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라포밍-345화 (346/497)

Chapter 345 - 345. 방향 (9)

난쟁이 칸이 몇 차례 손을 보자, 다시 가동을 시작한 수정 발전기. 그것에서 나오는 푸른빛이 발전실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사, 살려주세요···."

내 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소녀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잔뜩 겁을 먹었다는 걸 알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칸, 발전기가 망가질까 봐 빠르게 제압한 건 알겠는데 너무 세게 때렸잖아요. 이거 봐요. 애 이렇게 겁먹은 거."

"흥, 만약 그대로 뒀다면 어떻게 됐을 줄 알고? 만에 하나 바람이 쏘아졌다면 여기는 완전 난장판이 되는 걸 떠나서 벙커가 완전히 끝장났을 거다."

칸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의 말마따나 활에 메겨진 바람이 쏘아졌다면 진짜 끝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큰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히끅거리는 소녀를 보니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느낌이 들었다. 좀 더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자자, 일단 미안해. 많이 아팠지?"

나는 내 가슴팍까지 겨우 오는 체구인 소녀를 달랬다. 나도 칸처럼 낯선 사람이기는 매한가지일 텐데 어째서인지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그녀였기 때문일까. 내 말은 좀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안 죽여요···?"

"안 죽여! 우리가 널 왜 죽여. 무서운 소리를 하네."

"그럼···."

자신을 왜 때려서 기절시킨 것이냐라고 표정으로 묻는 소녀.

"이거 보이지? 발전기라고 하는 건데 저게 우리한테 엄청 중요한 거거든. 혹시 저게 손상을 입으면 터질 수도 있어서 부득이하게 제압할 수밖에 없었어."

"······."

내 말을 속으로 곱씹던 소녀는 자신이 기절하면서 놓친 활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대편에 있는 수정 발전기를 눈에 담았다. 천천히 혼란을 가라앉힌 그녀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는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후우···."

얼추 돌발 상황이 잠재웠다고 판단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소녀였지만 이제 울지는 않았다.

"역시 너를 잘 따르는구나."

옆에서 상황을 다 지켜본 난쟁이 칸이 팔짱을 낀 채 한 말이었다.

"······칸이 조금만 더 살살- 에휴, 아닙니다. 근데 역시라뇨?"

나는 그에게 핀잔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핀잔은 괜히 또 긁어 부스럼이었다. 대신 칸의 말에 의문이 든 부분을 짚었다.

"네가 품고 있는 조각에게서 오염되지 않은 어머니의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럼요."

"그 기운은 귀쟁이 아니, 귀가 긴 특성을 지닌 자들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다. 말이 어머니의 기운이지 네가 남자인 성별을 지니고 있다는 건 큰 상관이 없어. 어차피 성별로 구분되는 기운이 아니니까."

난쟁이 칸은 아직까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수정 조각을 이제서야 상자 안에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한마디로 너를 잘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너와 나나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이렇게나 반응이 다르지 않느냐.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에게 기대는 것이지. 푸른 입자를 보유한 사람들끼리 서로 이끌린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보면 된다."

나는 다시 한번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어찌 되었든 내가 이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인 만큼 소녀가 본능적으로 나를 잘 따른다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시간을 아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름이랑 나이는 기억하니?"

"······. 이름은··· 엘프리데고···. 나이는 스, 스물···?"

자기 이름을 엘프리데라고 밝힌 소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숫자를 하나하나 세더니 20이라는 숫자를 말했다. 수정을 통해 주입된 언어가 아직 그녀가 알고 있던 언어와 완전히 매치가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약간은 어눌한 말투였다.

뒤에서 난쟁이 칸이 말을 덧붙이기를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자연스러워질 것이고, 말을 많이 하게 만드는 것도 언어를 익숙하게 만드는 한 방법이라 했다.

'그나저나 스무 살이라고?'

말이 어눌한 건 큰 문제가 아니다. 그냥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면 될 일이었으니까. 허나, 나이가 스물이라는 건 예상치 못했다. 이미 성인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예린보다 조금 더 성장한 것처럼 보이는 외형에 비해 성년이라는 말에 내가 살짝 당황한 사이에, 칸의 설명이 이어졌다.

"귀쟁이들은 다른 특성을 지닌 사람들에 비해 수명이 긴 편인 대신에 성장이 느린 편이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수명이 얼마나 긴 편인데요?"

"나 같은 난쟁이가 얼추 100까지 산다고 하면 귀쟁이들은 일반적으로 200까지 살 수 있지. 세계수가 있는 곳에서 살면 수명은 더 늘어나고."

"거진 2배 차이네요···."

말이 2배 차이지 더 오래 살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혀를 내둘렀다. 지구의 인간들은 80세만 넘어가도 장수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럼 혹시 나이를 따로 세는 방식이 있는 겁니까?"

수명이 다른 만큼 성년이나 연령대를 나누는 기준이 다를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그리 물었으나,

"귀쟁이식 나이라는 게 대체 무슨 소리냐! 그냥 나이를 먹은 거지 어찌 그런 양심도 없는 계산법이 있다는 말이야! 다 같은 사람이거늘!"

돌아오는 건 매서운 호통이었다. 왠지 모르게 아주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과 함께.

"아니,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나는 버럭 소리에 눈을 질끈 감은 엘프리데를 안심시켜 주며 툴툴거렸다. 난쟁이의 성격이 아주 불 같다. 이거야 원 무서워서 뭘 물어보기나 하겠나.

소리 좀 낮추라는 눈짓을 칸에게 보낸 후,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 칸. 칸은 아까 엘프리데가 무슨 말 했는지 알아들었죠? 무슨 말을 한 거예요?"

내가 물은 것은 엘프리데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외쳤던 말에 대한 것이었다.

"잠에서 깼을 때 했던 말 말이냐? 흠···. 여기에 괴물이 있다고 하더군. 흥,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여기만큼은 괴물이 있을 리가 없건만. 그냥 꿈이 덜 깨서 그런 거겠지. 잠을 오래 자긴 했으니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상태였을 거다."

"그 괴물이 사실 칸이 아니었을까요?"

"너도 한대 맞고 싶으냐?"

"아니요···. 농담입니다."

나는 다시금 수정 조각을 집으려는 칸을 말렸고, 엘프리데에게도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눈을 뜨고 나서 무언가를 하긴 한 것 같은데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머리를 크게 다쳤나?"

"저는 괜찮아요······."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의 상처를 확인하는 내게 엘프리데는 소심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녹안을 깜빡거렸다.

바로 그때.

"궁금한 게 다 풀렸으면 이제 둘 다 나가 봐라. 나는 이제 수정으로 발전기를 보수해야 하니까. 할 일이 산더미다. 더 놀아 줄 시간은 없어."

난쟁이 칸이 푸른 가루가 담긴 유리병을 내게 건네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는 오늘 안에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며 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자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알았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예린에게 줄 선물인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받았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내 뒤에 있던 엘프리데도 눈치껏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쿵

콰르르르륵

나와 엘프리데가 발전실 바깥으로 나오자 좌우로 밀려 있던 벽이 가운데로 모여 문이 있는 곳을 곧장 숨겼다. 온전히 작업에만 집중하기 위해 칸이 문을 봉쇄한 모양이다.

"······."

"······."

막상 좁은 발전실에서 좌우가 탁 트인 복도로 나오니 나와 엘프리데 사이에 어색함이 내려앉았다.

엘프리데는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해 쉴 새 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특히 복도 벽에 설치된 보안등을 볼 때 그러했다. 갑자기 환한 불이 팟하고 켜지자 화들짝 놀라며 내 뒤에 숨은 것이었다.

"엘프리데, 나한테 궁금한 건 없어? 여긴 어디고, 왜 여기에 있는지 말이야."

"···있어요. 다 궁금해요."

어색한 말과 함께 곧장 고개를 끄덕이는 엘프리데. 그녀는 나와 시선을 맞췄다. 검은 입자에 오염되지 않은 맑은 녹안이 호기심을 잔뜩 품은 채 나를 담았다.

그래, 궁금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언어만 공유받았을 뿐이지 사실상 그 외에는 지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나 다름없지 않던가.

칸이 수정의 봉인을 풀어 주었으니 남은 건 내가 엘프리데를 챙기는 것뿐이었다.

비록 내 생각처럼 어린아이는 아니었지만, 처음 보는 세상에서 눈을 뜬 것이니 사실상 아이보다 더 신경을 써 주어야 했다.

말해주고 싶은 것도 알려주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우선은···.

"그래, 천천히 다 알려줄 테니까 일단 내 일행이 지내는 방으로 가자."

"···다른 사람들이···. 또 있어요···?"

"어, 많아. 다들 좋은 사람들이고. 방에 도착하면 네가 갈아입을 옷도 구해 보자."

"옷···."

내가 입은 옷과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비교한 엘프리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사한 금발이 찰랑거린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이상하다는 건 아니야. ···음, 일단 가서 어떤가 한번 보고 나서 정하는 게 낫겠네."

나는 새끼 오리처럼 내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엘프리데를 이끌고 방으로 향했다.

작은 활을 품에 안은 그녀는 벙커 내부가 신기하다는 듯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나와 거리가 떨어지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따라붙었다.

저벅- 저벅- 도도도-

작은 발걸음 소리가 내 발걸음 소리 사이사이에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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