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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포밍-342화 (343/497)

Chapter 342 - 342. 방향 (6)

"그럼 저는 이제 가 보겠습니다."

나, 지수, 예린, 한세아, 최미소가 지내는 방에 도착한 순간, 김철수가 한 말이었다. 그는 들고 있던 짐을 문 앞에 내려놓았다.

"예? 그냥 가시려고요? 시간도 시간인데 저희랑 같이 밥이나 좀 드시고 가시죠."

"아뇨, 그러면 여친한테 혼나서요. 아마 지금도 계속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 여자 친구가 있으셨구나.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에이, 뭘요. 나중에 봅시다."

김철수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지나왔던 복도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판초 우의에서 뚝뚝 떨어진 물방울 자국이 생겼다. 덤으로 군화 모양의 뿌연 흙탕물 자국까지.

말이 흙탕물이지 사실상 그냥 바닥의 먼지와 뒤섞인 빗물이었다. 원체 비에 푹 젖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나중에 미끄러지지 않게 복도 한번 닦아야겠네.'

바닥의 짐과 수정에 연결된 줄을 잡은 나는 그리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다.

벌컥!

"오빠? 오빠다! 연대장 아저씨랑 무슨 이야기하고 왔어요?"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나를 반기는 아이. 예린은 침대에 앉아서 다리와 꼬리를 까닥거리고 있다가 나를 보자마자 도도도 달려왔다.

방에는 최미소와 지안이, 이름 모를 난쟁이 둘이 있었다. 지수와 한세아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 나다. 그냥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 좀 나누고 온 거야. 별거 없어. 지수랑 세아씨는?"

정확히 푸른 수정 앞에 멈춰 선 예린을 보며 물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난쟁이 둘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수와 한세아의 행방을 묻는 것이 먼저라 판단한 것이었다.

"우와···. 예쁘다!"

둥둥 떠다니는 수정에 정신이 팔린 예린은 내 말을 듣지도 못한 듯했다. 아이의 꼬리가 정신없이 휙휙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 둘은 빨래하러 갔어요. 나간 지 얼마 안 됐는데 중간에 마주치지는 못했나 보네요."

내 물음에 답을 준 건 최미소였다. 그녀는 똘망똘망 눈을 뜨고 있는 지안이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는 중이었다. 작게 트림하는 걸 보니 방금 막 밥을 먹은 참인 모양이다.

"아, 그렇습니까? 중간에 엇갈렸나 봅니다."

나는 문 앞에 놓아둔 짐을 안쪽으로 옮기는 한편, 침묵을 지키고 있는 난쟁이 둘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무슨 일이냐는 무언의 시선을 보냈다.

성질나빠 보이는 난쟁이 한 명, 수염이 짧게 난 난쟁이 한 명. 팔짱을 낀 채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난쟁이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수염이 짧은 난쟁이는 오늘 오전에 연대장실에서 봤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구···십니까?"

"허, 이 녀석은 몰라도 나도 기억이 안 나나?"

팔짱을 풀고 자신을 가리키는 성질나빠 보이는 난쟁이. 그의 입에서 고집 세 보이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 네. 죄송하지만 아무런 기억이 안 납니다."

가만히 살펴 보니 사진 속에 있던 난쟁이들 중 하나인 것 같긴 한데, 아무리 머리를 꽁꽁 싸매도 역시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빌어먹을! 우릴 다 까먹었다니!"

"르한 아저씨, 그 말은 좀 듣기 어색하니까 그냥 씨발! 이라고 하는 건 어때요? 이게 더 자연스럽다고 사람들이 그랬어요."

수염 짧은 난쟁이가 들고 있는 수첩을 뒤적이면서 분통을 터트리는 난쟁이의 말을 수정해주었다. 대체 수첩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일까.

"씨발! 우릴 다 까먹었다니!"

"뭐 하시는···? 아니, 애도 있는데 욕하지 마십쇼."

나는 황당한 느낌에 절로 헛웃음이 지어졌다. 욕을 고쳐주는 난쟁이나 그걸 고쳐줬다고 욕을 고쳐서 다시 내뱉는 난쟁이나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화를 오래 나눈 것도 아니건만, 벌써부터 피곤한 느낌에 머리가 아팠다. 가뜩이나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한데 말이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세요?"

"무슨 볼일이냐고? 이봐, 우린 기술자야. 이 다 무너져 가는 벙커를 살린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우리다! 우리가 없었으면 여긴 진작에 무너지고도 남았어! 지구의 인간들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느냐 여부도 상관없이 지반 자체가 주저앉았을 거다!"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진 몰라도 화가 많아 보이는 난쟁이 르한. 그는 테이블을 내려 치려다가 지안이가 눈에 들어오자 슬그머니 팔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잔뜩 화가 난 목소리와 달리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나쁜 사람은 아닌 듯했으나, 평소에 사람들에게 오해를 꽤 살 법한 난쟁이었다.

"아니, 그래서 무슨 일··· 아, 봉인 푸는 것 때문에 칸이 절 부른 겁니까?"

"칸! 너는 예나 지금이나 칸만 찾는구나! 아무튼 수정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 너를 데리러 온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야."

"저한테 바라시는 게 있으신가요? 아니면 필요한 거라던가.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돕겠습니다."

나는 나를 응시하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난쟁이 르한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잘못 건드리면 호통이 터져 나올 것 같았던 까닭이다.

"아니, 아니지! 그게 아니야! 우리가 네게 바라는 게 아니고, 네가 우리에게 바라야지."

불행히도 내가 한 말은 틀린 선택지였던 모양이다. 난쟁이 르한이 곧장 수염을 거세게 흔들었으니까.

그는 구석 벽에 기대져 있는 도끼와 총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가진 무기. 우리가 강화시켜 주겠다. 나는 그 말을 하려고 여기 온 것이야."

이번에도 툴툴거리는 말이었으나, 행동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목소리의 세기도 지안이의 눈치를 보며 줄인 그였다.

"저 도끼들이 너희들이 주로 쓰는 무기라지? 저걸 우리에게 맡겨라. 정확히는 내게 맡겨라. 지금보다 훨씬 쓸 만하게 만들어 주마."

"바꿔 준다고요? 어떻게요?"

"수정의 봉인을 풀면서 나오는 부산물로. 작업할 때 누가 옆에 있으면 집중이 안 되어서 비록 공정 과정을 보여 주진 못하겠지만, 이 부분은 내 기술을 믿어줬으면 좋겠군."

현재 방에 있는 총기를 비롯한 다른 무기는 강화를 할 수 없다. 푸른 입자가 도구에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일. 허나, 난쟁이 르한은 저 두 개의 도끼만큼은 다르다고 말했다. 푸른 입자가 도구에 깊게 배어 있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라는 말과 함께.

나는 르한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에 의왕시 캠프에서 지수의 소방 도끼 상태를 점검했을 때 이야기였다.

그녀가 도끼를 오래 써 왔던만큼 분명 마모된 부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건만, 도끼는 마모된 곳 없이 상태가 멀쩡했던 것이었다.

마치 도끼 군데군데에 박힌 푸른 입자 덩어리가 내구도를 유지시켜 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저희야 감사하지만- 아니, 감사합니다. 근데 저 중 하나는 제 것이 아니라 나중에 따로 의견을 구해야 해요. 그러니 실례가 안 된다면 제 것부터 바꿔 주시겠습니까?"

뭘 어떻게 바꿔 준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지수의 소방 도끼를 바꾸는 건 바뀐 내 도끼를 보고 나서 해도 늦지 않겠지.

"그 허락은 미리 구해놨다. 아이는 네가 좋다고 하면 자기도 좋다고 하더군. 아무튼 허락한다는 뜻이렷다?"

"예, 그럼 뭐 잘 부탁하겠습니다."

지수가 이미 그렇게 말했다고 하고, 예린과 최미소도 지수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니 나도 알았다며 수긍할 뿐이었다.

"그럼 완성이 되는 대로 가져오지. 내 볼일은 끝났으니 나는 이만 가 보겠다. 작업 시작 전에 준비할 게 많으니까. 그리고 이현우. 내 이름은 르한이다. 다시는 까먹지 마라. ······그래도 오랜만에 봐서,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군. 정말로 다행이야."

그리 말한 난쟁이 르한은 곧장 도끼를 챙겼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오후 2시까지 수정 발전실로 가면 된다는 말만 남긴 채.

"하핫- 르한 아저씨가 좀 막무가내였죠?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오랜만에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저렇게까지 힘이 많이 깃든 도끼는 처음 보거든요."

폭풍처럼 몰아친 상황이 하나 끝났지만 아직 난쟁이가 한 명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을 '탄'이라고 소개하며 말을 이었다.

"르한 아저씨는 언어 패치를 잘못 받아서 억양이 좀 센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옆에서 따라다니면서 말투를 고쳐주고 있는 거예요."

고쳐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안 좋은 쪽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난쟁이 탄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으니까.

사람의 열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타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말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지금 탄이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너는 왜 나가지 않고 여기에 남아 있냐는 물음에 탄은 수첩에 적힌 내용을 보여 주었다.

수첩에는 때에 맞게 쓰는 욕설 순위,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지지 않는 방법 3가지, 참는 것보다 내지르는 것이 낫다, 큰 소리를 내는 훈련 따위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

"아, 잘못 보여드렸네요. 이게 아니고 저는 연대장님이 이 방으로 가라고 해서 온 거예요. 일행 중 몸 상태를 봐달라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어요. 저 이래 보여도 한의학에 조예가 좀 있거든요."

"그러니까··· 한의사?"

"한의사는 아니죠! 자격증이 없으니까. 그냥 야매 정도로만 합시다. 뭐, 칼을 대고 그런 건 저도 무서워서 못 하니까 걱정 하지마시고. 그냥 진동을 몸에 흘려 보내서 상태를 파악하는 것만 하고 있어요. 근데 막상 오니까 저도 현우씨처럼 길이 엇갈렸는지 그분이 안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라며 짧은 수염을 매만지는 난쟁이 탄.

"아, 네···."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뭔가 위험하고 이상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확인만 한다는 말이지 않은가.

이제 와서 필요 없다고 내쫓기에는 내가 먼저 요청한 것이라 그러기에도 민망하다.

'낌새가 정 이상하면 세아씨가 먼저 사양하겠지. 나빠 보이는 사람도 아니고.'

정상인인 척하는 미친놈은 아니겠지. 애써 그리 생각한 나는 예린과 같이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직 오후 2시가 되기 전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 밥을 먹고 가면 딱 맞을 듯했다.

"미소씨, 혹시 알러지 같은 게 있으시면 바로 말해주십쇼."

"저는 뭐든 잘 먹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탄은요? 이왕 기다리는 거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기다리는 게 낫잖아요. 금방 올 것 같지도 않고요."

"미역만 아니면 됩니다. 못 먹는 건 아니지만 그 흐물흐물한 식감은 아무리 먹어도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알겠습니다. 예린아! 자꾸 어디 가. 수정은 이제 그만 보고 캔이나 좀 데워줘."

나는 수정 안의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는 예린을 불러들였다. 아이는 수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불투명해서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일까.

"앗, 네···!"

내 부름에 정신을 확 차린 예린은 도도도 달려와 냄비에 물을 마저 올렸다. 그러면서 시선은 여전히 수정을 향해 있었다.

'푸른 수정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하긴, 안에 사람이 담겨 있다는 것만 빼면 오묘한 푸른빛을 흩뿌리는 수정은 장식용으로 아주 훌륭하긴 했다. 전구 대신 사용하고 싶을 정도로.

웅-!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수정이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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