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41화 (342/497)

Chapter 341 - 341. 방향 (5)

···달칵!

나는 마체테를 손질하고 있었던 민머리 사내와도 인사를 나눈 뒤에, 연대장실에서 나왔다.

비록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를 보기는 했지만, 내가 건넨 인사를 제대로 받아주기는 했으니 제대로 인사를 나눴다고 해도 되겠지.

그리고 연대장은 내가 방을 나서기 직전, 한 가지 당부의 말을 남겼다. 과거의 일이 궁금하면 자신에게만 물으라는 말이었다.

내가 혹여 1차 작전에서 살아남은 7명을 찾아갈까 걱정하는 어조였다. 나도 생각이 있기에 그들을 따로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그들에게는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을 테니까.

아무리 그때 당시의 상황이 궁금하다고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온 후에는 바로 방으로 가진 않았다. 차 트렁크에 실린 짐을 방으로 옮겨야 하고, 겸사겸사 푸른 수 정도 안쪽으로 가지고 와야 하니 말이다.

봉인을 정확히 어디에서 푸는지는 몰라도 벙커 내부에서 풀지 않겠는가. 괜히 두 번 움직이는 것보다 미리 옮겨 두는 편이 낫기도 했고.

저벅- 저벅-

그리 생각한 나는 일행이 지내는 방이 있는 좌측 복도가 아닌 우측 복도로 몸을 꺾었다. 여전히 습기 가득한 공기가 폐부를 채운다.

복도를 걷는 와중에 마주친 군인들을 지나치고, 팟하고 켜지는 보안등을 지나 'ㄱ'자로 꺾인 코너를 돌고 나니 보이는 것은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옹기종기 모여 대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한가롭게 보내는 중이었다.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대략 10명에 가까운 인원이 있어서 홀에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오늘 비번인 사람들인 모양이다.

'···이번에는 군인이 없네.'

아침과 달리 현재 계단 출입구를 지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듯했다. 아니면 동이 트기 전까지만 입구를 지킨다거나 그런 거겠지.

이윽고.

끼이익-!

쏴아아아···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간 나는 바깥과 통하는 문을 열었다. 어렴풋이 들려오던 빗소리가 확연하게 커진다.

"후우···."

여전히 비가 내리는 외부. 비가 참 오래도 내린다 싶다.

그래도 잠깐 그쳤다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의 기세는 확연히 줄어 있었다. 다만, 하늘에 가득한 먹구름만큼은 여전히 짙었다.

픽업 트럭은 최미소가 주차했던 곳에 그대로 있었다. 벙커 입구 근처 버스 정류장 지붕 밑에 말이다. 덕분에 옷이 비에 푹 젖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찰박! 찰박!

나는 울퉁불퉁해진 아스팔트 도로 위에 고인 물웅덩이를 피하면서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간혹 부는 돌풍에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면서.

아스팔트 도로 위에는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위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차량을 대신해서 도로를 타고 있는 중이었다.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결은 멈추는 일이 없이 계속해서 흘렀다. 그것에 힘을 더해주는 건 고층 빌딩 배수구에서 쏟아지는 빗물이었다. 콸콸콸 쏟아지는 빗물은 물결의 두께를 더해주었으니까.

건물 외벽을 타고 미역처럼 축 늘어진 넝쿨들도 이때다 싶어 싱그러움을 한껏 드러내는 중이었다.

넝쿨이 꿈틀거리는 것을 애써 무시한 채로 도달한 픽업 트럭.

"어디 보자···."

차량에는 누가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여전히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여전히 트렁크에 실린 짐도 그대로였다. 푸른 수정마저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이걸 기다렸다고 하는 게 맞나···.'

그래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했다. 수정은 내가 근처에 다다르자 트렁크에서 나와 다시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데리러 왔냐며 빙글빙글 도는 모습에,

"가만히 있어. 말썽 부리지 말고. 이번에는 안쪽으로 같이 갈 테니까."

나는 그걸 슬며시 밀어내며 트렁크를 뒤적거렸다.

수정은 반짝거리는 푸른빛을 내뿜어 요란하게 불만을 표출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내가 뒤에 덧붙인 말을 들은 까닭이다. 그렇게 다시금 대기 모드로 접어든 수정이었다.

푸른 수정을 옮기는 것을 신경 써야 하니 짐을 한 번에 다 옮기는 건 무리. 가장 필요한 것들만 챙겨서 가져가야 했다.

둥둥 떠다니는 덕분에 무거운 수정을 힘들게 끌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일단 옷은 다 챙기고···, 분유는 무조건 챙겨야 하고···, 수건도 좀 챙기고, 샴푸나 이런 건 배급으로 받았으니까 나중에 챙기고···.'

그렇게 필요한 짐을 하나, 둘씩 꺼내놓는 사이에 손목 시계로 시간을 슬쩍 확인해 보았다. 현재 시각은 12시 36분. 딱 오후로 접어든 시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이른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기에 상자에 보관되고 있던 소분한 쌀도 챙겼다. 방으로 가면 간단하게라도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바로 그때.

"어라? 이현우씨!"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누군가 싶어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부사수가 있었다. 그가 반가운 기색을 띠며 나를 부른 것이었다.

"아, 부사수."

"···제 이름은 부사수가 아닌데요···."

툴툴거리며 입을 삐죽 내미는 부사수는 외부 경계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듯한 행색이었다. 겉에 두른 판초 우의가 비에 잔뜩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인식표 챙기셨습니까?"

"허어, 저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이번에는 당연히 챙겼죠!"

그는 내게 인식표를 내게 보여 주었다. 언뜻 자랑스레 보여 준 인식표에는 김철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철수···. 그래요, 철수씨. 근무하고 오는 길입니까? 혼자서?"

"네, 제가 맡은 구역은 혼자 설 수 있는 곳이거든요. 경계 구역이 딱 교차하는 지점이라. 제 양측 구역에는 둘씩 들어갑니다."

"그러고 보니 예린이가 오늘 아침에 되게 좋아하던데요. 초코바 주신 거 철수씨라면서요?"

"네!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어린아이와 한 약속은 더 잘 지켜져야 하고요. 그리고 저 이제 비번인데 짐 옮기는 거 도와드리겠습니다."

김철수는 근무 나가기 전에 예린과 했던 약속을 지킬 겸 해서 한세아에게 배급 받는 법을 알려주었다며 말했다. 원래는 내게 설명해주려고 했지만, 그때는 내가 방에 없었다고.

"엇, 아뇨. 괜찮-."

"자자, 사양하지 마시고! 이제 우리 한 식구 아닙니까! 후딱 챙기고 어서 방으로 가시죠!"

나는 부사수 아니, 김철수의 넉살에 결국 피식 웃으면서 그랑 같이 짐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저번에 세게 묶은 것에 대한 사과를 전했다. 다행히 김철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괜찮다며 흔쾌히 사과를 받아주었다.

"근데 저거 수정 원래 떠다녔습니까? 어제는 그냥 트렁크에 실려 있지 않았어요?"

김철수는 차량 근처에서 부유하는 푸른 수정을 보며 물었다. 그의 시선이 수정에 닿을 때마다 수정은 몸을 움찔거리는 것처럼 푸른빛을 토해냈다.

"저도 어제 알았습니다. 갑자기 혼자 둥둥 떠다니더라고요. 오늘 수정 봉인을 풀기로 했으니 저 모습을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겠지만요."

"안에 사람이 들어 있는 건 처음 보는데 참 신기한 것 같습니다. 꼭 냉동 인간이 들어 있는 캡슐 같아요. ······저 사람 살아 있는 건 맞지요?"

무슨 상상을 했는지 순간 몸을 부르르 떤 김철수였다. 판초 우의에 달라붙어 있던 물방울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살아 있습니다. 칸이 말하기를 지금은 꿈을 꾸고 있는 상태라고 하네요."

"그렇담 다행이지만···. 아, 얼추 짐 챙기신 것 같은데 이제 바로 내려가실 겁니까?"

"네네, 이제 갑시다."

나는 그리 말하면서 둥둥 떠다니는 수정에 밧줄을 걸었다. 다른 길로 새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팟!

내가 밧줄을 꺼내 들자 수정은 처음에 흠칫 놀라며 도망가려고 했으나, 이내 자신을 두고 가려고 묶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 얌전히 붙잡혔다.

꽉-

줄을 잡아당겨 매듭이 제대로 묶였는지 확인했고, 한 차례 잡아당기니 수정은 부드럽게 이끌렸다. 겉으로 보이는 모양새가 조금 이상하긴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우의만 접겠습니다."

김철수는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행색을 정리했다. 이대로 들어가면 물이 뚝뚝 떨어져서 혼난다는 말과 함께.

그 뒤로, 나와 김철수는 짐을 한가득 챙기고 계단을 내려가 벙커 안으로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오후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어제와 달리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푸른 수정이 이목을 끄는 것도 있겠지.

'···배려를 해줬다는 게 이런 말이었구나.'

연대장이 그런 말을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최대한 빨리 왔다고 생각했건만.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고 만 상황이다. 그 시간 동안 애꿎은 사람들이 얼마나 죽어 나갔을까.

"크흠! 그, 시간이 지나면 현우씨랑 일행을 잘 받아줄 겁니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그냥, ···그냥 다···. 에이, 아무튼 다들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만 남기도 했고요."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을 눈치챈 김철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는 중간에 말을 흐렸지만, 나는 중간에 빠진 말이 뭔지 알았다. 그들의 시선을 보면 알 수밖에 없었다.

- 그냥 다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일 뿐이니까.

분명히 이런 말이 들어갔으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