들을 죽일 수 있는 건 우리 군이 가진 무기 덕분이었으니까."

"······."

"하지만 그 믿음은 제 2연구소로 간 우리 애들을 전부 죽음으로 이끌었지. ···그렇게 죽을 아이들이, 그런 곳에서 죽어야 하는 아이들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연대장은 무거운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결국 현재 우리의 전력은 반의반 토막도 남지 않은 신세. 그나마 남아 있는 거라고는 간신히 기동할 수 있는 전차 5대와 자주포 2대, 각종 기관총 10정. 그리고 소량의 폭약뿐이네. 단순히 진지 하나가 보유하는 전력이라고 한다면 과하지만,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이 가진 총 전력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하지."

돌파 작전을 실행한 건 겨우 두 번뿐이었으나 우리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는 연대장. 스트레스성 새치가 심한 그는 손가락으로 펜을 굴리며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석재 테이블 위에는 폐기된 작전안 들이 쓰인 서류들이 마구잡이로 널려 있었다. 더불어 현재 의견이 나온 작전안과 벙커의 남은 물자 체크 리스트, 어젯밤 창고에서 일어났던 소란에 대한 보고서, 사람들의 불만이 적힌 종이, 군인들의 근무 시간 조정, 마지막으로 희망 사항의 접수까지.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제일 상단부에 위치한 폐기된 작전안이었다. '아르마딜로 변종' 유인 작전. 세부 내용은 다른 종이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다.

종이에는 폐기되었다는 빨간칠이 되어 있기는 했지만, 연대장은 그것을 다시 검토 중인 듯 눈에 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연구소 돌파 작전 결과 보고서였다.

일 시: 05.19 장 소: 남산 일대 제 1연구소, 제 2연구소 생존자: 7명

일 시: 06.01 장 소: 남산 일대 제 2연구소 생존자: 없음

무엇을 얼마나, 누구를 어떻게 투입했는지에 대한 내용없이 짤막하게 적힌 보고서.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무심코 마른침을 삼키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움직여서 연구소 앞을 점령한 괴물들과 싸웠다네. 순조롭게 나무의 형상을 한 거인들을 처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니 문 앞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지.

바로 문을 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문은 요지부동. 푸른 막으로 된 장벽이 아이들을 막아 세웠어. 그리고 그게 패착이었다네. 문 앞에서 시간이 끌려도 너무 끌렸거든.

"

"······."

"보유한 포탄과 총알은 점점 바닥이 나는데 소란을 듣고 몰려드는 괴물들은 끝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7명이라도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었지."

연대장은 사방에 흩어진 서류를 한데 모으며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잠입 작전이었어. 다른 쪽으로 시선을 끈 다음에 최대한 은밀하게 연구소 앞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 권한이 없다며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말에 연구소를 짓는데 협조했던 난쟁이 한 명을 데리고 갔었지. 허나, 이번에는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네. 단 한 명도. 끝까지 문은 열리지 않았으니까."

"······."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들을 잠자코 듣는 수밖에 없었다. 연대장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으나, 그의 눈빛에는 후회 섞인 회한이 넘실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작전 실패를 인정하지 못한 자기 상관들은 자살하거나 도망가다가 죽었다는 이야기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자신이 최상급자가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마저 살기를 포기해 버리면 남은 아이들을 챙겨줄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까지.

"모든 것이 엉망이었어. 엉망으로 만든 건 바로 우리고, 참 웃기게도 마지막 남은 희망인 것도 바로 우리지. 하지만··· 아니. 그래, 도와줄 수는 있다네. 우리라고 가만히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 더 이상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어."

연대장의 말마따나 벙커의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나 미래를 위해 연구소를 돌파하는 것 둘 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그리고 둘 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기도 했다.

더 이상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다는 말 또한 위와 동일했다. 어느 것이든 전부 삶과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무기를 비롯한 각종 물자는 지원해주지. 그 무기를 다룰 수 있게 가르쳐 주는 사람들도. 자네와 함께 연구소로 가는 인원은··· 나중에 회의를 하고 나서 말해주겠네. 당장 답을 주기는 어려워.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를 불신하는 사람들도 꽤 있고."

결과가 비관적이라는 연대장의 말에 나는 그 정도만 해 줘도 감사할 따름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강제로 가라고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연구소로 가는 건 의지가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그래서는 안 되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연구소를 뚫지 못한다면 결국 모두가 죽는다는 건 나도, 연대장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지로 몸을 들이미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가 중요한 것이었다. 본인이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중간에 주저앉고 말 테니까.

나를 믿지 못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당연했다. 다짜고짜 생판 모르는 남을 믿으라고 한다면 미심쩍은 마음부터 들지 않겠는가.

아무리 내가 그동안 찾고 있던 사람이고, 졸린사 연구소 관계자라고 해도, 칼카타가 내게 연구소의 봉쇄를 풀 권한이 있다고 했어도 직접 가서 문을 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않나.

보기 전까지는 쉬이 믿을 수 없는 것이 맞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물자를 지원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저도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 들어오면 욕 엄청 먹을 줄 알았거든요."

"왜? 그동안 자네가 우리가 원할 때 나타나지 않아서? 아니면 갑자기 뜬금없이 안개를 없애고 나타나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냥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고요. 아무튼! 아까 경계 구역을 늘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칠흑의 뱀을 조심하세요. 그건 지하에서 길을 만들면서 움직이니까요."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며 말을 돌렸다.

"뱀이라면···. 아, 지렁이 변종을 말하는 거군. 듣기로는 그 기다란 놈이 탈피를 했다지? 그래서 지렁이에서 뱀의 형상으로 변했고 말이야."

연대장은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다며 펜을 손가락 사이로 굴려댔다. 그가 보고 있는 건 벽면에 걸린 지도. 여러 원으로 그려진 경계 범위는 여의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였다.

"지하 경계는 난쟁이분들에게 부탁해 보지. 또 할 말은 없나?"

"혹시 여기 의사 있습니까? 저희 일행 중에 검진이 필요한 인원이 있거든요."

"어디 아픈가? 그거면 의료용으로 쓰이는 수정이 있네만."

"아뇨, 아픈 건 아니라서 그건 괜찮습니다."

몸의 회복을 돕는 푸른 수정은 우리도 있기에 굳이 다른 수정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흠···. 말하기 곤란하면 일단 의술을 아는 사람을 보내주도록 하겠네."

내 얼굴을 본 연대장은 우리가 지내는 방으로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준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한시름을 덜 수 있게 된 나는 곧장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가뜩이나 힘든 상황인데, 서로 돕고 살아야지. 그럼 면담은 이걸로 마치도록 하지. 오전부터 수고했다네."

"예? 이거 면담이었습니까?"

"응? 몰랐나?"

몰랐다. 그저 연대장이 나를 따로 불렀다길래 왔을 뿐이었고, 미처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으려는 목적이 아닌 단순한 면담이었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원래 사람의 상태를 가장 확실하게 아는 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 않나. 나는 벙커의 관리자로서 자네의 상태를 알 필요성이 있었다네. 그래서 자네를 부른 것이지. 방금 우리가 나눈 대화는 면담의 연장선이었다고 이해하면 되겠군."

그러고 보니 예전 군대에 있을 때, 정확히는 신병이었을 때도 부대 관리자가 면담을 위해 따로 부르긴 했다. 현재 우리 상태를 신병 보호 기간이라고 한 것도 그렇고, 누가 군인 아니랄까 봐 사소한 것에서 티를 내는 연대장이었다.

"······직접 일대일로 대화를 나눠보니 어땠습니까? 제 상태는."

"무얼 묻나. 우리가 자네를 돕는다는 건 빈말이 아니야. 앞으로 잘 부탁하지."

연대장은 허허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나눴던 이야기가 전부 담겨 있는 몸짓이었다.

"예, 잘 부탁합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맞잡은 손은 굳은살이 가득 박혀 있어 딱딱했지만, 따뜻한 피가 돌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제대로 나눈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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