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4 - 344. 방향 (8)
화르륵!
미처 흡수되지 못한 푸른 불이 수정의 표면을 타고 흐른다.
"칸, 좀 줄일까요?"
나는 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웅웅 울리는 수정이 내가 주입하고 있는 불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줄이지 마라. 지금 상태를 유지해. 그러다가 내가 신호를 주면 출력을 올려라. 형태를 고정시키려면 지금보다 더 강한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난쟁이 칸은 내가 계속해서 수정에 불을 주입하고 있는 것처럼 그 또한 계속해서 푸른 수정의 표면에 여러 금속 장치들을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콱-
뭉툭한 바늘이 표면에 고정될 때마다 수정 내부에 응집되는 푸른 불의 크기가 커지고 있었다. 불이 지나갈 수 있게 통로를 열어 주는 느낌이었다.
콱!
원형으로 뭉친 푸른 불은 이내 난쟁이 칸이 새로운 쇠바늘을 푸른 수정에 부착하자 납작해졌다. 정확히는 얇은 선으로 변했다는 것이 옳았다.
파이프관을 타고 도는 것처럼 수정 주위를 빙빙 도는 푸른 불과 불이 중간에 꺼지지 않게 연료를 주입하는 것처럼 입자를 더 불어넣어 주는 바늘.
불은 열쇠의 재료이고, 바늘은 열쇠의 형태를 잡아주는 장비였다.
단단히 잠긴 자물쇠를 푸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그에 맞는 열쇠를 넣고 돌리는 것이지 않은가. 지금 난쟁이 칸이 하고 있는 건 그런 과정이었다.
얇은 선으로 변한 푸른 불이 수정을 완전히 한 바퀴 둘렀을 때.
"···준비해라. 아니다, 지금부터 출력을 조금씩 올리거라. 내가 그만이라고 할 때까지."
난쟁이 칸이 신중한 얼굴로 각 손에 바늘을 쥔 채로 말했다. 수술을 집도하기 전 라텍스 장갑을 낀 모양새였다.
"오래 걸려요?"
"그거야 너 하기에 달렸지. 네가 다른 걸 할 필요도 없이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금방 끝날 거야. 네 불이 내 예상보다 더 정순한 덕분이다."
그러니 어서 출력을 높이라는 눈짓을 보내는 칸이었다.
화르르륵!
내 끄덕거림과 함께 올라간 화력에 얇은 선으로 변한 불의 응집체가 순간적으로 불안정하게 형태가 흔들렸다. 막대기 안의 내용물이 터져 나오는 듯 삐죽삐죽 솟은 모습이었다.
"더 올려라. 흔들림이 길을 찾을 수 있게."
칸은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양손에 각각 쥔 바늘로 삐죽 솟은 불을 잡았다. 처음에는 다시 안으로 집어넣으려는 행동인 줄 알았으나, 이내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치이익-
집어넣기는커녕 핀셋처럼 불을 잡은 그는 오히려 불을 막대 바깥으로 끄집어냈던 것이다. 덕분에 얇은 선은 더 이상 선으로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이어서 난쟁이 칸은 길어진 불을 위로 쭉 늘렸다. 망설임 없는 그 행동은 선을 사각형의 형태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각형은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격자 무늬를 띠기 시작했다.
푸른 수정의 내부를 채우는 격자 무늬의 선은 마치 회로를 따라 길이 열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복잡한 퍼즐이 풀리는 것처럼 혹은 미로에서 출구를 찾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사방으로 퍼진 격자 무늬가 푸른 수정을 절반 이상 뒤덮었을 때.
파지직!!
수정 발전기에서 불안한 스파크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레 튀어 오른 스파크는 처음에 본 것보다 현저하게 약했지만, 내 불안감을 싹 틔우기에는 충분했다. 폭주하기 직전, 발전기가 미리 경고성을 발하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이 폭주이지, 폭발이라는 소리와 다름없지 않은가.
"······어? 어어? 칸! 이거 터지는 거 아니예요?"
"···봉인은 순조롭게 풀리고 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지금 멈추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그의 말마따나 수정 발전기가 스파크를 쏘아낸 순간부터 소녀가 담긴 수정에는 점점 금이 가고 있는 상태. 느리지만 착실하게 봉인이 풀리고 있는 것이었다.
헛기침으로 대화를 끊은 칸은 입을 꾹 다문 채로 푸른 불을 인도하는 것에 온 신경을 쏟았다. 나도 입을 다물었다. 상황 회피가 아닌 정말로 집중해야만 하는 타이밍이었으니까.
괜히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가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그와 별개로 후방에서 들려오는 스파크의 소리는 여전히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파직!
게다가 그 스파크는 간혹 내 등을 따갑게 만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몸이 화들짝 놀랐고 하마터면 푸른 불의 주입을 멈출 뻔했으나, 이를 악무는 것으로 간신히 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쩍 쩌적-
파지지직!
푸른 수정의 표면에 수많은 금이 새겨지고, 과부하를 받고 있는 수정 발전기에서 붉게 달아오른 스파크가 크게 튀었을 때, 항상 한 번에 큰 화력을 쏟아 내기만 했을 뿐, 이토록 오래 일정한 출력을 유지한 적이 없었던 내가 식은땀을 뚝뚝 흘리고 있을 때.
"됐다! 이제 손 떼거라! 더 이상 불은 필요 없어!"
마침내 난쟁이 칸이 외쳤다. 그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푸른 수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가 푸른 수정에게서 손을 떼어낸 것과 동시에.
키이잉······
점점 붉게 달궈지고 있던 수정 발전기의 빛이 꺼졌다. 점점 무서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발전기가 푸른 수정과의 연결이 끊기자 비활성화 상태로 접어든 것이었다.
그리고.
촤르르르-
금이 쩍쩍 갈라진 푸른 수정 또한 터지지 않았다. 그저 모래성이 부서지는 것처럼 여러 크기의 파편으로 분리되어 허물어졌을 뿐이었다.
이 중 큼지막한 푸른 수정 조각은 현재 비활성화된 수정 발전기를 보완하는데 쓰일 것이고, 대체로 작은 조각들은 나와 지수의 무기를 강화하는데 쓰이겠지.
파편 사이사이에 흩날리고 있는 가루는 모아서 예린에게 주면 될 듯했다.
하지만 그런 파편들을 처리하는 건 나중의 일이었다. 나와 난쟁이 칸이 수정의 봉인을 푼 것은 파편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헉···, 허억···."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허공에 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귀가 긴 소녀, 목덜미에 월계수 모양의 숲지기 표식이 있는 소녀의 손에는 작은 활이 들려 있었다. 복장도 내가 입고 있는 옷과 달랐다. 현대식이 아닌 좀 더 중세에 가까운 옷이었다.
"끄응···!"
허공에 떠 있는 소녀는 점점 아래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기에 나는 일단 무거운 몸을 일으켜 소녀를 받아 냈다.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가벼웠다.
수정 안에 있는 걸 봤을 때와 현재 내가 보고 있는 그녀의 외관은 조금 달랐다. 녹색 머리칼인 줄 알았던 것이 이제 보니 금발이었다. 아무래도 수정이 푸르러서 그렇게 보였던 것 모양이다.
그녀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 그러나 숨도 제대로 쉬고 있었고 눈꺼풀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으니 단순히 시간문제일 뿐, 큰 문제는 없으리라.
"어후···. 칸, 이제 다 끝난 거 맞죠?"
나는 소녀를 바닥에 얌전히 눕힌 다음에 같이 드러누웠다.
"그래, 어떻게 잘 끝났구나. 어디 다친 곳 있느냐?"
"조금 피곤한 거 말고는 없어요. 칸은요?"
"나도 괜찮다."
난쟁이 칸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훔치는 한편, 발전실 바닥을 어지럽게 만든 수정 파편들을 상자에 담았다. 하나라도 놓칠까 눈을 부릅뜨면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수정이 아니니 그럴 만도 했다.
"근데 이 발전기 불이 안 들어오는데 고장 난 거 아니예요?"
금방 불이 들어와 재가동이 될 것이라는 내 생각과 달리 수정 발전기는 여전히 빛을 잃은 상태였다. 그 탓에 발전실 내부가 어두웠다.
아마 벙커 내부도 마찬가지이겠지. 발전기가 돌지 않으면 벙커의 전력을 충당할 수 없으니까.
"망가지진 않았다. 에너지를 한 번에 많이 뽑아서 과부하가 온 것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가동될 거고. 오늘 하루는 전력 공급이 불안정할 수 있다고 미리 말도 해 놓았으니, 네가 신경 쓸 건 없다."
"그럼 다행이지만···. 이 아이도 금방 일어나겠죠?"
곤히 잠들어 있는 소녀의 귀를 보니 뭔가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가끔 쫑긋거리는 모습은 더 신기했다.
"정신을 가라앉히는 수정이 부서졌으니 금방 일어나겠지. 어디 다친 곳도 없어 보이고."
바닥에 널브러진 수정 파편을 대부분 챙긴 난쟁이 칸이 무어라 말을 더 이으려고 한 순간.
"······!"
소녀가 눈을 번쩍 뜨면서 곧장 몸을 일으켰다. 몸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눈 깜빡할 새에 그녀는 우리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 중이었다.
휘이이이!
화살도 없는 활이건만. 시위가 당겨진 활에는 회오리 치는 바람이 메겨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쏘아질 것 같은 매서운 바람이었다.
"어어?! 칸! 쟤 왜 저래요!"
그 모습을 본 나는 당황하며 일단 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난쟁이 칸도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눈초리다.
"?? ??? ?????!"
"뭐? 뭐라고 하는 거야?"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소녀의 입에서 나왔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언어를 처음부터 가르쳐야 하나 싶은 걱정이 들긴 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매우 당황스러웠다.
적대적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무기도 들고 오지 않았건만. 아니, 애초에 무기는 난쟁이 르한이 가져갔으니 도끼는 가져올 수도 없었다. 그래도 뭐라도 가져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당장 급한대로 수정을 묶었던 밧줄로 제압해야겠다라는 내 생각이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사이에 동일한 말을 재차 외치는 녹안의 소녀.
"······이런. 언어 패치를 깜빡했군."
다급하고,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지은 소녀를 보며 난쟁이 칸이 그제야 한 말이었다. 어느새 당황에서 벗어난 그는 이런 식으로 봉인을 푸는 것은 처음이라 깜빡하고 말았다며 중얼거렸다.
"예? 그럼 어떻게···."
"흠, 가만히 있어 봐라. 내가 이럴 때 쓰는 특효약을 알지."
그는 상자에 넣어 두었던 가장 커다란 수정 조각을 꺼내 들었다. 그걸로 뭘 하려는 것일까. 언어 패치를 하려는 것일까.
저벅- 저벅-
난쟁이 칸은 앞을 가로막은 나를 밀어내고 금발 녹안의 소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좁은 발전실이었기에 그는 순식간에 소녀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
확 가까워진 난쟁이 칸을 본 소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살짝 여는 것과 동시에.
빠악!
칸이 등 뒤에 숨긴 수정 조각으로 소녀의 머리를 내려쳤다.
"악!"
한 방에 보내 버리겠다는 듯 강한 힘이 실린 내려치기는 소녀가 비명을 길게 내지를 틈도 없이 기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활에 메겨진 바람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흩어지는 건 덤이었다.
"······칸?! 뭐하는 거예요!"
잠시 멍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다급하게 달려 나가 기절한 소녀의 상태를 살폈다. 수정 조각으로 대체 뭘 하나 싶었는데, 이걸로 머리를 후려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다행히 소녀의 머리에는 혹이 좀 생겼을 뿐, 피가 철철 난다거나 하는 부상은 없었다.
"그걸로 애 머리를 때리면 어떡합니까!"
기껏 힘들게 봉인을 풀었더니 이런 짓을 하면 어떡하냐, 하마터면 칸이 아이를 죽일 뻔하지 않았느냐라는 뜻이 담긴 내 외침에,
"원래 망가진 걸 고칠 때는 주먹이 최고다. 잠깐만 그대로 꼬맹이 잡고 있어라. 이제 기본 언어를 주입할 테니까. 본래는 처음부터 한 글자씩 배우는 것이 이치에 맞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글자를 가르칠 시간이 없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돌아오는 답이 가관이었다.
"아니···."
나는 짐짓 당당한 칸의 태도에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주먹으로 해결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칸 기술자라고 했잖아요. 기술자가 때려서 고친다는 말을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요?'
이런 말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나도 고장 났냐며 머리가 찍힐 것 같았으니까.
그것도 주먹이 아닌 큼지막한 수정 조각으로 말이다.
***
칸이 수정 파편으로 소란을 잠재운 후, 나는 소녀를 가지런히 바닥에 눕혀 두었다. 언어 패치를 하기 전에 자세를 편하게 만들 필요성이 있는 까닭이었다.
아직 이름을 모르는 소녀에게 언어를 주입하는 과정은 별것 없었다. 그저 나와 연결된 수정을 소녀의 이마에 맞대고 있으면 될 일이었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안의 푸른 입자가 조금씩 소모되면서 소녀에게 넘어가는걸 보니 뭐가 되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이러고 있으면 제가 가진 정보가 이 아이한테 넘어간다고요?"
"그래, 수정은 일종의 저장고나 다름없거든.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입자든, 다른 에너지든, 기억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무엇이든요? 바람이나 염원 같은 것들도 담기나요?"
"그렇다. 그래서 우리 중 일부는 수정을 영혼석이나 소원석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기본적으로 수정은 크기가 커질수록 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모으려는 성질도 가지게 된다는 칸의 설명에 나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질색이었다.
'나중에 약이나 발라줘야겠다.'
귀가 긴 소녀의 머리에 뾱 솟은 혹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꽤 아파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근데 정말 언어말고 다른 정보는 전해주지 않을 거냐?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왕 하는 거 한 번에 이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넣어 버리자는 칸. 그는 골칫덩이를 보는 것처럼 기절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언어를 넣어 주는 것만 해도 머리에 부담이 많이 간다면서요. 안 그래도 머리 맞고 기절한 애인데 더 무리를 주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긴 하다만···. 에잉, 네 마음대로 하거라. 나도 네가 하는 말이 영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난쟁이 칸은 그리 말하면서도 무언가 못마땅한 듯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소녀에게 처음부터 너무 많은 정보를 주는 건 옳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저 가장 기본적인 상식인 사람을 함부로 해치면 안 된다는 정보나 사과하는 방식같은 정보를 주입해 줄 뿐이었다.
서로 충돌이 적은 정보들끼리는 그나마 머리에 부하를 많이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들고 있는 수정. 즉, 소녀의 머리에 맞대어진 수정이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빛이 사그라졌을 때.
"으으······. 머, 리 아파···. ···힉?!"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받아 낸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녹안은 살짝 풀려 있었다.
우당탕!
그렇게 깨어난 소녀는 한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나, 눈을 뜬 순간부터 내 등 뒤에서 나오질 않았다. 정확히는 내 맞은편에 있는 난쟁이 칸을 보자마자 몸을 숨긴 것이다.
명백하게 기절하기 직전의 상황을 기억하는 행동이었다.
"흐끅···."
내 옷깃을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울음기 가득한 숨소리가 전해진다. 일견 사나웠던 처음의 기세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꽈악-
내 옷을 놓으면 죽기라도 하는지 그저 필사적으로 움켜쥘 따름이었다.
가뜩이나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머리를 맞아 기절까지 했으니 무서워할만도 하다. 나이도 어려 보이고.
차라리 기억이 날아갔으면 무서움이 좀 덜했을까. 아픈 건 그대로였겠지만.
"···칸을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게 얌전히 말로 하시지···."
"현우야."
"네?"
"가만 있어 봐라. 한 대 더 때려서 고쳐야겠다."
"으아아앙!"
난쟁이 칸이 다시금 짱돌 아니, 수정 파편을 집어 들자 팡 터지는 울음 소리.
"아 좀! 그거 내려놔요!"
나는 소녀를 더욱 뒤에 숨기며 칸에게 외쳤다.
사람은 셋 밖에 없는데 아주 개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